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9/261)

“안 돼!!!”

“아하하하. 표정 봐. 걱정하지 마. 이건 동화일 뿐이야. 아빤 애초에 공주 뺏기지도 않을걸?”

뺏기는데요….

원래대로였다면….

“그리고 뺏겼대도 바보처럼 나쁜 왕 부하로 들어가지도 않을걸? 그냥 바로 쳐들어가서 나쁜 왕 쓱싹하고 우리 공주 구해오지.”

아닐걸. 그렇게 쉽지 않을걸….

나는 착잡해지는 마음을 감추고 말했다.

“아빠. 나 물어볼 거 있어.”

“뭔데?”

“능력자들은 황제 폐하가 시키면 다 전쟁터에 가야 하잖아?”

“어? 어어, 응. 그렇지.”

“그런데 아빠가 전에 그러지 않았어? 나는 안 가도 된다구?”

“응. 우리 공주는 안 가도 돼.”

“왜? 나 아빠 딸이니까 엄청 쎈 능력자 아니야? 그럼 가야지.”

“아니야. 안 가도 돼. 아빠한테 다 방법이 있쥐.”

“그게 먼데?”

“있어, 아무튼. 어우, 졸리다.”

아빠는 대답을 피하며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굳이 안 들어도 아빠의 계획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빠는 곧 황제를 독대하러 갈 거다. 그리고 99.9%의 확률로 아마 내 군 면제를 부탁하겠지.

협상을 위해 아빠가 황제에게 내밀 카드는 뻔하다.

앞으로는 군말 없이 황명에 복종하는 개가 되기.

전쟁 나면 나가고, 시키는 거 다 하고….

‘착한 왕은 나쁜 왕의 부하가 될 수밖에 없어.’

주인공에게는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딸.

‘이번에 황제가 아빠를 찾은 것도 역시 전쟁 때문이겠지?’

납치된 딸을 돌려받기 위해 에녹 루빈슈타인은 수도 없이 전장에 나섰다.

그러다가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의 칼날은 황제에게 향하는 것이고.

‘하지만 내가 황제에게 납치 안 당했어도 여전히 아빠는 자유롭지 못해. 날 전쟁터에 보내지 않으려고 황제와 협상할 테니까.’

착한 왕은 결국, 나쁜 왕의 체스 말이 되어 무의미한 살육 전쟁을 치를 거다.

아빠는, 주인공은, 정복 전쟁 같은 제국의 횡포를 혐오하는 정의로운 사람이지만….

“있잖아, 아빠는 우리 공주님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그래, 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칼을 들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주인공이 행복하지 않으면 해피엔딩이 아니야, 리리스.”

“아빠는 공주 없이 절대 못 살아.”

‘딸’의 존재가 그저 원작 진행의 계기일 뿐이라고 여겼던 내 생각은 틀렸다.

황제의 꼭두각시로 산 것.

복수를 결심한 것.

결국 혁명에 성공한 것.

아빠의 모든 행동에는 ‘목표’가 있었고 그건 전부 나였다.

당연히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했던 원작은, 끝내 목표를 잃은 주인공에게만은 확실한 비극.

‘저, 정말 원작이 끝나고 나서 아빠는 나 따라 죽었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원작대로 평화로운 결말을 맞을 수 있도록 아빠를 돕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살아남아야 해. 바로 내가, 아빠 옆에 무사히. 무슨 일이 있어도.’

원작이 끝난 이후.

주인공, 에녹 루빈슈타인의 해피엔딩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아빠, 나도야.”

굳게 다짐하며 나는, 아빠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나도 아빠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 * *

최상위 계급, 도스(Dos).

그리고,

콰르토(Quarto).

셉티마(Septima).

옥타바(Octava).

누베노(Noveno).

끝으로 최하위인 디에즈(Dies)까지.

여섯 계급으로 분류되는 능력자들을 아우르는 존재가 있다.

바로,

프리메라(Primera).

프리메라의 존재는 곧 마법의 원천.

신에 가장 가까운 전능한 존재.

그렇기에 한 세대에 단 한 명씩만 태어났다.

제국 개국 이래.

황가인 파빌리온에서만 배출된,

‘황제’의 계급이었다.

* * *

“12황자 전하의 계급이 콰르토(Quarto)로 판명되었다 합니다.”

쨍―!

보좌관의 보고에, 황제는 쥐고 있던 유리잔을 깨트렸다.

붉은 피가 손을 엉망으로 어지럽혔다가 금세 흔적도 없이 아물었다.

“프리메라가 왜 나오질 않지?”

황제는 지금까지 14명의 자식을 보았으나, 아직 프리메라가 없었다.

차기 프리메라의 부재에 민심은 술렁이고 있었다.

“설마 영영 태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폐하께서는 아직 젊고 건강하시니 충분히 차기 프리메라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보좌관이 노한 황제를 달랬다.

옅은 금발과 녹빛 눈동자를 가진 미려한 외모의 황제, 니콜라스 폰 파빌리온.

그는 48세의 나이였으나 20대의 청년처럼 어려 보였다.

그것은 프리메라의 수명이 일반인의 두 배이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에녹 경이 돌아왔다지.”

“예.”

“순순히 귀환했다니 놀랍군.”

“기사단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딸이 제도에서 지내고 싶어 했다 합니다.”

