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4/261)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방법으로 보내온 신호.

우리 집에 심어둔 리코의 길드원들은, 다름 아닌 내 두 전담 하녀였던 것이다.

5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기어코 내 전담이 된 것도, 정보 수집을 위해서였겠지.

‘소오름.’

나는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어, 언니, 언니들….”

그리고 능청스러운 얼굴의 둘을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둘은 환하게 웃었다.

“그럼요, 아가씨!”

“물론이죠!”

* * *

이튿날.

에녹은 누군가 익명으로 제게 보내온 제보 한 통을 받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애가… 오닉스 후작의 사생아였다고?’

제도에 도착한 날 우연히 마주친, 귀족에게 괴롭힘당하고 있던 평민 사내아이.

리리스의 부탁으로 사람을 풀어 찾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 날아든 익명의 제보에는 놀랍게도 그 아이의 얘기가 적혀 있었다.

‘L이라.’

제보자를 유추할 만한 단서는 L이라는 이니셜이 전부.

바라는 것도, 요구하는 것도 없이 그저 아이가 처한 상황만을 고스란히 전달해 왔을 뿐이었다.

오닉스 후작의 사생아로서 현재 그의 저택에 감금되다시피 하여 학대당하고 있다는….

‘L.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를 구하고 싶은 의도는 분명해.’

평판에 예민한 제도 귀족 중에는 사생아를 수치로 여겨 몰래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아이도, 지금은 어찌어찌 목숨만은 부지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빨리 구해야 한다.’

사생아를 살려둔 귀족의 변덕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를 일이었다.

“젠장. 그런데 왜 하필 오닉스야?”

에녹은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오닉스 후작과는 개인적인 친분이 없었다. 7년 전 제도에 있을 때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이.

심지어 오닉스는 제도에서 꽤 힘과 이름이 있는 귀족이었기에….

아무리 에녹이라고 해도, 뜬금없이 후작의 집에 쳐들어가 아이를 숨겨 학대하고 있느냐 묻고 따질 명분이 없었다.

‘무작정 찾아갈 수도 없는데.’

주변 눈을 신경 써야 하는 건 에녹 자신도 마찬가지.

복귀한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대놓고 소란을 피울 순 없었다.

최대한 빨리,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후작저에 방문할 방법이 없을까?

“대체 어떻게….”

“아빠아아!”

“어어어, 공주!”

때마침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제보 편지를 재빨리 숨긴 에녹이 리리스를 맞았다.

“울 딸, 수업 끝났어?”

“응응!”

에녹은 곰돌이 가방을 메고 달려온 리리스를 무릎 위에 앉히고 다정하게 머리를 넘겨주었다.

“공주 오늘 뭐 배웠어?”

“나 오늘 예술 수업 첨 들었는데 넘 재미있었어. 선생님이 유명한 조각가들이랑 미술품도 알려줬다?”

“그랬어?”

“응응, 아빠 이거 알아?”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리리스가 가방 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펼쳤다.

“린델이라는 조각가가 만든 미술품인데 엄청엄청 유명하대. 제목이 <천국의 문>인데 너무 이뻐.”

“오.”

청동으로 문을 만들고 그 위에 아기 천사들의 모습을 조각한 미술품이었다.

“나 이거 실제로 보구 싶은데 안 되겠지?”

“왜 안 돼? 이거 어디 있는데? 유명 미술품이면 신전 미술관에 있을걸? 아빠가 데려가 줄게.”

“아니, 거기 없어. 선생님한테 물어봤는데 이거 오닉스 후작? 그 아저씨가 샀대. 그래서 그 집에 있다고 하더라구?”

“뭐? 오닉스?”

에녹의 눈이 커졌다.

“천사 너무 이뿌다…. 실제로 보구 싶넹….”

“볼 수 있어!”

“깜짝아! 진짜?”

“어! 볼 수 있어, 공주!”

에녹이 환하게 웃으며 리리스를 안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자연스럽게 후작의 집에 방문할 명분이 필요했는데….

“아빠가 그 아저씨한테 연락해 볼게. 보러 가자.”

“와, 진짜? 아빠 최고!”

고민을 해치워 속 시원한 표정의 에녹에게 안겨, 리리스는 몰래 씨익 웃었다.

* * *

오닉스 후작가.

루빈슈타인 공작의 방문 소식에 아침부터 모두가 분주한 날이었다.

물론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후작가의 지하 2층 밥버러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오늘은 빨리 먹어! 이 방, 냄새나서 오래 있기 싫으니까!”

딱딱한 빵 한 귀퉁이와 물이 담긴 쟁반을 던져 주며 하녀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리고는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기 싫다는 듯 문가로 도망쳤다.

‘어디에 둔 거지.’

깜빡이던 등잔 기름이 전부 닳아 엊그제부터 앞이 보이지 않았다.

체시어는 어둠 속에서 바닥을 한참 더듬대다 겨우 빵을 찾았다.

“그나저나 오늘, 우리도 공작 볼 수 있는 거야?”

“그렇겠지? 아, 루빈슈타인 가문에서 일하는 계집애들 부럽다. 공작 눈에 잘만 들면 인생 피는 거 아니니?”

