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5/261)

* * *

“안녕하세요, 후작님! 여기 정말 <천국의 문> 있어요?”

“그렇소, 공녀. 린델 뵈르의 걸작이지. 아직 어린 나이에 미술에 이리 조예가 깊다니 대단하군.”

후작 부인과 아들, 시종까지 거느리고 대문 앞까지 직접 마중을 나온 오닉스 후작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내 손을 잡은 아빠가 말했다.

“갑작스러운 부탁이었을 텐데 흔쾌히 초대해 줘 고맙군. 딸이 그 작품을 너무 보고 싶어 해서.”

“아닙니다, 공. 공의 연락을 받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소소하게 미술품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는데 그것으로 공과 연이 닿게 되니….”

아빠의 인사에 후작의 입꼬리는 귀에 걸렸다.

‘울 아빠랑 연줄 챙길 기회인데 좋기도 하시겠지.’

7년 만의 복귀.

제도 귀족 모두가 주목하는 최고의 실세.

아직 이렇다 할 정치적 행보도 없는 에녹 루빈슈타인을 선점하고 싶은 귀족들이 줄을 서 있을 테니까.

“이쪽은 제 아내와 아들 조나단입니다. 인사들 드리지.”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각하.”

“처음 뵙겠습니다, 루빈슈타인 공작 각하. 조나단 오닉스입니다.”

한껏 꾸민 후작 부인이 먼저 인사했고 아들, 조나단도 예의 바른 웃음과 함께 허리를 숙였다.

‘너구나? 조나단 오닉스가.’

그는 후작과도, 체시어와도 닮아 있었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

남주와 피가 섞여 있어 그런지 겉모습만은 참 번지르르했다.

‘완전 재수탱이지만.’

나중에 아빠의 양자가 되어 승승장구하는 체시어가 아니꼬웠는지 사교 파티장에서 험한 말로 조롱하던 원작 속 조나단이 떠올랐다.

대체 지나가는 엑스트라 1이 겁도 없이 왜 남주에게 시비를 거는 걸까? 궁금했는데.

그 뒤에 이어진 체시어의 과거 회상에서 둘의 관계가 나오더라.

배다른 형.

그 형에게 매일 두들겨 맞았던 과거까지 말이다.

“그리고 귀여운 공녀님도 반갑습니다. 혹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별관의 미술품들을 공녀님께 소개해드려도 될까요?”

조나단이 싱그러운 웃음과 함께 내게 손을 내밀었다.

‘으휴, 이 나쁜 놈의 X끼.’

“네, 감사합니다!”

나는 머릿속 말풍선과 실제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을 혼동하지 않게 조심하면서 조나단의 손을 잡았다.

수줍어하는 내 표정에 후작 내외와 조나단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딸애가, 영식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아빠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허. 그거 아니야, 아빠….

“하하, 영광입니다.”

“둘이 너무 잘 어울리는걸요.”

이때다 싶었는지 호호, 웃으며 후작 부인이 끼어들자 아빠의 얼굴이 굳었다.

“어머니, 부끄럽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왜. 공녀에게 잘 대해 드리렴.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텐데. 사람 일이 나중에 어찌 될지도 모르는 거잖니?”

“허허, 이 사람이 참.”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셋은 나와 아빠를 앞에 두고 북도 치고 장구도 치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서 더 얘기를 나누시지요.”

후작이 웃으며 집 안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나는 눈치껏 잡고 있던 조나단의 손에 힘을 주며 중얼거렸다.

“천국의 문이요. 빨리….”

“아, 공녀님이 빨리 보고 싶으신 모양이네요. 저와 먼저 전시실로 가시겠어요?”

“그래, 조나단. 그게 좋겠구나. 여기 감상을 도울 이들도 교육해 놨으니 함께 가거라.”

드디어!

마치 그림 속 배경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용인 네 명에게 시선이 쏠렸다.

“저 인사할래요!”

나는 웃으며 후다닥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집사 한 명과 하녀 셋.

제일 왼편에 있던 남자 집사의 손을 덥석 잡자 조나단이 당황했다.

“고, 공녀님? 아랫것들에게 그렇게까지 인사하실 필요는….”

그러자 후작 내외가 눈치껏 조나단을 말리는 게 보였다.

일평생 평민으로 살아온지라 아직 사람 가리는 법이 없는 아기 리리스의 행동에는 전혀 위화감이 없을 거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아, 예. 공녀님.”

손을 한 번씩 꼭 잡아주었더니 집사와 하녀들은 얼떨떨해했다.

그리고….

맨 끝에 서 있던 하녀.

허리까지 풀어 내린 갈색 머리에 눈꼬리가 올라간, 입가에 점이 있는 얼굴.

‘이 사람이 바로 리코의 길드원, 리첼이야.’

처음 봤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가까이 갈 타이밍을 재고 있었을 뿐.

리코를 통해 미리 연락을 받았다면 분명 그녀가 이 시점에서 내게 어떤 신호를 보내올 거다.

“천국의 문 보러 왔어요. 잘 부탁드려요, 언니!”

“네, 공녀님.”

리첼은 눈을 접어 웃으며 내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역시.’

그 찰나에 내 손에는 무언가가 은밀하게 쥐어졌다.

차가운 쇠의 감촉과 바스락거리는 작은 종이 한 장.

무엇인지는 대충 감이 왔다.

체시어를 가둬둔 방의 열쇠.

그리고 쪽지에는….

‘방 위치 정도가 적혀 있으려나.’

우리는 서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시선을 나누며 웃었다.

