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들 불륜 로맨스도 아니고!
듣기만 해서는 그 누구도 이게 일곱 살과 열두 살들이 등장하는 대화인 줄 모를 거다.
“에리카, 이마는 좀 어때? 많이 나았니?”
그때 발레린 백작 부인과 멀찍이 서서 얘기하고 있던 고모가 다가왔다.
“네, 부인. 이제 괜찮아요. 그런데 이 여자는 누구예요?”
에리카가 나를 삿대질하며 물었다.
고모는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레온의 사촌동생이야.”
“…네?”
에리카가 큰 눈을 깜빡거리다가 곧 입을 틀어막으며 탄성을 터뜨렸다.
“맞다! 루빈슈타인 공작님이 오실 수도 있다고 했죠? 정말 돌아오신 거예요?”
“그래. 바로 어제.”
“그랬구나! 말을 하지!”
에리카는 개비X콘이라도 먹은 사람처럼 편안한 표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반가워!”
“어억!”
다가온 에리카가 내 오른쪽에 앉아있던 테오를 끌어내고 냉큼 그 자리에 앉았다.
“네가 공작님 딸이구나. 너 정말 천사같이 생겼다. 깜짝 놀랐어. 하마터면 질투할 뻔했잖아. 난 에리카 발레린이라고 해. 열두 살이야.”
“저는 리리스 루빈슈타인이에요. 일곱 살이요. 언니도 이뻐요. 공주님 같아요.”
“어머?”
에리카는 부끄러운 듯 몸을 배배 꼬았다.
“고마워, 리리스. 그리고 하나 더 말해 주자면, 나는 여기 레온이랑 미래를 약속한 사이야.”
“미친 거 아니야? 대체 누구 마음대로?”
레온이 발끈했지만, 에리카는 아랑곳하지 않고 덧붙였다.
“나중에 너랑도 가족이 될 테니까, 미리 언니라고 불러도 돼. 말도 놓고. 우리 친하게 지내자?”
“하, 진짜…. 진짜 싫다….”
나는 옆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는 레온과, 에리카에게 밀려 맞은편에 앉은 테오를 번갈아 보았다.
‘둘이 똑같이 생겼는데 연애 상대로는 다정한 테오 쪽이 훨씬 낫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에리카는 레온이 치를 떨며 “싫어.”, “너 좀 가라!”, “진짜 못생겼어.” 따위의 심한 말을 해 댈 때마다 얼굴을 붉혔다.
나는 귀에서 피가 날 만큼 왁자지껄해진 오후의 디저트 타임을 즐기며 에리카의 취향을 깨달았다.
‘나쁜 남자 좋아하는구나….’
* * *
즐거운 첫 제도 나들이를 마치고 귀가한 저녁.
아빠가 고래고래 소리치며 들이닥친 건, 씻고 잘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공-주-우!”
“아코, 깜짝아. 문짝 떨어지겠다!”
마침 이불 속으로 꼬물꼬물 들어가고 있던 내 옆으로 아빠가 날아들었다.
“너!”
“아빠 저녁 먹었어?”
“저녁?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진작 먹었지.”
“잘했어. 끼니 거르면 안 돼. 나도 고모랑 오라버니들이랑 밖에서 맛있는 거 먹구 왔어. 의상실 가서 치수도 재고 옷도 주문했다? 고모가 열 벌이나 사 준 거 있지?”
“하하, 마음에 들었어?”
“완전. 공주님 드레스도 있지롱!”
“아니, 잠깐. 그건 그렇고.”
풀썩 누워 나를 마주 본 아빠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너 오늘 하루 종일 공부했다며?”
“하루 종일은 아니고. 세 시까지.”
“미안해, 공주야. 예법 선생님만 붙여줄 생각이었는데 할아버지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
“몬 소리야. 당연히 다 배워야지. 공부 재밌어.”
“…재밌어?”