“별…. 공작이 미쳤다고 하녀랑 붙어먹겠어?”

“저 밥버러지 어미도 우리 주인님을 꾀었다잖아. 아주 가능성 없는 일은 아니지.”

하녀 둘은 멀찍이 떨어져서 두런거리다가 어둠 속에 묻힌 체시어 쪽을 보며 깔깔거렸다.

그들 손에만 들린 등잔의 빛은 미약해서, 방은 거의 암흑이었다.

“저기… 등잔 기름 좀 넣어줄 수 있을까. 앞이 하나도 안 보여.”

“저게 지금 뭐라는 거야? 기름이 얼마나 비싼 줄 모르니?”

“네 방 등잔 기름 갈아주겠다고 하면 조나단 도련님이 참 좋아하시겠다. 우리 매질 당해, 이 멍청아.”

“빨리 처먹기나 해. 우린 얼른 가 봐야 해. 곧 공작님이 오실 거란 말이야.”

그놈의 공작, 공작, 공작….

어제도 찾아와 체시어를 때리던 이복형, 조나단의 기분이 좋았던 것도 그 공작 때문이었다.

“내일 루빈슈타인 공작이 오기로 했어. 이 버러지야, 넌 루빈슈타인이 어떤 가문인지도 모르지?”

“…….”

“이번에 난 꼭 공작에게 잘 보일 거야. 잘하면 나중에 그 집 딸과 결혼할 수도 있겠지.”

황제 다음가는 권력자라던가?

어차피 체시어는 평생 얼굴 한번 볼 일 없을 이였다.

“공작과 가까워지면 아버지도 더는 널 살려두지 않을걸. 네놈의 존재가 알려지기라도 하면 망신이니까.”

아, 그러면 드디어 나는 죽게 되는 거구나.

막상 처분이 코앞에 다가오니 겁이 났지만,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며 계속 바라왔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래, 곧 죽을 건데 빛이 무슨 필요야.’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에 파묻혀 체시어는 생각했다.

그때.

“너희 왜 이렇게 늦장을 부려? 오늘 루빈슈타인 공작님 오시는 거 몰라?”

방 안에 다른 목소리가 찾아왔다.

“아, 리첼. 미안해. 쟁반 가져가야 하는데….”

“내가 챙길게. 먼저 나가 있어.”

“어머, 고마워.”

“고마워. 빨리 와.”

뚜벅뚜벅.

등잔 하나를 들고 다가온 다른 하녀의 얼굴이 보였다.

리첼….

이 집에서 체시어의 존재를 알고 있는 네 명의 하녀 중 하나였다.

그녀는 다정하진 않았지만, 음식을 던지거나 욕을 하지 않았다.

그저 식사가 끝날 때까지 아무 말 없이 곁을 지켜줄 뿐.

한 번도 대화해본 적은 없지만, 체시어는 리첼이 자길 불쌍하게 여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기.”

쟁반을 가지러 다가온 리첼에게 체시어는 처음으로 말을 붙였다.

“혹시 등잔 좀, 갈아줄 수 있을까.”

“…….”

의미 없는 부탁임을 알면서도, 당장 다가온 죽음이 두려워 꺼내 본 말이었다.

죽기 전에 누구 하나라도….

누군가의 온기 한 점이라도 있었다고 기억하고 싶어서….

“등은 필요 없어요.”

하지만 리첼은 쟁반을 챙겨 일어나며 냉정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돌아서 나가버렸다.

“어차피 오늘, 도련님의 세상은 밝아질 테니까요.”

이해하지 못할 말을 남겨두고서.

쾅.

철그럭.

여느 때와 같이 문이 잠겼다.

체시어의 세상은 암흑이 되었다.

‘내 세상이 밝아진다고?’

우스운 말이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차가운 바닥을 더듬거리며 기어가 한쪽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그리고 버릇처럼, 품 안에 넣어두었던 것을 꺼내 손에 쥐었다.

일주일 전.

자신을 퍽 안쓰럽게 바라보던 여자아이가 건넨, 토끼가 그려진 분홍 손수건.

그때 왜 이걸 챙겼는지 체시어는 이제 알 것 같았다.

온기.

그저 높으신 귀족 나리들의 한낱 동정인 줄 알면서도, 그 알량한 온기에 목말라 있기 때문이었다.

항상 ‘죽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이 작은 아이는 매번 살아남으려 했고 누군가가 곁에 있길 바랐다.

차라리 같이 죽자며 매일 자신의 목을 조르던 어머니의 옆에 꾸역꾸역 남아있었던 것도….

결국 어머니로부터 버려져, 이 집에서 이렇게 짐승처럼 버티고 있는 것도….

다, 전부 다….

빌어먹을, ‘살고 싶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도 더는 널 살려두지 않을걸.”

그래서일까.

체시어는 정말로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이 순간.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눈이 시큰해졌다. 아무리 아파도 울어본 적 없는데, 오늘은 눈물이 났다.

“나….”

딱 한 점 허락된 온기.

체시어는 그 손수건 한 장을 꽉 쥐고 흐느꼈다.

그는 사실 죽고 싶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살고 싶어….”

살고 싶었다.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