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7/261)

에녹은 이 황당한 상황을 파악하느라 잠시 멍해 있었다.

전시실을 구경하고 있었을 리리스가, 별안간 오늘의 목적이었던 후작의 사생아를 찾아왔다.

‘철저히 숨겨 키운다더니… 일곱 살짜리 애한테 들켰다고?’

자신이 나설 필요도 없게 된 상황.

황당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일은 수월해졌다.

“헤헤, 아빠아아!”

저마다 충격으로 고요함이 내려앉은 응접실.

참사의 주범인 리리스는 천진한 얼굴로 에녹에게 달려왔다.

“후작님 집 엄청 크다? 방도 진짜 많아. 돌아다니다가 얘 만났어!”

“그래?”

에녹은 천천히 체시어를 살폈다.

심하게 부은 오른쪽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아이는, 바짝 경계하고 있었다.

잘 먹지도 못했는지 몸은 전에 봤을 때보다 더 말랐고, 최근에 폭행당한 듯 입술은 터져 있었다.

‘빌어먹을….’

에녹은 어금니를 꽉 물며 겨우 분노를 삼켰다.

“어디서, 만났어?”

“지하실에 있는 방! 그런데 후작님이 지하실은 청소 안 하나 봐. 얘 방은 막 어둡구 냄새나구 쥐도 있구… 으으. 그랬어.”

“아, 그래.”

후작 내외는 차마 입도 떼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했다.

아무것도 모를 어린 리리스가 쏟아내는 말이 꼭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후작이 겨우 입술을 뗐지만,

“저, 공….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 아이는….”

“닮았군.”

날이 선 에녹의 목소리에 금세 다물고 말았다.

이내 픽 웃은 에녹이 무릎을 굽혀 체시어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는 아주 찬찬히….

아이의 얼굴을 뜯어보다,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많이 닮았어. 후작과.”

지하실에서 짐승처럼 갇혀 길러지고 있던 아이.

발뺌하기 힘들 정도로 후작과 닮은 얼굴.

사생아를 수치스러워하는 사회 통념상, 아이는 누가 봐도 후작이 숨기고 있던 제 핏줄이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상황.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이를 학대한 죄를 물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후작이 두려워하는 것은, 아이의 존재가 세상밖에 알려지면 타격을 입을 제 이미지. 그뿐이었다.

그리고 에녹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후작.”

이윽고 에녹이 몸을 일으켰다.

“단둘이 얘기 좀 하지.”

* * *

아빠는 아이들끼리만 있었으면 좋겠다며 눈치껏 체시어를 이 집 악마들과 분리한 뒤 후작과 이야기를 하러 갔다.

‘뒤처리는 아빠가 알아서 잘 해 주겠지?’

나는 아빠를 기다리면서 갖고 있던 튜브형 연고 뚜껑을 열었다.

‘리첼이 연고는 왜 줬나 했더니.’

연고는, 리첼이 준 돌돌 말린 쪽지 안에 들어있었다.

검지 위에 연고를 짜고 고개를 드니 옆에 있던 체시어가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었다.

“고개 숙여 봐. 너 입술 터졌어.”

“…괜찮아. 별로 안 아파.”

“이미 짰는걸?”

“…….”

체시어는 침묵했다.

긍정이겠지? 조심조심 손을 가져가자 체시어는 다행히 거부하지 않았다.

“아까 나 안 버리구 데리고 가 줘서 고마워….”

“…….”

“근데 너 피할 수 있으면서 지금까지 때리는 거 왜 맞았어?”

“…….”

“나랑 말하기 싫어?”

“피하면.”

“응?”

“피하면 뭐가 달라져? 화만 더 돋우는데. 그렇다고 도망쳐 봤자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서 굶어 죽기 싫으면 집 안에서 맞으면서 버텨야지.”

체시어는 내 질문이 우습다는 듯 조소하며 중얼거렸다.

“아….”

그건 그렇지.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체시어는 고작 열한 살. 게다가 신분도 없는 상태.

이 적폐 제국에서 보호자 없이 살아남기는 당연히 힘들 터였다.