“응. 아빠가 나 공부도 안 시키고 오냐오냐 키우느라 하마터면 지능 수준 침팬지 될 뻔했자나. 이제 공부 열심히 해서 똑똑이 될게.”
“아냐, 공주는 아직 놀아도 돼. 공부 천천히 해도 괜찮아.”
“에휴, 이제 노는 것도 지겨워. 공부가 더 재밌다니까? 어렵지도 않구.”
“정말이야?”
“응, 정말. 어렵고 재미없구 하기 싫으면 말할게. 근데 정말 쉽고 재밌는걸?”
아빠는 내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지 표정을 빤히 살피더니 이내 입꼬리를 씰룩였다.
“그으렇구나. 사실 수학 선생님이 그랬는데, 공주 천재래. 아빠가 봐도 그렇더라고?”
“그, 그래?”
초등학생 문제를 풀고 레나 부인에게 불세출의 천재라며 극찬받았던 것이 떠올라 나는 민망해졌다.
그녀가 할아버지나 아빠에게 가서 비슷한 주접을 떨었다면….
‘우리 제임스 씨, 기분 좋았겠네.’
자식이 천재라는데 어느 부모가 싫어할까.
어차피 민망함은 한순간 아니던가. 아빠의 기분이 좋다면 나는 그걸로 만족이었다.
“내 새끼는 대체 누굴 닮은 거지? 누굴 닮아서 이렇게 머리도 좋아? 응?”
아빠는 실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생각도 없이 나를 끌어안고 뺨을 마주 비볐다.
“아빠 닮았지이.”
“아하하하!”
“아빠도 오늘 바빴지? 고생해써.”
“괜찮아. 울 천재 딸도 공부 열심히 하는데 아빠가 돼서 놀면 안 되지.”
아빠는 옆으로 누워서 턱을 괴곤 나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입이 귀에 걸린 아빠를 보니 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후후, 천재….
* * *
하하, 천재….
취소할게요.
실은 나 천재 아니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마탑 영재관리부서 소속 로베르트 퀀이라고 합니다. 로벨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공녀님.”
“네, 네에….”
“리리스, 긴장할 거 없어. 그냥 저 아저씨 질문에 편하게 답만 하면 되는 거야.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돼.”
아빠가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긴장되느냐? 어제 교사들과 했던 대로만 하면 된다.”
할아버지도 한마디 덧붙였다.
나는 둘 사이에서 이를 꽉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대지 말걸….’
그저 의미 없는 수업을 빨리 끝내고 싶었던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나는 시험대에 올라 있었다.
무려 마탑에서!
나의 천재성을 검사하러 온 것이었다.
이렇게 일이 커져 버린 이유는 수학 때문이었다.
보통 마법을 구현할 때는 수식이 필요하고, 그 수식을 만들어내는 이들은 마탑의 연구원인데.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수학 영재’들이었다는 것!
수학이라는 학문이 마법식의 기본 원리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탑은, 수학 좀 하는 애들을 찾아내 어렸을 때부터 영재 교육을 지원한다.
‘그걸 몰랐던 것도 아닌데….’
원작의 세계관을 달달 외워 놓고 이런 참사도 예상하지 못했다니.
정말이지 천재는 개뿔이.
난 그저 어린이의 몸에 어른의 정신이 갇혀있을 뿐인 거다….
“그리고 저쪽은… 아시겠지만, 오스카 마뉘엘 님이십니다.”
로벨은 다소 긴장한 눈치로 뒤를 돌아보았다.
백발 금안의 소년이 거만한 표정으로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그는 기껏해야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앳된 얼굴이었지만….
“역대 최연소 마탑주시죠.”
…그래, 무려 마탑주시다.
오스카 마뉘엘!
제도 입성 사흘 만에 얼굴을 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웅장한 비중의 등장인물!
‘이게 고작 곱셈이랑 나눗셈 좀 한 거로 생겨난 나비효과라고?’
앞으로 나를 원작 파괴 빌런이라 불러 달라….