“하하하하!”

황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우습군. 제 아비가 7년 전에 무슨 마음으로 저를 데리고 도망쳤는지도 모르고….”

철없는 딸의 부탁에 결국 제도로 돌아왔을 에녹의 모습이 그려졌다.

“뭐, 잘되었다. 그것이 내가 바란 바였으니.”

7년 전, 에녹이 탈영했을 때.

황제는 분노했다.

그의 부재는 크나큰 전력 손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강제로 복귀시킬 방법도 없었다. 에녹은 너무 강한 능력자였기에….

“참고 기다리는 자에겐 때가 오는 법이야. 그때 못 참고 에녹을 복종시켰다면, 아마 난 생명력이 다해 진작 무덤에 있었을 테지.”

황제가 낮게 웃었다.

프리메라는 다른 능력자들과 달리 마나가 아닌 생명력을 소모하는 존재들이었다.

능력자를 세뇌하여 복종하게도 할 수 있는 전능한 프리메라였지만, 그것은 꽤 큰 생명력을 요했다.

대상이 에녹 루빈슈타인처럼 강한 경우에는 더더욱.

하지만.

“7년 동안 내가 무슨 마음으로 기다렸는지 그가 알기나 하겠나?”

세뇌 없이도 에녹의 목줄을 쥘 방법은 있었다.

7년 전, 자취를 감췄던 에녹이 지키려던 것은 다름 아닌 딸.

황제는 딸이 곧 그의 약점이 되리란 것을 알았고 조용히 기다렸다.

에녹의 세상에 오로지 딸밖에 남지 않을 때까지.

그의 딸이, 그를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채찍이 될 때까지.

“에녹 경이 곧 내게 화려한 귀환 선물을 가져다주겠군.”

방 벽면을 가득 메운 지도.

제국은 대륙을 거의 집어삼켰다.

그럼에도 아직 흡수되지 않은 몇몇 나라는 정복왕 타이틀을 가진 황제, 니콜라스의 눈엣가시였다.

하지만 곧 대륙 위에는 제국의 이름만 남게 되리라.

에녹 루빈슈타인이 돌아왔으니 말이다.

* * *

이튿날 아침.

“어머, 어머, 어머. 너무 예뻐요, 아가씨.”

“가방은 뭘 메실래요? 뒤로 메는 곰돌이 가방? 옆으로 메는 토끼 가방?”

나는 하녀 언니들과 함께 분주한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은 토끼여!”

“꺄하하하! 아가씨 닮은 토끼!”

“좋아요, 토끼로 해요!”

“오늘은 뭐 하고 노실 거예요?”

“오전에는 수업 들어야 해요…. 수업 끝나구 간식 먹어도 돼요?”

“그럼요, 아가씨. 우유랑 초콜릿 맛 마카롱을 준비해 놓을게요.”

“그럼 지금은 공부방으로 가실 거죠? 준비물 챙겨 드릴게요.”

제티와 쥰이 수업 준비물을 챙겨주는 동안 나는 침대에 앉아 짧은 다리를 휙휙 굴렀다.

‘짧다….’

짧다. 더럽게 짧다.

안 큰다.

이대로 계속 더디게 자란다면, 내 정체는 동네방네 까발려지고 말 터였다.

‘빨리빨리 움직여야 해.’

계획대로 체시어부터 구해 낸 다음, 한시라도 빨리 능력자 양성소에 입소할 것.

능력자들은 전부 양성소에 가서 황제의 힘을 받아야만 능력을 쓸 수 있다.

능력자들의 심장에 있는 ‘코어’라는 것을, 오직 황제만이 열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얼른 코어를 열고 뭐든 능력을 써야만 했다.

능력을 써서 생명력을 소모해야만 남들과 비슷하게 자랄 수 있으니까.

‘그래야 내 정체를 숨길 수 있고….’

“그런데 그 얘기 들었어, 언니?”

“뭐?”

분주히 내 준비물을 챙기던 언니들의 목소리에 귀가 쫑긋 섰다.

“이번에도 꽝이라잖아. 12황자 전하의 계급이 콰르토래.”

“세상에. 정말? 이번에는 프리메라일 줄 알았는데?”

쥰이 말하자 제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이 황가를 버린 게 아니냐고 말들이 많아. 아직도 프리메라가 안 나오다니.”

“에이, 설마. 곧 나오시겠지.”

둘은 황실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관심 없는 척 발을 구르며 콧노래만 흥얼거렸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잖아. 지금까지 첫째나 둘째들이 항상 프리메라였다고.”

“하긴. 황자, 황녀 전하들이 그렇게나 많으신데 아직도 황태자가 없지.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랬나?”

한 세대에 한 명씩만 태어나는 절대권력의 능력자, 프리메라.

지금까지는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황가에서만 나왔다.

황제의 피를 이은 자식 중 프리메라만이 황태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 놈. 백날 애 낳아 봐라. 어디 프리메라가 나오나.’

황가에서, 이번 대의 프리메라는 나오지 않을 거다.

한 세대에 한 명씩만 태어나는 프리메라는 이미….

“설마 다른 가문에서 나와버린 건 아니겠지?”

…정답.

“풉. 말도 안 되는 소리.”

“후후….”

내 이마에서 삐질삐질 식은땀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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