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20/261)

“아가씨, 준비물 다 챙겼답니다.”

“보세요. 토끼 얼굴이 빵빵해졌죠?”

“우와아아!”

침대에서 내려가 후다닥 달려가자 제티가 토끼 가방을 내 어깨에 걸어 줬다.

“힝. 너무 귀여우셔. 공부방까지 안아서 모셔다드려도 돼요?”

“네! 좋아여!”

나는 쥰에게 안기며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완벽한 추리를 한 것치고 쥰은 별생각 없어 보였다.

하긴.

황가가 아닌 다른 가문에서 프리메라가 나온다는 건, 고래가 육지에서 걸어 다니는 것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나는 초조해할 필요 없이 그저 차근차근 내 계획을 밟아 가기만 하면 될 터였다.

오늘은….

더는 미룰 수 없는 체시어 구하기 대작전.

그 1단계를 수행해야 할 날이다.

“그런데 언니!”

“네, 아가씨!”

“약제실은 어디 있어요?”

“약제실이요?”

* * *

루빈슈타인 공작가 약제실.

“똑똑.”

젊은 주치의 플린 슐츠는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 번뜩 몸을 일으켰다.

“뭐, 뭐지?”

“똑또옥.”

침 자국을 닦고 두리번거리는데 문밖에서 앳된 목소리가 입으로 기척을 내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문을 열자, 양팔 가득 꽃을 들고 웃고 있는 웬 어린아이가 보였다.

귀여운 양 갈래 머리에 푸른 눈이 누가 봐도 이 집 딸.

곧바로 알아본 플린이 놀랐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호옥시 공녀님이 아니신가요? 며칠 전부터 공작저가 떠들썩하던데….”

“네, 맞아요! 만나서 반가워요, 플린! 제 이름은 리리스예요!”

“으아닛, 저를 아세요? 아직 인사도 못 드렸었는데요?”

“네! 언니들이 그러는데, 플린은 엄청 똑똑한 의사래요. 아플 때 플린한테 가면 싹 낫게 해 준댔어요.”

“후후, 그렇죠. 제가 좀 유능….”

실실 웃으며 코를 훔치던 플린이 펄쩍 놀라 뛰었다.

“설마 어디가 아파서 오셨나요?”

“으항항! 아니요. 그냥 플린이랑 인사하고 싶어서요. 이거는 선물이에요. 봄 냄새가 너무 이뻐서 정원에서 꺾어 왔어요.”

배시시 웃으며 꽃다발을 건네는 리리스를 보고 플린이 감격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뭐 이런 천사 같은 귀염둥이가….

“어흐흑. 고맙습니다, 공녀님. 안 그래도 약제실이 칙칙했는데 화병에 꽂아 두면 참 예쁘겠어요.”

꽃을 받고 화병을 찾는 플린의 뒤를 리리스가 병아리처럼 졸졸 따라왔다.

“그런데, 플린.”

“네, 공녀님.”

“요기에 요정의 눈물 있어요?”

“요정의 눈물이요? 아! 혹시 살바시온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네! 맞아요!”

“예, 여기 있지요. 필요하십니까?”

플린이 묻자 리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이다가 되물었다.

“그거 엄청 귀한 약이라는데 저도 가질 수 있어요?”

“아하. 그렇긴 합니다만….”

신비한 해독초의 일종. 살바시온은 매우 귀했고 쉬이 유통되지 않도록 황실이 독점하고 있었다.

황제가 허락한 소수의 가문에만 한 달에 한 번씩 하사품으로 내려오는 것이기도 했다.

정작 살바시온이 간절한 이들은 절대 손에 넣을 수 없지만, 황족들이나 몇몇 귀족은 그냥 자양강장제처럼 차로 끓여 마실 뿐이었으니….

“루빈슈타인 직계이시면 자격이 충분합니다. 공녀님께서는 당연히 가능하시고요.”

“아항, 글쿠나. 책에서 봤는데, 엄청 좋은 거라구 해서요. 저 좀 주시면 안 돼요? 아빠한테 차를 만들어 드리구 싶은데….”

“오, 이럴 수가. 세상에. 천사 같으셔라….”

이 작은 아이가 아빠한테 차를 끓여주고 싶어 하다니!

플린은 왜 며칠 전부터 하인들이 입을 모아 이 어린 아가씨를 찬양하는지 알 것 같았다.

