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7/261)

“거기 서.”

‘차, 차라리 서지 마라.’

그러나 내 바람과 달리 오스카는 기다렸다는 듯 빙글, 몸을 틀었다.

아빠는 나를 내려놓고 오스카에게 다가갔다.

“지금 뭐라고 했지?”

“멍청이에게 괜한 시간 낭비를 했다고 했습니다.”

“하.”

아빠는 헛웃음을 터뜨리다가 이를 꽉 물었다.

“사과해. 내 딸한테.”

“공이야말로 금처럼 귀한 제 시간을 낭비하게 한 걸 사과하시죠. 지금까지 한 시간 삼십칠 분 썼습니다.”

“누가 오랬나? 마탑주가 친히 올 일은 아니었을 텐데. 부르지도 않은 자리에 직접 행차하셔놓고.”

“기대했으니까요. ‘그’ 에녹 루빈슈타인의 따님이시라기에.”

오스카가 거만하게 턱을 세우며 덧붙였다.

“한데 여느 한심한 부모들과 다를 바가 없었군요. 마탑에 영재 교육을 신청하는 치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

“알량한 숫자놀음 좀 하는 걸 가지고 다들 혈안이 되어선. 내 자식이야말로 영재일 거다, 턱도 없는 기대에 부푼 꼴들이 참 웃기거든요.”

“이봐, 난 일곱 살 때 내 딸처럼 못 했어. 대체 저 나이에 저걸 누가 풀 수 있지?”

“저는 했습니다만. 정확히 일곱 살 때.”

“…….”

아빠는 말문이 막힌 듯했다.

“…사과해.”

“싫습니다.”

“도대체가 예의란 게…!”

“에녹.”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중재하려 할아버지가 끼어들었다.

“마탑주, 손녀의 일로 연락을 넣은 것은 나일세. 그대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면 유감이군. 그쯤 해 두고 이만 돌아가시게.”

“아하, 그러십니까? 노르딕 님도 나이를 먹긴 먹으신 모양이군요. 한때나마 제가 존경했던 혜안이 오간 데 없으신 걸 보니.”

…저 미친놈.

진짜 위아래도 없네.

“마탑주!”

아빠가 못 참고 언성을 높였다.

할아버지는 혹시나 손이라도 올라갈까 걱정됐는지 아빠의 팔을 세게 휘어잡았다.

나는 그때 속으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참아. 참아. 나대지 마, 리리스. 나대서 좋을 거 하나 없어. 제발.’

‘싫은데? 왜 참아? 할아버지한테까지 건방지게 구는 놈을 그냥 보내게?’

참아야 한다는 이성과 저 싸가지 밥 말아 먹은 놈의 콧대를 납작 눌러주고 싶은 충동이 마음속에서 엎치락뒤치락했기 때문이었다.

“모쪼록 공의 제도 복귀는 환영합니다. 따님은 이 바닥에 널리고 널린 둔재이니 괜한 헛꿈은 꾸지 마시고, 7년 동안 내팽개쳐 놓은 가문이나 다시 잘 꾸려서 물려주시길.”

…저놈이 끝까지?

툭, 내 머릿속에서 뭔가 끊겼다.

충동이 이기고 만 것이다.

“아빠, 기다려요!”

나는 달려가 아빠가 욱하기 전에 바짓자락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시건방진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오스카에게 말했다.

“일곱 살 때 저걸 푸셨다구요?”

“그래.”

“천재시다아.”

“맞아. 너는 둔재고.”

“둔재라서 다행이에요. 천재라서 마탑에 가면 예의범절은 못 배울 테니까요. 마탑주님처럼 버릇없이 자라면 아빠가 슬퍼하실 거예요.”

“…뭐?”

순간 오스카의 표정이 멍해졌다.

아빠는 움찔하더니 웃었다.

“어어, 맞지. 건강하고 예의 바르게만 크면 그만이지, 우리 딸.”

“5분만 더 주세요.”

나는 오스카의 집요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저 문제 다시 풀어 볼게요.”

“네가?”

“네. 제가 맞히면, 아빠랑 할아버지에게 예의 없이 말한 걸 사과해 주세요.”

“…….”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한참 만에, 오스카가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

“좋아. 해 봐.”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칠판 앞으로 돌아갔다.

당황한 아빠가 말했다.

“리리스, 공주야. 무리할 필요 없어.”

칠판의 문제를 다시 읽는 동안.

‘미쳤니? 너 멍청이 맞다.’

이성이 돌아왔다.

한순간의 충동을 참지 못하고 내가 저지른 짓은 엄청났다.

지금 이걸 풀면 나는 영재 소릴 듣게 될 거다.

그리고 이보다 더 높은 수준의 문제로 계속해서 이해력과 인지 능력 등을 평가받겠지.

실은 영재가 아니라 어른 머리로 이미 아는 문제를 푸는 것뿐인 내가, 어느 정도까지 영재인 척을 할 수 있을지….

