소설리스트

14화 (15/261)

“그냥 웃지 그러냐?”

“크흠.”

노르딕이 쯧쯧 혀를 차며 말하자, 에녹이 괜히 헛기침했다.

“공작님, 부끄러운 말이지만, 저는 공녀님을 교육하기에는 부족합니다.”

“흐음, 우리 애가 그 정돕니까?”

“예. 수학에 두각을 드러낸 어린아이들의 경우에는, 마탑에서 스카우트해 조기 영재 교육을 받는 게 일반적이에요.”

“해서 마탑에 연락을 넣어 뒀다. 리리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확인을 해 봐야겠다더구나.”

노르딕이 말을 받아 잇자, 에녹이 인상을 찌푸렸다.

“리리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요? 저랑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그냥 아이 수준을 테스트만 해 보는 거다. 마탑에 가고 말고는 리리스가 결정할 일이지. 하지만 결과가 나쁘지 않다면….”

“…….”

“아이가 나중에 마탑에서 일하는 것이, 네 마음도 편할 텐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고위급 능력자라면 모두 징병의 의무가 있는 파빌리온 제국.

하지만 마탑의 연구원들은 징병 순서가 최후순위였다.

땅이 쪼개지고 하늘이 터지는 제국 멸망의 날이 아니고서야, 그들까지 피 튀기는 전장에 출정할 일은 없단 얘기다.

“일단은….”

에녹이 고민하며 이마를 문질렀다.

“…리리스한테 물어보겠습니다. 공부가 진짜 재밌었는지.”

“그렇게 해라.”

“진짜 천재! 완전 천재! 세상에 다시없을 영재!”

레나 부인이 엄지를 세우고 끼어들며 호들갑 떨었다.

“흠흠. 뭐… 울 공주가 좀.”

“그 기어 올라가고 싶어서 안달 난 입꼬리 좀 어떻게 하고. 체통 없어 보인다.”

노르딕이 핀잔을 주자 씰룩이던 입술을 억지로 모은 에녹이 휙 뒤돌았다.

“이만 가봅니다.”

잔뜩 성이 나 들어왔을 때와 달리 한껏 신이 난 걸음으로 방을 나가는 아들의 뒷모습에 노르딕이 질색했다.

이내 그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애가 왜 저렇게 됐는지, 원.”

* * *

제도의 아동복 전문 의상실.

수업을 마치자마자 고모의 손에 이끌려 외출한 나는,

“우, 우와아….”

연신 감탄하느라 혼났다.

보들보들한 고급 원단으로 만든 하늘색 드레스. 하얀 프릴과 반짝이는 보석 장식….

옷이 날개라더니, 거울 너머에는 공주님이 있었다.

흠흠. 내 입으로 공주라고 하기엔 좀 민망하지만.

“와, 리리스. 너 진짜 이쁘다. 완전 공주님이네.”

내 뒤로 다가온 테오가 발을 동동,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곧 나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귀엽고 이뻐….”

그 모습에, 멀찍이 테이블에 앉아 의상실 마담과 함께 우릴 지켜보고 있던 고모가 풉 웃음을 터뜨렸다.

“테오, 동생이 그렇게 예뻐?”

“네, 엄마. 꼭 인형 같아요. 너무너무 사랑스러워요.”

솔직한 테오의 표현에 나는 조금 민망해졌다.

“후후, 저렇게 천사 같은데 아드님이 예뻐하실 만도 하죠. 항상 여동생, 여동생 노래 부르기도 하셨잖아요?”

“그러게. 어제도 들떠선 늦게까지 잠도 안 자고 동생이랑 놀러 나가자고 날 얼마나 보채던지….”

고모는 마담과 다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야, 꼬맹이! 아까 입었던 이게 훨씬 나아.”

그때 레온이 나를 끌어안고 있던 테오의 팔을 치우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레온이 들고 있는 옷은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맨 처음 입어 봤던 노란 드레스였다.