“당연히 드려야지요. 여기 이름만 써 주시면 됩니다. 언제든 또 오세요.”

“우아! 감사합니다!”

리리스가 작은 손으로 약제실 기록부에 제 이름을 야무지게 써넣었다.

“리리… 스, 루빈… 슈타… 인.”

“크흡.”

삐뚤빼뚤한 글씨체마저도 사랑스러워서 플린은 전율하고 말았다.

* * *

‘준비 완료!’

나는 배가 빵빵해진 토끼 가방을 뿌듯하게 쓰다듬었다.

‘자, 이제 어떻게 몰래 밖에 나가느냐….’

일곱 살 연약한 어린이의 몸으로 외출하려면 보호자는 필수.

혼자 밖에 나갔다 와도 되냐고 하면 당장 뒷덜미를 잡혀 방 안에 갇히겠지.

그렇다면….

나를 밖으로 ‘몰래’ 데려가면서 호위도 해 줄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은 누가 있을까?

제티와 쥰 언니?

‘땡.’

내 전담 호위 아저씨?

‘땡.’

루빈슈타인 사병단의 에이스라는 루이스 씨?

‘땡.’

쿡.

마침, 누군가의 손가락이 내 뺨을 쿡 찔렀다.

“수업 다 끝났으면 놀자, 꼬맹이.”

레온이었다.

그리고 옆에는 테오까지.

수업이 끝나자마자 찾아온 쌍둥이를 보며 나는 씨익 웃었다.

‘딩동댕.’

바로, 오빠들이다!

“오늘은 뭐 하고 놀지? 거미 잡으러 안 갈래? 털 많은 거.”

“하아, 레온. 너 어머니 말씀 벌써 까먹었어? 여자애들은 거미 싫어한다니까?”

“꼬맹이는 좋아한다고 했거든?”

투닥거리는 모습이 아직 어린 열두 살들이지만….

‘지금 이 집에서 우리 아빠 다음으로 강한 분들이시지. 암.’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면 곤란하다.

쌍둥이는 능력자.

이미 능력자 양성소를 졸업하고 능력도 개방했다.

심지어 계급도 도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거로 덩치 큰 호위들을 벽에 처박을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인재들이란 말씀.

“놀 힘이 없어. 나 배고파….”

나는 침대에 돌아누웠다.

“배고파? 그럼 식당에 가자.”

“식당은 음식이 맛이 없쏘….”

테오가 다정하게 물었지만 나는 몸을 웅크리며 거절했다.

“그럼 어떡하지?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있긴 한데… 여기는 없어.”

“뭔데?”

“아빠랑 옛날 집에 살 때 먹었던 음식….”

“아하.”

등 뒤에서 쌍둥이가 침묵했다.

잠깐의 정적 후에 두런거리는 둘의 대화가 들려 왔다.

“평민들이 먹는 거겠지? 주방장한테 말하면 안 만들어 주려나?”

“너 바보냐? 평민들이 뭘 먹고 사는지 귀족가 주방장이 어떻게 알아?”

“그럼 어떡해? 아, 나가서 먹으면 되지 않나? 리리스, 우리 평민들이 다니는 음식점에 가 볼까?”

술술 풀리는군.

나는 돌아누우며 말을 보탰다.

“…어른들이 허락해 줄까?”

“흐음, 그러게. 평민들 식당 간다고 하면 엄마한테 등짝 맞을걸?”

“아, 그렇긴 하지….”

구슬리기 쉬운 레온과 달리 약간의 FM 성향이 있는 테오는 망설이는 눈치였다.

나는 고민하는 테오를 바라보며 입을 삐죽였다.

“오라버니, 리리스 배고파아….”

“아.”

결국, 테오는 조용히 해결책을 내놓았다.

“우리 그럼 몰래 나갔다 오자.”

* * *

나와 쌍둥이는 정원에서 거미 잡는 척을 조금 하다가 슬금슬금 뒷문 담벼락 쪽으로 이동했다.

밖에 나가는 거야 문제 될 일이 아니지만, 호위나 시종을 동행하지 않으려면 이 방법이 최선!

…이라는, 테오 대장님의 계획 때문이었다.

“끄응.”

“리리스, 괜찮아?”

“으응.”

나는 담벼락 아래 개구멍으로 작은 몸을 구겨 넣으며 신음했다.