‘아냐, 아냐. 그래도 전생에서 고등 교육 과정까지는 다 뗐잖아?’

문과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문이과 통합형 천재…까지는 아니고 인재 정도는 됐었다.

학자금 대출 갚으려고 수학 과외 했던 기억도 있지 않은가.

참고로 내가 가르친 고등학생, 소울대 수학교육과 갔다.

‘그래, 까짓거 지르자. 난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어.’

나는 분필을 집었다.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탁, 탁, 탁.

칠판 위를 오가는 분필 소리만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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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들이 칠판 가득 거침없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수많은 영화 속 장면들이 떠오른다….

물론 그들은 진짜 천재겠고 나는 천재인 척하는 것뿐이겠으나.

‘기왕 영재 코스프레 하기로 한 거, 멋지게 해 보자구!’

인생 뭐 있나.

나는 얼굴에 두꺼운 철판을 깔고 망설임 없이 행동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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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쉼 없이 분필을 놀리던 나는 마지막 방점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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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분필을 탁, 내려놓은 다음 뒤돌았다.

로벨도, 아빠도, 할아버지도….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내, 내가 뭘 본…. 아니, 저… 고, 공작님? 저, 저게 뭔가요?”

로벨이 멍하니 눈을 비비며 옆에 있던 아빠에게 물었다.

“…나, 나도 몰라.”

아빠가 입을 떡 벌린 채 고개를 저었다.

그 사이에서 오스카는 묘한 표정이었다.

“마탑주님은.”

나는 분필 가루가 묻은 손을 탁탁 털고 말했다.

“열일곱 살이에요.”

* * *

오스카 마뉘엘은 그냥 싸가지가 없을 뿐.

예의란 게 뭔지는 아주 잘 알고 있는 놈이더라.

그는 약속대로 아빠와 할아버지에게 자신이 무례했음을 인정하며 허리까지 90도로 숙여 보였다.

너무 쉽게 받아낸 승리라 그런지 감흥도 만족도 없었다.

그저 남은 건, 대책 없이 어마어마하게 일을 키워버린 내 행동에 대한 후회뿐.

“하아, 인생….”

공부방에 덩그러니 혼자 앉은 나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내가 뭘 한 거지?”

분해서 씩씩거리는 오스카의 표정을 보고 싶었을 뿐인데….

오히려 영재를 찾았다는 만족인지 그의 눈은 광기로 빛났다.

‘역시 또라이가 틀림없어.’

심지어 우리 집에서 저녁 식사도 했고 개인적으로 나를 가르치겠다고까지 했다.

물론, 기왕 마탑주와 연이 생긴 김에 포섭 시도는 해 보고자 수락한 참이었다.

드르륵.

“깜짝이야.”

갑자기 의자 빼는 소리가 들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식사를 마친 오스카였다.

“꺼―억.”

“……?”

“자알 먹었다.”

거하게 트림을 한번 뱉은 오스카는 자기 배를 통통 두드렸다.

‘뭐, 뭐야?’

잘생긴 얼굴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비호감이었다.

오스카는 어이없어하는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뭐지? 어째 딴 사람 같네.’

그는 왜인지, 아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어디 공부 좀 더 해 볼까.”

오스카가 가볍게 턱짓하자 종이와 펜이 날아와 내 앞에 놓였다.

“우와아.”

“신기하지?”

“네.”

“모든 공간에는 좌표라는 게 있어. 마법식을 만들려면, 이 공간의 개념을 수식화할 줄 알아야 해.”

아하. 공간의 수식화라….

그러니까 대략 자연계 고등 교육 과정인 벡터(*vector: 추상적인 벡터공간을 구성하는 원소) 개념까지는 알아야 마법식을 만드는 모양이었다.

‘마법이라는 거, 상당히 체계적이었구나?’

조금 흥미가 생겼다.

벡터 정도라면 내가 가진 지식 선상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기도 하고.

“너 0보다 작은 수는 알아?”

“0보다 작은 수도 있어요?”

능청을 떨자, 픽 웃은 오스카가 턱을 괴고 종이 위에 펜을 끼적였다.

3-5=

“풀어 봐.”

“흐음.”

오스카는 내게 음수의 개념을 가르치려는 모양이었다.

뭐, 조금 고민하는 척하다 답을 내면 되겠지.

펜 끝을 입에 물고 가만 문제를 보는데 오스카가 중얼거렸다.

“…작네.”

“네? 모가요? 숫자가요?”

“아니.”

돌아보니, 오스카는 왜인지 묘한 눈으로 웃고 있었다.

“너 말이야.”

“…네?”

“작아도 너무 작다고.”

순간 나는 멍해졌다.

오스카는 턱을 괴고 나를 찬찬히 뜯어보며 덧붙였다.

“일곱 살이라기엔… 너무 이상할 정도로 안 큰 것 같은데.”

“…….”

쿵.

심장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 나는 또래보다 작았다.

그리고 거기엔 이유가 있는데.

‘이, 이 자식 뭘 알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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