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문이 열린 순간,
서서히 눈꺼풀을 열자 밝아지는 시야.
체시어의 앞에 나타난 것은.
나쁜 하녀들도, 무서운 이복형도, 이제 자신을 죽이러 올 것만 같았던 아버지도 아니었다.
희미한 불빛이 누군가의 작은 몸 뒤로 후광처럼 드리웠다.
‘…천, 사?’
체시어는 불현듯, 몇 번 스치며 보았던 <천국의 문>을 떠올렸다.
천국으로 향하는 문을 지키는, 아기 천사들이 조각된 미술품.
그것을 볼 때마다 체시어는 기도하곤 했었다.
신이 있다면, 부디 작은 천사를 보내 주세요. 나를, 이 지옥에서 데려가 주세요― 라고.
“아.”
체시어는 잠시 멍해 있던 정신을 붙잡았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은실 같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는 분명 천사 같았지만, 아니었다.
‘그때 그 애잖아.’
손수건의 주인.
그 여자아이였다.
‘이 애가 여길 어떻게 온 거지? 그리고 대체… 왜 우는 거야?’
아이는 대뜸 후두둑 눈물을 흘리더니 작은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 울음을 삼켜냈다.
“…체시어.”
어떻게 알았는지, 이윽고 다가온 아이가 제 이름을 불렀다.
“데리러 왔어.”
“…뭐?”
“내가 미안해….”
체시어는 멍하니 아이를 응시했다.
대체 여길 어떻게 알고 데리러 왔다는 걸까. 그리고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나가자.”
아이는 손을 내밀었다.
마치 구원처럼 내민 손을 차마 잡지 못하고, 체시어는 망설였다.
아이는 천사가 아니다.
자신을 지옥에서 꺼내줄 수는 없을 거다.
“누구야, 너.”
“리리스.”
“난, 네 이름을 묻는 게 아니라.”
“무사히 나간 다음에 말할게. 일단 여기서 나가자. 응?”
아이…, 리리스는, 그 순간에도 계속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나 한 번만 믿어 줘….”
믿을 수 있을까?
네가 천사가 아니라면?
천국을 염원하던 내게, 천국으로 데려가 주겠다고. 그냥 한순간의 장난처럼, 동정처럼 말한다면?
그러나 아이는, 달콤한 말 대신.
“어차피 어디든, 이 지옥보단 나을 거야.”
그렇게 말했다.
‘…맞아.’
마냥 달콤하지 않은 말에 오히려 경계심은 녹아내렸다.
‘천국이 아니더라도 괜찮아. 이 지옥보단 나을 테니까.’
체시어는 그렇게 홀린 듯, 천사의 손을 잡았다.
* * *
…이리 쉽게 손을 잡아줄 줄은 몰랐는데.
나는 멍하니 체시어와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네가 잡으라며.”
“어어, 응!!”
다행이야. 너무 좋아. 나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킁, 코를 삼키며 한 번 더 물었다.
“같이 가는 거지?”
“…….”
“히히.”
나는 순순히 따라오는 체시어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원작에서는 읽은 적 없던 그의 어린 시절을 보고 있는 지금.
‘진짜, 너무 다행이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금이나마 빨리, 이 아이를 지옥에서 건져줄 수 있어서.
“늦게 와서 진짜진짜 미안해….”
체시어는 묘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이제 아무도 너 못 때리게 할 거야. 싹 다 부지깽이로 혼내 줄게.”
“…네가 어떻게. 나보다 훨씬 작으면서.”
“나 말고 울 아빠가!”
너에게도 주인공 에녹 루빈슈타인의 비호를! 세계관 최강자에게 보호받는 맛을 보여주지!
“본관 응접실까지 달리자. 울 아빠 거기 있거든.”
우리는 부지런히 달렸다. 왔던 길을 되짚어 나가다 보니 계단이 나왔다.
“그런데, 체시어. 있자나. 허억, 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지하, 2층이거든? 밖에 나가려면….”
헉헉. 벌써부터 숨을 헐떡이는 나를 보며 체시어가 말했다.
“3층까지 올라가야 해.”
“…허억. 알고 있구나? 가자!”
내려올 땐 잘 몰랐지만, 지하 2층에서 지상 3층까지 올라가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짧은 다리로 한 계단씩 올라야 해서 더더욱.
나는 그럼에도 체시어를 격려했다.
“체시어! 쫌만 더 힘을 내! 얼른 가야…!”
…없네?