“그치. 미안해. 내가 너무 바보 같은 말 했다.”

나는 마냥 팔자 좋은 질문을 했던 걸 사과하고 계속 체시어의 입술 위에 연고를 발랐다.

“네 아버지가 루빈슈타인 공작이었어?”

“응? 맞아. 알아?”

“조나단이 말하는 걸 들었어. 곧 우리 아버지랑 친해질 거라던데.”

“머래. 꿈도 크시네. 울 아빠가 미쳤다구 애기 때리는 아저씨랑 친해지겠어?”

나는 연고 뚜껑을 닫고 말했다.

“울 아빤 오늘 내가 여기에 있는 미술품 보고 싶대서 델구 와 준 거야. 그리고 내가 오늘 여기 온 건 미술품 때문이 아니라….”

“…….”

“너 때문이구.”

“…….”

“널 구하러 왔어. 친구가 너 여기 있는 거 알려줬거든. 리첼이라고, 알아?”

묻자, 체시어는 잠시 놀라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물었다.

“그런데 날 왜 찾으려 했는데? 너 나 알아?”

“모야. 너 나 몰라? 우리 저번에 만났잖아. 다 기억하면서 모르는 척하기야?”

“…….”

“있지, 체시어…. 나는 그때부터 계속 너를 생각했어. 다시 만나고 싶어서.”

“…왜?”

“으음,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누가 마음에 들 수 있잖아. 나, 너 좋아.”

체시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곧 말했다.

“이해했어.”

“뭘?”

“네 장난감을 하면 되는 거지? 그럼 네 집에서 밥도 주고 잠도 재워주는 거 맞아?”

“…머?”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봤더니 체시어는 제 말이 틀렸냐는 듯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무, 무슨 말이 그래? 사람이 어뜨케 장난감…. 나는 너랑 친구 할 거야!”

…그리고 아빠가 호적에 올려 줄 테니 나중에는 남매가 되겠지?

뒷말은 삼켰다. 체시어는 의아해했다.

“너 공작 딸이라며. 너랑 내가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는데?”

“할 수 있어.”

“…….”

“싫어?”

“아니.”

체시어는 내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그냥 어린 귀족 여자애가 또래에게 잠시 보이는 흥미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에휴, 역시 마음이 꾹 닫혀있네. 사나운 길냥이 같다….’

표정만 봐도 체시어는 철벽 중의 철벽이었다. 귀족인 아빠와 나에 대한 편견도 여전해 보였다.

‘뭐, 어쩔 수 없지. 이건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야.’

잘 대해 주면, 체시어도 곧 알게 될 거다.

세상에는 자기 아버지랑 형 같은 나쁜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리리스.”

“어, 아빠!”

후작과 이야기를 마쳤는지 아빠가 방으로 들어왔다.

아빠는 가까이 와서 말없이 체시어의 상태를 살피고는 한숨과 함께 웃으며 말했다.

“이제 집에 가자.”

* * *

“사생아인가 보군. 내 눈에 띄었으니 아이의 처분은 뻔하겠고.”

숨겨왔던 사생아의 존재가 외부에 드러났다.

어떻게든 소문을 막으려 할 테니, 아이는 분명히 가까운 시일 내에 처리될 것이다.

“한데 봤겠지만, 내 딸이… 애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러니 내가 데려가는 것으로 할까.”

“예, 예? 아니, 공….”

“뭐, 재수 없게 나한테 걸렸지만 그나마 후작에겐 다행일 거야. 난 딱히 남의 추문을 들추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 관심도 없고.”

“…….”

“되도록 조용히 일을 처리하고 싶다면 내 제안이 나쁘지는 않을 텐데.”

체시어를 제 딸의 놀이 상대로 삼겠다는 에녹의 제안을, 후작은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괜히 뜻을 거슬렀다 에녹 같은 이와 척지기도 싫었고….

이미 사생아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니, 자신을 협박할 명분도 충분했으니까.

“저, 그러면….”

후작은 한참 고민하다 말했다.

