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3/261)

“…….”

미심쩍어하던 리코가 천천히 손을 뻗어 꾸러미의 입구를 살짝 헤쳐 열었다.

곧바로 안에 든 푸른색 가루가 보였다.

신기하게도 자체 발광하는 묘한 생김새의 그것은….

살바시온.

요정의 눈물이라고도 불리는 만능 해독약이다.

“뭡니까.”

곧바로 알아본 리코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이거 필요하시죠!”

원작에서는, 몇 년 후에나 리코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울 아빠가 주는 것으로….

바로, 불쌍한 리코의 여동생을 낫게 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

긴장감이 맴돌았다.

리코가 날 선 웃음을 터뜨렸다.

“남의 뒤를 밟아만 봤지, 내 뒤가 밟힌 건 또 처음이군.”

“…….”

“무슨 의도지? 공작은 내 뒤를 어찌 캔 거고? 대답해.”

“아, 아빠는 아무것도 모른다니까 그러시네….”

180도 달라진 리코의 태도에 나는 덜컥 겁이 났다.

곧 침묵하던 그가 옷 안에서 뭔가 꺼냈다.

단도였다.

“히이익!”

나는 잽싸게 소파 구석으로 몸을 웅크렸다.

“마, 말로 하시져! 말로! 그, 체시어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부, 부탁 안 들어주셔도 됩니다요….”

“…….”

그러나 리코는 생각과 달리 끼고 있던 장갑을 벗더니 단도로 자기 손바닥 위에 길게 상처를 냈다.

그리고는 살바시온을 한 움큼 손에 쥐었다.

“헉.”

흘러내린 진득한 피 위로 푸른 가루가 달라붙는 순간.

놀랍게도 순식간에 상처가 아물었다.

리코가 뻣뻣하게 굳었다.

‘아하. 내가 혹시 가짜라도 가져왔을까 봐 알아보려던 거구나.’

의심 많기는.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 가져요. 다 리코 꺼야….”

“…….”

“흠흠. 그럼 저는 이만.”

“이게 뭔지 알고 빼돌린 겁니까.”

“네?”

“빌어먹을 황실 놈들이 독점하고 있는 겁니다. 억만금이 있어도 구할 수 없죠. 당신 가문은 특혜로 하사받을 테지만, 함부로 외부에 유출했다간 문책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뭐, 다 아는 얘기다.

나는 놀란 척 말했다.

“헉. 정말요? 그럼 리코 씨가 안 들키게 조심히 써 주시면 되죠, 뭐.”

“…….”

“그, 그럼 저는 진짜 이만.”

“기다리십시오.”

그때 리코가, 갑자기 손을 들어 가면을 벗었다.

‘……?’

회색 머리에 잿빛 눈.

입술 왼쪽에 세로로 가로질러 난 작은 흉터.

마치 색을 잃은 듯한 신비로운 외모의 앳된 소년이 자기 얼굴을 드러냈을 때 나는 화들짝 놀랐다.

“자, 잠깐만여!”

나는 쬐만한 손바닥으로 황급히 두 눈을 가리고 허둥거렸다.

“어, 얼굴까지 보여주실 필요는 없는데!”

귀족들의 구린 비밀을 파헤치고 다니는 리코는 제 신상을 철저히 숨겨야 했다.

하도 적이 많아 얼굴이라도 알려지면 칼 맞는 건 시간문제일 터.

원작에서도 리코는 아빠를 안 지 5년은 더 넘었을 때… 그러니까 아빠를 완전히 신뢰하게 되었을 때야 자기 얼굴을 내보였다.

그런데 첫 만남에, 그것도 아무리 봐도 수상한 꼬맹이에게 얼굴을 보여준다니?

“저를 보십시오.”

“아, 아니. 저기요? 저, 저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생각인 건 아니시겠죠?”

이렇듯 쉽게 얼굴을 공개했다면 그럴 가능성도 있는데.

나는 이를 딱딱 부딪치며 조심히 눈을 가렸던 손을 내렸다.

다행히도 그는 온화해 보였다.

‘음, 역시 비중 있는 캐릭터라 그런지 잘생겼군.’

순간 한가롭게 그런 생각이나 하던 나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저는 거래할 때 철칙을 어기는 법이 없습니다. 받은 것에 상응하는 대가를 드려야겠지요.”

리코는 벗은 가면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오늘 당신이, 제게 구매하신 겁니다.”

…얼굴을 내게 보인 것.

자신의 ‘약점’이었다.

* * *

리코는 해독약을 먹고 비로소 몇 년 만에 편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여동생의 머리를 넘겨주었다.

“해독약 한 번으로는 부족하시죠? 또 필요하실 텐데…. 에헴, 저만 믿으시라구여! 우린 친구니까!”

작은 손으로 제 가슴을 탕탕 치며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아이….

리코가 피식 웃었다.

“너답지 않아, 리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얼굴을 보여주다니?”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리코가 돌아보았다.

<리코 식당>의 붉은 머리 종업원이자 길드 <붉은 매>의 정보원, 마리나였다.

“루빈슈타인 공작저에 들어가 있는 우리 애들, 누구였지?”

“…J 자매들.”

“오닉스 후작과 사생아의 정보, 에녹 루빈슈타인에게 전달시켜.”

“리코! 너 진심이야?”

“어.”

일어난 리코가 마리나를 지나쳐 반지하 창의 가림막을 젖혔다.

“살바시온이 내게 얼마나 간절했는지 너도 알잖아.”