계단 밑을 돌아보며 당황하다가 위를 보니, 진작 열 계단은 앞서간 체시어가 보였다.
“허억, 글쿠나, 내가 구멍이구나.”
나는 다시 열심히 계단을 올랐다.
일곱 살보다도 한참 발육이 덜 된 아기 몸. 체감상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는 기분이었다.
“흐아아, 리리스 살려.”
고지가 눈앞.
쪽문을 열고 기다리는 체시어가 보였다.
‘이제부터는 내리막길뿐이야!’
그런데 왜인지 체시어가 멈춰서 움직이지 않았다.
“왜, 헉. 왜 그래? 누구 있어?”
“…아니. 그런데 여기서부턴 하인들이 있어.”
“아, 그거? 괜찮아! 걸려도 상관없어. 잡히지만 않으면 돼!”
나는 웃으며 경쟁하듯 체시어를 앞질렀다.
“얼른 오라구!”
“…….”
뒤따르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열쇠는 별채 로비 복도 두 번째 창틀에 놓아두시면 수거하겠습니다.
‘저기다!’
1층 로비. 리첼과의 약속대로 열쇠를 숨겨두려는데.
“헐.”
…높았다. 창문이.
까치발을 들어도 닿지 않아서 순간 당황하는데, 누군가 내 손에서 열쇠를 낚아챘다.
체시어였다.
“창틀에 두려는 거야?”
“응, 맞아!”
나이스. 우리는 손발이 잘 맞았다.
무사히 열쇠를 숨긴 체시어는 다시 로비를 가로질렀다.
그때.
“아니,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아무래도 밖으로 나가신 것….”
입구 쪽에서 사람들 목소리가 들려 왔다.
체시어가 우뚝 멈췄다.
우리 기척을 느꼈는지 사용인들에게 신경질을 내고 있던 조나단이 돌아보았다.
“……!”
그의 눈이 빠질 듯 커다래졌다.
“뭐, 저, 저 새끼가 왜….”
“엇, 안녕하세여! 저 요기 밑에서 친구 찾았어여!”
나는 해맑게 말하며 체시어를 끌고 조나단의 앞으로 달려갔다.
그는 사색이 된 채 벌벌 떨었다.
“너, 너, 너 이 씨… 바, 바, 방으로 얼른 아, 안 돌아가?”
“우리 숨바꼭질할 거예요! 달려!”
나는 눈치껏 체시어를 밀었다. 그가 입구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저, 저 새끼 잡아!”
“예, 예? 저게 누구….”
체시어의 존재를 몰랐던 하인들은 당황했지만, 이윽고 그를 잡으려고 뒤쫓기 시작했다.
나도 그 틈에 섞여 마구 뛰었다.
“고, 공녀님! 공녀님은 거기 서요!”
“어억!”
역시 내 입부터 막을 생각인지 조나단이 대뜸 뒷덜미를 붙잡았다.
“수, 숨 막혀.”
“죄송합니다. 그, 그런데… 잠시만요. 잠시만. 저랑 얘기를 좀….”
뒷덜미를 놔주자마자 나는 다시 도망치려 했지만.
“악!”
콰당―!
아예 날 밀어버린 조나단 때문에 보기 좋게 엎어지고 말았다.
‘아우, 진짜 나쁜 놈…. 아기한테 너무하잖아!’
턱을 찧은 채 아파하고 있는데 체시어가 보였다.
입구만 벗어나면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나 때문에!
“머, 먼저 가!”
나는 적장에게 붙잡힌 장수처럼 손을 뻗고 외쳤다.
어차피 나는 잡혀도 아무 상관이 없다. 체시어의 존재만 아빠의 눈에 띄게 하면 될 뿐.
‘제발 가! 원작에서 가차 없이 내 목을 쳤던 그 냉정함으로 나를 두고 가란 말이야!’
그러나 내 바람과 달리 체시어는 도망쳤던 길을 거슬러 달려오기 시작했다.
‘아, 저 바보!’
하인들이 체시어를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는 쉽게 따돌리고 금세 내 앞까지 다가왔다.
‘어라? 뭐 저렇게 빠르지?’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의 민첩함이었다.
“너… 너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나와? 당장 네 방으로 돌아가지 못해?”
가까이 다가온 체시어에게 조나단이 소리쳤다.
그는 화를 못 참겠는지 씩씩거리다가 기어코 주먹을 휘둘렀다.
“안 돼! 내 친구 때리지 마! 이 나쁜 놈아!”