* * *

에녹 루빈슈타인.

딸을 데리고 종적을 감췄던 그의 귀환 소식에 귀족 사회는 술렁거렸다.

그가 사라졌던 동안에도 루빈슈타인의 세는 여전했고 귀환한 지금은 황제의 총애를 전부 독점하게 될 거다.

제도 귀족들은, 당연한 말이지만 너 나 할 것 없이 에녹에게 줄을 댈 궁리를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무려 그 에녹 루빈슈타인이 먼저 연락을 해왔다.

‘아버지 말씀대로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야. 이번에 어떻게든 공작에게 잘 보여야만 해.’

조나단은 다짐했다.

2급 콰르토인 아버지와 달리 조나단은 4급 옥타바에 불과했다.

신분보다 계급으로 더 대우받는 현실. 인맥이나 연줄을 쌓아 입지라도 다져 놓지 않으면….

작위를 물려받는다고 해도 귀족 사회에서 무시당할 제 미래를 잘 알고 있었다.

“꺄하하하!! 이건 모지?”

그리고, 에녹 루빈슈타인이 끔찍이 아낀다는 딸.

“여긴 어디지? 여기 가면 모 있어여? 집 진짜 크다! 우와아!”

지금부터 안면을 터놓고 잘해주면서 나중에 혼약으로 묶일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신기하다아아!!”

…빌어먹을.

귀에서 피가 나는 것 같았다.

조나단은 몰래 귓가를 훔치며 하하 웃었다.

“공녀님? 그러니까 이 작품은 말입니다. 린델과 동시대에 수많은 걸작을 남겼던 베르단….”

“꺄하하하!!”

빠직, 조나단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일곱 살이라고 해서 말은 통할 줄 알았더니 과연 어린애는 어린애였다.

별채에 들어오자마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며 로비와 계단을 갈고 다니질 않나, 전시실 미술품들을 함부로 만지질 않나.

정작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천국의 문>을 보여 줬더니 별 감흥도 없어 보였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아랫것들을 물리지 말 걸 그랬군.’

아버지는 조나단이 못 미덥다며 작품 설명을 대신 해 줄 시종들을 붙여줬지만….

에녹과 그의 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기에, 자신 있게 그들을 물린 참이었다.

‘작품 감상이 아니라 육아를 해야 하는 줄, 내가 알았겠냐고!’

속으로 비명을 지르던 조나단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니야. 참자, 참아. 이 꼬맹이가 내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

후아, 심호흡하며 마음을 다스린 조나단이 눈을 뜨고 방긋 웃었다.

“공녀님, 그럼 다음 전시실로 가 보실….”

…어라. 없다?

눈 한 번 감았다 뜬 순간, 2층 전시실 안을 돌아다니고 있던 작은 꼬맹이가 사라져 있었다.

활짝 열린 문을 보니 그새 다른 곳으로 샌 모양.

“아오, 씨. 콩만 한 게 말 더럽게 안 듣네, 진짜.”

이를 꽉 문 조나단이 부들부들 떨며 리리스를 찾으러 나섰다.

* * *

별채 3층 전시실 복도의 막다른 끝에 쪽문이 있습니다.

그 문은 지하로 향하는 비밀 통로 입구입니다.

조나단 오닉스를 따돌리고 나온 나는, 황급히 리첼이 준 쪽지를 따라 움직였다.

아이는 지하 2층, 맨 끝 방에 있습니다.

“허억. 에고, 힘들어라….”

나는 짧은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아이의 존재를 아는 사용인은 넷뿐이며 전시실 출입은 엄금.

내부에는 호위가 배치되어 있지 않으니 탈출이 수월할 것입니다.

사용인들에게도 체시어의 존재를 철저히 숨기는 모양이라, 별채에는 개미 한 마리 없었다.

내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허억, 허억. 숨 차….”

어느새 도착한 2층 지하.

음습한 복도마다 주홍색 등이 걸려 있었다.

‘정말 이런 곳에 가둬두면 찾을 수가 없겠구나. 아빠 혼자 왔으면 힘들었을 거야.’

생각하면서, 나는 능청스럽게 작은 기척을 냈다.

“와아아아! 방 많다!”

이 문을 열면 체시어가 있을 거다.

너무 뛰어서인지, 곧 체시어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인지.

나는 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을 붙잡고 지체 없이 자물쇠 구멍에 열쇠를 꽂았다.

철그럭,

문이 열렸다.

“…….”

방 안은 암흑.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 누군가가 파묻혀있었다.

나는 문을 활짝 열었다.

문을 최대한 젖혀야 겨우 빛이 드는 방에서, 죽은 듯 누워있던 아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

그리고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

얼굴 가득한 폭행의 흔적.

피멍이 든 오른쪽 눈은 퉁퉁 부어 제대로 뜨지도 못했고, 입술 위에는 피딱지가 굳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일 만큼 처참한 모습…….

‘말도 안 돼.’

“어어…. 나, 어.”

“…….”

“내가….”

“…….”

“내, 내가. 내가 빨리….”

…빨리 올걸.

내가 나빴다.

바보 같았어.

그냥 아빠한테, 처음 만난 그날 무작정 여길 찾아오자고 할걸.

너한테는 1분 1초가 지옥이었을 텐데.

나에게는 마냥 행복했던 제도에서의 일주일이, 체시어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하루하루였을 것이다.

“아….”

반사적으로 뚝뚝, 눈물이 흘렀다.

나는 이를 꽉 물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매로 거칠게 닦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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