“알아. 알지만 경계해야지. 네가 누군지, 네 동생 애니가 어떤 상태인지 다 알고 있는 사람이야. 딸을 보낸 치밀함까지. 공작에겐 분명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

“글쎄. 공작이 딸을 제 목숨처럼 아낀다는 사실이야,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나. 한데 이곳에 혼자 보냈다?”

“…….”

“그럴 리가 없지. 그 애 말은 사실일 확률이 커. 정말 혼자 찾아온 거야. 공작은 전혀 모르는 일이다.”

“대체 일곱 살짜리가 어떻게?”

“그건 나도 모르지. 말을 안 하려 하니. 하지만 그 아이에게 무슨 비밀이 있든, 어떤 꿍꿍이가 있든 그건 내게 중요하지 않아.”

리코가 마리나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그 꼬마 아가씨가 악마라고 해도 나는 기꺼이 영혼을 팔았을 거야. 얼굴 정도라면 싸게 먹힌 셈이지.”

“네가 간절한 것도 알아, 리코. 내 말은, 그러니까, 굳이 그 애가 요구한 적도 없는 네 약점을 왜 쥐여줬냐는 거지.”

“그 애의 부탁을 떠올려 봐. 단지 오닉스 후작의 비밀을 제 아버지에게 전하는 것뿐이었다. 그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어. 한데 굳이 나를 찾아온 이유.”

“…….”

“딱 하나야. 나한테… 약을 주고 싶었던 거지.”

분명, 맞는 말이었다. 말문이 막힌 마리나는 입술을 물었다.

리코는 다시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한번 믿어보려고.”

리코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정보 길드를 운영하며 귀족들의 약점을 수집하는 이유.

그것은, 이 썩어빠진 시궁창에 빛을 드리워줄 이가 나타난다면….

힘을 보태주고 싶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타난 건지도 모르겠거든.”

그가 간절히 기다리던, 영웅이.

* * *

‘리코를 찾은 건 정말 잘한 것 같아.’

나는 여느 일곱 살처럼 도화지 위에 삐뚤빼뚤한 그림을 그리며 생각했다.

“저는, 제도의 모든 귀족 가문에 저희 길드 첩자를 심어놓았습니다. 오닉스 후작가의 길드원에게 연락해 둘 테니, 소통하며 일을 진행하시죠.”

리코는 거래 이후 A/S까지 완벽하게 해 주더라.

그는 수월하게 체시어를 구할 수 있도록 방안까지 제시해 줬다.

바로 오닉스 후작가에 심어놓은 길드원이, 나를 도와주기로 한 것.

“근데요, 리코. 오닉스 후작 아저씨 집에는 어찌어찌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가서 리코의 길드원이 누군지는 어떻게 알아봐요?”

“음, 알아보는 법이라…. 그건 뭐, 집으로 돌아가 계시면 루빈슈타인 공작저에 심어둔 저희 길드원을 통해 아가씨에게 연락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뭐, 뭐라구여? 우리 집에도 스파이가 있다구여?”

“…? 아니,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제가 제도에 온 지 고작 나흘 된 아가씨의 사정을 어찌 다 알고 있었을까요?”

“헐.”

나는 리코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역시 무서운 사람….

아무튼, 리코와 한배를 탔으니 나는 우리 가문에 숨어 있다는 길드원과 한시라도 빨리 만나야 했다.

‘아마 사용인 중에 있겠지? 리코와 계속 연락하려면 내 전담으로 삼는 게 편할 텐데.’

나는 도화지 위에 크레파스를 마구 끼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에휴, 제티 언니랑 쥰 언니랑… 벌써 많이 친해졌는데.’

아쉽지만 리코의 길드원을 찾아내면, 전담 하녀를 바꿔 달라고 해야 할 터였다.

“어머, 우리 아가씨는 그림도 너어무 잘 그리시네.”

마침 제티가, 침대 위에 엎드려 있던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이건 해파리네요? 우리 아가씨 해파리도 보신 적 있으신가?”

“이거 울 아빤데….”

“헉? 그, 그, 그런가요? 아아! 다시 보니 너무 공작님이시다! 너무!”

당황한 제티가 멋쩍게 웃었다.

그때, 쥰이 반대편으로 와 크레파스를 잡았다.

“후후, 아가씨. 저도 그림 그려 봐도 될까요?”

“넹.”

쥰은 신난 표정으로 뭔가 그리기 시작했다.

‘사람이네.’

허리까지 오는 갈색 머리카락에 메이드복을 차려입은….

‘하녀?’

샐쭉 올라간 눈꼬리와 입가의 점까지, 제법 특징을 잘 살려 그린 그림이었다.

“우와, 언니 그림 완전 잘 그린다. 누구예요?”

“제 친구예요. 이름은 리첼.”

“제 친구이기도 하죠. 리첼도 하녀 일을 하고 있어요.”

말을 받은 제티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오닉스 후작가에서요.”

“……!”

순간 나는 놀라 땡 굳었다.

‘…뭐, 뭐라고? 뜬금없이 친구? 그것도 오닉스 후작가에서 일하는?’

나는 찬찬히 쥰의 그림을 다시 살폈다.

오닉스 후작가에서 일하는 갈색 머리에 입가에 점이 있는 하녀.

지금 이 시점에서, 이것이 말하는 바는 분명했다.

오닉스 후작가에 있다는 리코의 길드원이 바로 그녀인 것이다.

‘와….’

나는 입을 떡 벌리고 제티와 쥰을 한 번씩 바라봤다.

그녀들은 천진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어, 언니들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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