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8/261)

오스카는 긴장한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못 먹고 자라서 그런가.”

“…….”

오스카 마뉘엘.

원작을 달달 외울 만큼 읽었어도 그 속을 알 수 없던 인물.

그래서 나는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그의 의중을 좀처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냥 해 본 소리인지, 정말 내 ‘비밀’을 알고 하는 말인지….

“아, 앞으로 많이 먹으면 돼요.”

“그래, 많이 먹어라. 많이 먹고 쑥쑥 커야 나랑 일하지.”

“전 마탑에 안 갈 건데요?”

“마탑에서 일하는 게 너도 편할걸.”

3-5=-2

나는 오스카가 내준 문제에 답을 써넣으며 선심 쓰듯 말했다.

“뭐, 생각해 볼게요.”

오스카가 큭큭 웃었다.

* * *

“너 정말 일곱 살 맞아?”

“아가씨는 또래보다 엄청 작으시네요?”

“쟤 일곱 살인데 엄청 작아. 바보.”

오스카가 돌아간 후.

나는 머리가 아파 잠시 미뤄 뒀던 ‘나’라는 등장인물에 대해 생각했다.

성기사 삼촌들, 고모, 할아버지, 쌍둥이, 사용인들, 그리고 오스카까지….

제도에 오자마자 벌써 내 성장 속도에 의문을 품는 이들이 한 트럭이었다.

사실 내가 엑스트라인 줄 알았을 땐, 그냥 남들보다 발육이 느린가 보다 생각하고 말았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내가 천천히 크는 건 다 이유가 있었지.’

주인공의 자식이니 당연한 말이겠지만, 나는 평범하지 않다.

아니, 평범이 다 뭔가.

아마 내 진짜 정체만큼 까무러칠 만한 게 없을 거다.

주인공, 에녹 루빈슈타인의 딸.

황실에 납치되었다가 후에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비운의 조연.

정확히는 모두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소설의 최종 장에서야 살아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어마어마한 반전 요소였달까?

“천재 공주님, 이제 주무셔야지요?”

“천재 소리 그만해, 아빠….”

“아하하하! 왜에.”

아빠는 침대로 들어와 나를 꼭 끌어안았다.

“울 딸 오늘 최고였다. 할아버지 입 귀에 걸린 거 봤어? 나한테는 맨날 체통 없이 굴지 말라더니 오늘 아주 자기가 더 신나서는.”

아빠는 킬킬거리며 한참 조잘거리다가 늘어지게 하품했다.

“졸리면 빨리 자요.”

“뭐야. 공주는 잠 안 와?”

“공주는 생각할 게 좀 있어.”

“안 졸린가 보네. 책 읽어 줄까?”

아빠가 침대 헤드 뒤의 책장에서 동화책 한 권을 꺼냈다.

“자아, 보자. 오늘의 이야기는… 탑에 갇힌 공주님!”

“우와앙, 재밌겠다.”

나는 건조하게 감탄했다.

전생을 다 떠올린 뒤부터는 밤에 동화책 읽는 시간이 지루했지만….

“아니, 우리 리리스가 탑에 갇히다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어디 볼까?”

아빠가 내게 책 읽어주는 걸 워낙 좋아해서 꾹 참고 버티는 편이었다.

“옛날 옛적에, 착한 왕과 공주가 있었습니다. 왕은 딸인 공주를 너무나 아끼고 사랑했어요.”

“헤헤. 아빠랑 나네.”

“그러게.”

아빠는 품 안의 나를 더 끌어안으며 책 한 장을 더 넘겼다.

“그러던 어느 날. 공주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이웃 나라의 나쁜 왕이 공주를 납치했습니다.”

“…….”

“공주를 빼앗긴 착한 왕은 하루하루를 눈물로 지새웠어요. 착한 왕은 나쁜 왕에게 보물을 바치고, 부하가 되었지만… 그래도 나쁜 왕은 공주를 돌려주지 않았어요.”

“…….”

“와, 어떻게 아빠랑 딸을 생이별시키냐? 진짜 나쁘다, 그치?”

“어어, 그르게.”

근데 이거 뭔가 내용이 좀 익숙한데…?

“슬픔에 빠진 착한 왕은 어느 날 한 소년을 만났습니다. 소년은 무척 강했어요. 그래서 착한 왕은, 언젠가 공주를 다시 만났을 때 좋은 오라버니가 되어줄 수 있도록 소년을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 잠깐.”

“어, 왜?”

“아, 아니야. 재밌다구. 계속 읽어 줘.”

“그치? 이거 흥미진진한데? 또 그러던 어느 날. 나쁜 왕은, 공주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왔어요. …엥? 갑자기 공주가 죽었다고? 내용이 왜 이래?”

아빠가 인상을 찌푸리며 책을 이리저리 뒤집었다.

나는 급히 아빠의 팔뚝을 때렸다.

“계, 계속 읽어 봐, 아빠. 나쁜 왕이 거짓말했을 수도 있잖아. 실은 안 죽었을걸?”

“그렇겠지? 제목이 공주님인데 설마 공주가 진짜 죽었겠어?”

아빠는 마저 책을 넘겼다.

“화가 난 착한 왕은, 왕자와 함께 나쁜 왕에게 복수하기로 했습니다.”

“…….”

“착한 왕과 왕자는 나쁜 나라의 나쁜 사람들을 모조리 무찌르고 마지막으로 나쁜 왕을 잡아 칼을 겨누었어요.”

칼 쓰는 시늉까지 하며 몰입하는 아빠의 모습에도 나는 집중할 수 없었다.

착한 왕은 에녹 루빈슈타인.