“공녀가 그 애에게 질린다든가, 쓸모가 없어진다면…. 부디 허튼 말이 새어나가지 않게 아이는 잘 처리해 주십시오.”

“…….”

“우리 같은 귀족에게 평판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공께서도 잘 아실 테니….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역겹네.

하마터면 에녹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뻔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 핏줄을 죽여 달라는 말을 어찌 그리 스스럼없이 하는지.

“…그렇게 하지.”

후작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분노하던 에녹은, 이내 맞은편에 앉은 두 아이를 보며 표정을 풀었다.

“이것도 먹어.”

“…….”

“이것도!”

접시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 체시어는 며칠은 굶은 짐승처럼 정신없이 음식을 입에 넣었다.

그 옆에서 리리스는 부지런히 제 접시의 음식을 옮겨주고 있었다.

‘저렇게 잘 먹는 아이를 도대체 얼마나 굶긴 거지.’

후작가에서 나와 뭘 하고 싶냐 물었더니 체시어는 바로 답했다.

“배가 고파요.”

―라고.

멀리 갈 것도 없이 식당 하나를 찾아 들어온 길이었다.

“천천히 먹어. 체하겠다.”

“…….”

리리스가 내민 물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체시어가 이내 그것을 받아 마셨다.

아이는 경계가 심했지만, 옆에서 이것저것 챙겨주는 손길에 점차 적응하는 것 같았다.

에녹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공주도 얼른 먹어.”

“응, 나도 먹구 있어. 자, 여기. 이것도 먹어 봐.”

리리스가 작은 소시지를 포크에 푹 찍어 건넸더니 이번에는 그냥 입을 열어 받아먹었다.

“히히.”

“…….”

리리스는 체시어가 무척 마음에 드는지 방싯방싯 웃었다.

‘다행이네.’

생각하며, 에녹은 안도했다.

곧 능력자 양성소에 입소해야 할 리리스를 걱정했는데, 체시어와 같이 보내면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이 엄마는 비능력자랬지.’

능력자와 비능력자의 혼혈이라면 체시어의 계급은 아마 최하위인 6급 디에즈….

아니면, 높아 봐야 그 위 단계인 5급 누베노쯤 될 터였다.

‘뭐, 낮더라도 계급만 생긴다면 훨씬 인간다운 대접은 받을 테니.’

나중에 체시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든, 어디를 가고 싶어 하든.

계급이 전부인 이 나라에서 그나마 인간 취급이라도 받으려면 능력자 배지는 필수였다.

“체시어라고 했지?”

에녹이 묻자, 체시어가 물끄러미 고개를 들었다.

경계하는 눈이 날카로웠다.

“음. 다 먹고 나서는 뭘 할래?”

“…….”

“아저씨 집이 크고 좋긴 한데…. 방도 많고 말이야.”

“…….”

“말하기 싫으냐?”

“…아뇨.”

경계가 심한 체시어에게 무작정 같이 가자고 할 수 없어 말을 고르고 골랐더니, 아이는 무슨 생각인지 망설이는 눈치였다.

‘가고 싶은 데가 있나. 혹시 엄마? 엄마도 애를 버렸다던데….’

에녹은 고민하며 이마를 문지르다가 물었다.

“엄마 어디 있는지 알아?”

“…….”

음, 이게 아닌가.

엄마가 보고 싶었던 건 아닌지 체시어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저씨.”

“어어.”

곧 체시어가 들고 있던 식기를 내려두고 입을 열었다.

“저 엄마 없어요.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아요.”

“어, 그르냐.”

“저기….”

입술을 물며 한참 말하기를 망설이던 체시어가, 결심한 듯 눈을 똑바로 뜨고 입을 열었다.

“아저씨 딸 하인, 시켜주시면 잘해 볼게요. 아저씨 딸 때문에 저 데리고 나오신 거잖아요. 얘가 시키는 거 다 할게요. 놀아 달라면 놀아 주고 심부름시키면 하고 그럴게요. 그러니까 저….”

얘가 지금 뭐라는 거지?

멍하니 입을 벌린 에녹을 빤히 쳐다보며 체시어가 덧붙였다.

“…밥 주고 재워만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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