“좀 크게 뚫지. 테오 멍청이.”

“안 돼. 너무 크게 뚫었다간 티 난다고.”

이미 담 너머에 서 있던 레온과 테오가 조잘거렸다.

물론 개구멍이 원래부터 있었던 건 아니고, 테오가 마법으로 조심조심 뚫어준 것이었다.

나는 담을 훌쩍 넘을 수 있는 둘과 달리 한없이 약한 아기 리리스니까….

“에헴. 리리스 성공.”

“에고, 흙이 다 묻었네.”

테오는 개구멍 밖으로 나와 손으로 브이를 그리며 뿌듯해하는 내 치마를 세심하게 털어줬다.

“다 됐다.”

“으항항! 고마워, 오라버니.”

“뭘. 그럼 이제 가 볼까?”

그때, 내 손을 잡고 걸음을 옮기려던 테오가 휘청거렸다.

“윽.”

그는 멈춰 서서 가만히 이마를 짚고 인상을 찌푸렸다.

어딘가 아파 보였다.

“모, 모야! 왜 그래? 오라버니, 어디 아파?”

“아아, 아니야. 괜찮아.”

“뭐야. 또냐?”

“…응.”

“괜히 나가서 일 치는 거 아냐? 넌 그냥 들어가서 쉬든가.”

“아니야. 정말 괜찮아. 이렇게 두통 있고 나서 한 닷새 정도… 뒤에 오니까.”

테오의 상태가 익숙한 듯 말을 주고받는 쌍둥이를 보며 나는 깨달았다.

‘맞다. 테오는 희귀병을 앓고 있지. 그럼, 닷새 뒤에 온다는 건 발작이겠구나.’

둘 다 죽을 예정인 원작 속 쌍둥이의 역할은 이랬다.

1. 체시어의 성장 계기.

2. 독자들의 눈물샘 자극.

그런고로, ‘다정다감한’ 테오는 애초부터 ‘선천성 희귀병’이 있다는 설정.

오랜 학대로 마음의 문을 닫은 체시어를 다정하게 힐링시켜주다가, 제 용도를 다하면 퇴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잔인한 작가 놈.’

원작에서 항상 병약한 미소년처럼 묘사되곤 했던 테오가 앓고 있는 병은 ‘마나 충돌’.

몸 안에서 성력과 마력이 주기적으로 충돌하며, 그때마다 발작을 일으키는 희귀병이었다.

그런 테오는 기사 서임을 받은 열여섯의 이듬해 봄에 죽고 만다.

그러니까 시한부다…….

“이만 갈까, 리리스? 표정이 왜 그래? 어디 다친 건 아니지?”

“어, 으응, 아냐.”

아니라고 하는데도 요리조리 내 상태를 살피는 다정한 테오를 보니 우울해졌다.

‘어흐흑. 오빠, 제발. 다정하다는 설정값 나한테 쓰지 말아줘….’

정을 안 붙이려야 안 붙일 수가 없으면서도 죽을 예정인 등장인물이라니.

착잡해진 나는 테오의 손을 꼭 잡고 쫄랑쫄랑 따르며 원작 한 귀퉁이를 떠올렸다.

「체시어 루빈슈타인은 성녀의 심장을 테오 앙트라세의 무덤 앞에 바치며 오열했다.

“늦었어. 미안해, 형…. 나는, 나는 형한테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네. 내가 바보 같아서…. 내가….”

이미 한참은 늦어버린 헌화였다.

살아생전 안겨주었다면 지금쯤 테오 앙트라세는 여전히 자신의 옆에서 웃고 있었을 텐데.」

불치병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마나 충돌을 상쇄할 방법이 고대서 한 권에 실려 있긴 했다.

성녀의 심장이라나, 뭐라나.

물론 그것은 은유적인 표현이라 정확한 정체는 아무도 몰랐다.

‘결국 체시어는 그게 뭔지 찾아냈지만.’

테오의 사후, 체시어는 부질없는 짓임을 알면서도 미친 듯 고대서의 해석에 집착했고….

끝내 성녀의 심장을 찾아 테오의 무덤에 바쳤다.

“에휴우.”

한숨을 쉬던 나는 멈칫했다.

……?

아니, 잠깐.

나 바보 아냐?

“…나는 그거 뭔지 알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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