“오라버니는 노란색이 더 이뻐?”

“응. 지금 입은 건 너무 어른 같아. 노란색이 병아리 같고 귀여워.”

“흠, 아닌데. 리리스한테는 하늘색이 더 어울려.”

“테오 넌 눈이 없냐? 노란색이 낫다니까.”

“뭘 입어도 예쁘긴 한데 둘 중에 고르라면 나는 하늘색이야.”

“노란색이라고!”

둘이 하도 투닥거리니 뭘 고를지 정할 수가 없었다.

두 개 다 마음에 드는데….

“으음.”

레온의 손에 들린 드레스를 만지작거리는데 문득 가격표가 보였다.

[1,540,000 Terr]

‘뭐지?’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154만 테르라고 쓰여있는 게 맞나?

금화 한 개에 10만 테르니까 무려 금화 열다섯 개로도 못 사는 드레스인 거다.

참고로 제임스 브라운 씨가 나무 한 짐 가득 팔아봤자 5만 테르. 은화 다섯 개 벌어 오신다.

‘가, 가격이 미쳤어. 우리 아빠가 꼬박 한 달 쉬지 않고 일해야 버는 돈이야.’

입을 떡 벌리고 당황하고 있는데 어느새 일어난 고모가 마네킹에 입혀진 다른 드레스 가격표를 보고 있었다.

“어머.”

…비싸죠. 그쵸. 고모가 사 준다고는 했지만, 괜히 눈치가 보이는 순간.

“마담.”

“예, 부인.”

고모가 마담을 불렀다.

“신상품이라며. 원단을 뭘 썼길래 가격이 이렇게 저렴해요?”

……?

띠용.

예상과 다른 질문에 나는 순간 몸을 휘청였다.

“아닙니다, 부인. 걱정 마세요. 항상 쓰던 실크 맞아요. 요새 유통 물량이 늘어서 단가가 낮아져서 그래요.”

“아아, 그런가?”

고모는 몇 벌 더 둘러보더니 이내 웃으며 물었다.

“다 입어 봤니?”

“네, 네! 고모!”

나는 재빨리 내가 입고 있던 하늘색 드레스 가격표를 살폈다.

166만 테르. 그나마 레온이 고른 노란색 드레스가 더 싸다.

“고모, 저는 이거 노란색으루…!”

말하려는데, 고모는 이미 마담과 함께 멀찍이 카운터 쪽에 가 있었다.

“지금 입은 거 얼추 맞아 보이니 입혀서 바로 데리고 갈게. 나머지는 전부 치수 맞춰서 짓는 대로 보내줘요, 마담.”

“예, 부인.”

뭐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는데 고모가 나를 불렀다.

“리리스, 이만 갈까? 케이크 먹고 싶다고 했잖니?”

“저어, 고모. 옷…. 옷 고르는 거 아니었어요?”

“음?”

고개를 갸웃하던 고모가 이내 아, 탄성을 터뜨리더니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아냐. 고르라는 게 아니고, 그냥 네가 입어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여기 진열된 봄 신상품은 전부 주문했단다. 나머지는 집에 도착하면 또 입어 보자꾸나.”

“네에?”

매장에 진열된 드레스들은 열 벌이나 됐다.

150만 테르 언저리의 드레스가 열 벌이면 대체 가격이 얼마야?

“아, 아녀. 저는….”

한 벌이면 된다고 하려는 나를 알아봤는지 고모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옷을 한 벌만 살 순 없잖니.”

외출복 두 벌. 그마저도 열심히 빨아서 번갈아 입었던 서민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나는 꼴깍 침을 삼켰다.

‘이, 이게 그 TV에서만 보던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전부 계산해! 그건가?’

상상 그 이상의 스케일.

부자는 의상실 한번 오면 천만 단위 쇼핑은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하는 모양이었다.