아니지, 이럴 때가 아니다. 나는 재빨리 머릿속으로 셈을 했다.
마탑주, 오스카는 굳이 따지자면 ‘적’에 가깝다.
아빠는 반란을 준비하며 능력자, 고위 귀족, 정계 인사들을 다 같은 편으로 만들었지만.
‘마탑만 손에 못 넣었지.’
오스카만은 끝까지 아빠를 돕지 않았다.
그를 주축으로 한 마탑만 손에 넣었어도 혁명이 한 3년은 빨랐을 텐데.
그렇다고 오스카가 황실 편이었느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란 말이지. 원작을 다 읽었어도 저놈 속만은 모를 일이야.’
아무튼, 나는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1. 튀어봤자 좋을 거 하나 없는 처지다. 영재까진 아니고, 적당히 똑똑한 수준으로만 보이도록 하자.
2. 마탑과 연을 맺어 오스카를 미리 포섭할 기회다. 제대로 영재인 척해 보자. 주목받는 걸 감수해야 하는 도박.
나는 재빠르게 1번을 골랐다.
주인공인 울 아빠도 포섭에 실패한 철벽남 오스카를 내가 무슨 수로 내 편으로 만들겠는가?
‘좋았어.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로벨이 낮은 칠판에 써 주는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대충, 어제 교사와 공부했던 진도까지만 풀면 될 터였다.
“이럴 수가. 정말 대단하시군요.”
두 자릿수의 곱셈을 하는 나를 보고 로벨이 감탄했다.
“우, 우리 딸 진짜 천재네….”
아빠도 놀랐다.
그때.
“지금 장난해?”
“예, 예?”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오스카가 일어나자 로벨이 당황했다.
“내가 이런 애들 소꿉장난이나 보자고 온 줄 알아?”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로벨은 쩔쩔매며 사과했다.
오스카는 새파랗게 어린 주제에 상당히 건방졌지만, 아빠도 할아버지도 그의 태도를 대놓고 지적하지는 않았다.
‘뭐, 마탑주시니까.’
굳이 급을 따지자면, 아빠와 비등비등한 수준의 권력자였다.
“제대로 확인해.”
“옙.”
로벨이 칠판 가득한 문제들을 다 지우고 새로 쓰기 시작했다.
“흠흠.”
뭐냐, 저건….
문제를 내는 로벨은 민망해하고 그걸 보는 나는 당황했다.
Q. 어머니의 나이는 오스카 마뉘엘의 나이의 2배보다 3살이 많고, 아버지의 나이는 어머니 나이보다 5살이 많다. 아버지의 나이가 42세일 때, 오스카 마뉘엘의 나이를 구하시오.
‘이, 일곱 살한테 1차 방정식 문제를 낸다고?’
어이가 없어서 돌아보니 이제야 만족한 듯 오스카가 웃고 있었다.
“해 봐.”
“…….”
어차피 풀 생각도 없었지만, 정말 미친 사람이군….
역시 ‘천재인 나’에 취해서 사는 또라이가 틀림없었다.
나는 조금 더 문제를 읽어 보는 척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모른다고?”
“네에….”
풀이 죽어 대답하자 로벨이 내 어깨를 다독여 줬다.
“공녀님, 시무룩하실 필요가 전혀 없으십니다. 보통 마탑에 스카우트되는 수준의 영재들도 일곱 살에 이 문제를 풀진 못해요.”
“그래, 공주.”
아빠가 오더니 칠판 앞에 서 있던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잘했어. 이 문제는 너무 어렵다. 우리 공주 충분히 천재야.”
“응, 헤헤.”
“수고했다, 리리스.”
할아버지까지 흐뭇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하아.”
훈훈한 분위기를 깨는 한숨 소리.
오스카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다가 이내 휙 몸을 틀었다.
다 들리는 혼잣말을 중얼대면서.
“괜히 멍청이에게 시간 낭비만 했군.”
……?
나를 안은 아빠의 팔에 바짝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큰일 났다.’
아빠가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