하지만 체시어는 고개만 쓱, 쉽게 틀어 간단히 주먹을 피했다.
그리고는 넘어진 내게 손을 뻗었다.
“바보야! 먼저 가라니까!”
어차피 나를 데리고는 도망칠 수가 없는데―
“……?”
―라고 생각했지만.
“뭐, 뭐지?”
체시어의 손이 닿은 순간.
어느새 나는 활짝 열린 별채의 문 밖으로 나와 있었다.
뒤따르던 이들과의 거리도 한참 멀어져 있었다.
‘뭐야, 얘 순간이동도 해?’
당황한 나처럼,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우리 둘 때문에 허둥거리던 조나단이 빽 소리쳤다.
“자, 잡아! 잡으라고!”
“…달리자.”
체시어는 영문을 모르는 내 손을 잡고 정원을 가로질렀다.
‘이게 무슨? 아, 헐! 맞다! 순간이동이 아니라….’
나는 달리며 깨달았다.
두 주인공에게 능력치를 몰빵해 줬던 원작.
체시어의 5번 설정에 따르면….
체시어 루빈슈타인(주인공)
5. 주먹이 느리게 보임
놀랍게도 이 사기 캐릭터는 시간의 밀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상대의 움직임이 슬로모션처럼 보인단 말씀.
약간의 위화감까지 들었던 체시어의 민첩함이 이제야 이해되었다.
‘이거, 이거….’
나는 히죽 웃었다.
‘아빠에 체시어까지, 양쪽에 사기캐를 끼고 말아먹을 수가 있나?!’
나는 새삼 자신감이 충만해져서 짧은 다리에 더 속도를 붙였다.
“꺄하하하! 다 비켜!”
내가 할 일은 다 끝났다.
남은 것은… 약간의 깽판뿐.
* * *
그 시각.
에녹은 호화롭게 꾸민 응접실에 오닉스 후작 내외와 마주 앉아 있었다.
“…그때 참 말들이 많았습니다. 공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무지한 이들이 입방아도 많이 찧었었고.”
“그랬나.”
예상했던 대로 후작은 줄이라도 대고 싶은 모양인지 입에 발린 말들만 줄줄 늘어놓았다.
“하지만 자식 가진 부모들은 다 알 겁니다. 공이 7년 전에 어떤 마음으로 공녀를 데리고 사라졌던 것인지요.”
“아, 그래. 알아줘서 고맙군.”
건성으로 대답하며 에녹은 바짝 정신을 집중했다.
마나를 모아 감각을 곤두세워보았지만, 그때 그 아이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기척이 전혀 감지되지 않을 정도라니. 거리가 먼 별채에 있거나, 그도 아니면 설마… 이미 잘못되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에녹은 초조한 마음으로 다시금, 아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공허한 눈빛이었지만 잘 벼린 검처럼 날카로운 구석이 있던 아이.
꼭 리리스의 부탁이 아니었더라도 다시 찾고 싶었을 만큼 묘한 끌림이 있었다.
“한데 자식은 아까 본 영식이 다인가?”
에녹이 묻자, 순간 후작 내외의 얼굴이 굳었다.
찰나의 변화였지만 에녹의 눈을 피해 갈 순 없었다.
“예, 그렇습니다. 저희 가문이 원체 손이 귀해서요.”
“그런가.”
뻔한 반응에 더 볼 것도 없어진 에녹이 몸을 일으켰다.
별채 쪽으로 거리를 좁혀 아이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나도 전시실을 좀 구경해 볼 수 있겠지?”
“예, 그럼요.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자식 얘기에 괜히 찔린 후작은 표정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방을 나서려던 그때였다.
“아빠아아아!!”
문밖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리리스?’
우당탕, 쿵쾅.
달려오는 작은 걸음.
“기, 기, 기다리십시오! 공녀님, 제발! 멈춰!”
뒤따르는 조나단의 한껏 당황한 듯한 고함까지.
“이게 무슨….”
때아닌 소란에 후작 내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에녹도 당황했다.
그리고 벌컥,
응접실 문이 열린 순간.
“네, 네가 여길 어떻게…!”
사색이 된 후작 내외의 얼굴 너머 리리스가 보였다.
“아빠!”
얼굴 가득 천진한 웃음을 머금은 리리스.
그 옆에는.
“이 애 기억나?!”
일주일 전 만났던, 그때 그 아이.
“후작님이 얘도 초대했나바!”
오닉스 후작의 사생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