사, 사 주신다는데 냉큼 받아야지….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꾸벅 인사했다.

“가, 감사함니다, 고모! 잘 입을게요!”

* * *

사르르,

혀에 닿자마자 녹는 부드러운 딸기 크림.

“흐아아아….”

황홀한 기분에 양 뺨을 붙잡고 흐물흐물 늘어지자 고모와 쌍둥이 오빠들이 웃었다.

“그렇게 맛있어, 리리스?”

“으응. 최고야….”

테오가 입에 묻은 크림을 닦아 주며 묻자 나는 잔뜩 풀린 눈으로 답했다.

제도의 최고급 디저트 가게에서 파는 딸기 케이크는 가격이 조금 무서웠지만, 맛은 최고였다.

‘나, 이거 진짜 다 먹어도 되는 거야?’

무려 4단이나 되는 디저트 트레이에 케이크와 마카롱, 쿠키가 ‘나를 먹어 줘!’ 하며 먹음직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것도 먹어 봐, 리리스.”

“오옴.”

“꼬맹아, 이것도.”

“뇸뇸.”

오빠들은 주는 대로 받아먹는 내가 재미있는지 연신 포크를 들이밀었다.

양 볼이 뚱뚱해졌다.

“하하, 너무 귀여워. 엄마, 리리스 꼭 다람쥐 같아요.”

“잘 먹으니까 너무 예쁘네. 배탈 날지도 모르니까 천천히 먹으렴.”

“네!”

비싸서 한 달에 두 번 먹으면 많이 먹는 거였던 마카롱을 이렇게 마음껏 먹을 수 있다니….

‘여긴 천국이야.’

제도에 오길 잘했다.

“어머, 발레린 백작 부인인가?”

그때 고모가 가게 밖에 선 마차를 보며 일어났다.

곧 마차에서 통통한 몸집의 귀부인이 내리더니 창 너머로 고모를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헉. 에리카도 있다.”

“뭐? 아씨!”

뭐지? 레온이 벌떡 일어나더니 우왕좌왕 어쩔 줄을 모르다가 내가 앉은 의자 뒤로 몸을 숨겼다.

“모해, 오라버니? 숨는 거야? 하나두 안 가려지는데.”

“아, 진짜 짜증 나….”

레온은 포기하고 다시 자리에 풀썩 앉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왜 그래?”

“레온은 에리카를 별로 안 좋아하거든. 며칠 전에 놀러 왔을 때 왕거미로 겁줘서 쫓아내려고 했다가 에리카가 다치는 바람에 엄마한테 혼났어.”

“아항!”

테오의 설명에 생각이 났다.

그 왕거미 어쩌고 사건의 피해자였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게로 들어오는 에리카를 봤다.

“우와! 저 언니 꼭 공주님 같다….”

에리카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몽글몽글한 밀빛 머리카락에 나뭇잎처럼 싱그러운 녹색 눈동자를 가진 미소녀였다.

늘씬하게 키도 컸고. 꼭 잡지에 나오는 예쁜 키즈모델 같았다.

“레오오온!”

발그레 양 뺨을 붉힌 에리카가 달려오다가 우뚝 멈춰 섰다.

마냥 생글거리던 에리카는 갑자기 눈을 확 뒤집더니 나를 노려봤다.

정확히는… 내 어깨를 끌어안고 있는 레온의 팔을.

“뭐야, 레온? 이 여자 누구야?”

?

여, 여자라뇨. 성별이야 여자가 맞긴 하지만, 전 고작 일곱 살 응애 애기 리리스인데요.

갑자기 분위기가 사랑과 전쟁이었다.

‘무서워라….’

눈빛만으로 나를 태워버릴 듯한 에리카의 시선에, 나는 입에 문 포크를 슬그머니 빼서 내려놓고 눈만 도로록 굴렸다.

“이 여자 누구냐고!”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아니, 왜 그렇게 오해하게 말해?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레온을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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