양아들인 왕자는 체시어.

나쁜 왕은 황제.

그리고 공주님은 나.

‘…동화책 작가 누구지? 작가가 아니라 무당 아니야?’

너무나도 원작 <도스의 반란>과 비슷해서 충격적이었다.

납치된 딸을 돌려받으려 황제의 꼭두각시가 되는 에녹 루빈슈타인.

그 딸의 ‘정체’를 알고 결국, 딸이 죽었다고 꾸미고 평생 감금하며 힘을 착취하는 황제.

에녹 루빈슈타인은 딸이 죽은 줄만 알고 복수하러 찾아가지만….

“착한 왕은 말했습니다. ‘내 딸의 복수를 하겠다!’ 그러자 나쁜 왕이, ‘네 뜻대로 호락호락하게 될 것 같으냐!’ 하고 대답했어요.”

“왜, 왠지 그다음에 공주 나올 것 같아.”

“그러자 죽은 줄만 알았던 공주님이 탑에서 내려왔습니다. 착한 왕은 깜짝 놀랐어요. …어어, 맞네? 공주님 살아있었네! 우리 딸 천재!”

아빠가 킬킬거리며 덧붙였다.

“하지만 공주님은 탑에 갇혀있는 동안 나쁜 왕에게 세뇌된 상태였어요. 아버지도 알아보지 못하고 착한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잠깐. 이거 왜 얘기가 산으로 가? 공주가 뭔 힘이 있어?”

“아빠, 아빠, 아빠! 끊지 말고 계속 읽어 봐! 공주가 힘을 숨기구 있었을 거야!”

“어어, 알겠어. 충격받은 착한 왕을 향해, 나쁜 왕이 소리쳤어요. ‘실은 공주는 아주 강한 마녀라 내가 숨겨두었다! 이제는 내 말만 듣는 꼭두각시지!’ …리리스? 너 이거 읽어 봤어?”

“그, 그냥 모… 뻔한 이야기야.”

“이게 뻔하다고?”

아빠의 눈이 가늘어졌다.

“엄, 그래…. 어디 계속 읽어 보자. 착한 왕은 공주를 되돌리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제 양아들인 왕자가 공주 죽이려고 할 것 같아.”

“왕자는 슬피 우는 착한 왕에게 말했어요. ‘아버지, 지금 공주를 죽이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이 죽게 될 거예요.’ 그리고 왕자는 칼을 뽑아 공주의 목을….”

아빠는 더 읽지 않고 책장을 넘겨 뒷부분을 혼자 본 다음, 책을 탁 덮고 중얼거렸다.

“이게 애들 동화책이라고?”

“왜? 어뜨케 되는데?”

“별로 좋은 결말이 아니야. 더 안 읽어도 될 것 같아.”

“결국 공주 죽지?”

“어…. 왕자가 죽이네….”

인상을 찌푸린 아빠가 책장에 책을 구겨 넣었다.

“앞으로는 아빠가 먼저 본 다음에 읽어 줘야겠다. 너무 해로운 내용이었어. 미안해, 공주야.”

“그래도 해피엔딩이네….”

“뭐? 대체 어디가?”

“공주가 납치 안 당했으면, 착한 왕이 나쁜 왕한테 복수하려고 안 했을 거 아냐? 결국 착한 왕이 나쁜 나라 다 쓸어버렸으니까 모두 행복해졌겠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공주는 죽었는데?”

“어쩔 수 없지, 모. 나쁜 왕에게 조종당하긴 했지만, 어쨌든 공주는 사람을 많이 죽였으니까.”

“하, 그래도 공주가 죽었으니까 이건 해피엔딩이 아니야.”

“해피엔딩 맞아.”

“아니라니까 그러네? 들어 봐.”

아빠는 발끈하며 기대어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주인공은 착한 왕이었잖아?”

“그치.”

“주인공이 아끼던 딸이 죽었고?”

“그치.”

“그럼 모두 행복해졌다고 해도 주인공은 아니겠지?”

“…그렇겠지?”

“주인공이 행복하지 않으면 해피엔딩이 아니야, 리리스.”

“…….”

“사랑하는 딸을 먼저 보낸 아빠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어. 그러니까 이건 해피엔딩이 아니야.”

단호한 아빠의 표정에, 나는 문득 원작의 결말을 떠올렸다.

원작은 분명 해피엔딩이었다.

체시어가 에녹 루빈슈타인의 딸을 해치운 뒤.

비로소 평화로운 새 제국이 탄생했다는 서술로 끝을 맺으니까.

‘그럼 원작이 끝난 뒤에 아빠는 어땠을까?’

딸의 무덤 위에 이룩한 평화로운 나라에서 주인공은 행복했을까?

“아빠.”

“응.”

“만약에…. 아빠가 착한 왕이고 내가 공주님이라면… 아빠는 나 죽고 나서 어떻게 살 거야?”

“뭘 어떻게 살아.”

아빠는 다시 풀썩 누우면서 나를 끌어안았다.

“아빠는 못 살아.”

“응?”

“아마 착한 왕도 같은 생각이었을걸. 공주가 죽은 줄 알았을 때 바로 따라 죽지 않은 것도, 복수해야 하니까 겨우 버틴 거지.”

“…….”

“어차피 복수가 끝나면 따라 죽을 생각이었을지도 몰라.”

“그, 그게 뭐야? 아빠까지 죽으면 어떡해!”

“너도 나중에 자식 낳아 봐. 내 맘 같을걸.”

가슴 철렁하는 딸 속도 모르고, 아빠는 다정하게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공주 보고 싶으니까 바로 따라갈 거야. 아빠는 공주 없이 절대 못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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