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8/261)

“아니, 얘야? 그게 무슨…. 아저씨는 그런 이유로 너를 데리고 나온 게 아니고….”

“에휴.”

에녹이 황당해하며 어물거리는데, 리리스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렇게 해.”

“리리스?”

“내가 친구 하자고 계속 말했는데 싫다 그러잖아. 그럼 어쩔 수 없지, 모. 하인은 됐구, 아까 말했던 장난감 해.”

“응, 알겠어.”

리리스가 선심 쓰듯 어깨를 톡톡 치며 말하자 체시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공주, 너 그게 무슨 말이야? 사람한테 장난감이라니?”

“아주아주 귀찮고 힘든 일을 시킬 건데, 다 할 거지? 넌 장난감이니까?”

제 말을 무시하고 악당처럼 웃는 딸애의 얼굴을 보며 에녹은 입을 떡 벌렸다.

“응. 밥 주고 재워만 주면.”

“좋아. 집에 가자마자 엄청난 걸 시킬 건데 괜찮겠어?”

“응. 시켜.”

“공주야!”

“아주 무시무시한 해파리를 그릴 거거든.”

“해파리?”

“응. 너 나랑 해파리 그림 열 장 그리기 전까지는 자면 안 돼. 할 수 있겠어?”

“그래, 알겠어.”

체시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끼어들려던 에녹은 삐끗했다.

‘아니, 애가 갑자기 뭔 말을 하나 했더니?’

아마도 리리스는 이유 모를 호의를 경계하는 체시어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래서 체시어가 부담스러워하지 않도록 말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거 하나도 남기지 말구 싹 먹어. 알겠어?”

“알았어.”

만족했는지 리리스가 배싯, 하고 몰래 입술을 씰룩였다.

‘…미치겠네, 진짜. 누구 딸인지.’

에녹은 딸애의 얼굴을 보며 하, 웃고 말았다.

* * *

우리가 ‘살금살금’ 집에 돌아왔을 때.

내 방에는 예상치 못했던 방문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레온과 테오였다.

“얜 누구야?”

레온은 체시어의 손을 꼭 잡은 나를 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오라버니들, 인사해. 체시어라구 해.”

“체시어?”

“어어, 왕자님들.”

아빠가 끼어들었다.

“오늘부터 여기서 지낼 리리스 친구야. 이름은 체시어.”

“네? 여기서 지낸다고요? 어느 가문인데요?”

테오의 질문에 아빠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어, 음. 평민이야. 일단은.”

“…….”

“…….”

레온과 테오는 동시에 놀라면서 체시어를 쳐다봤다.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체시어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삼촌이 이따가… 할아버지한테 리리스 친구가 왔다고 말하고 올 거거든. 그러니까 그때까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조용히 놀고 있어야 해. 그럴 수 있지?”

남의 집 사생아를 주워 왔다고 하면, 할아버지는 뒷목을 잡고 쓰러지실 거다.

할아버지의 혈압이 걱정됐는지 먼저 허튼 말을 하지 못하도록 당부하자 쌍둥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 꼬맹이.”

“응?”

레온은 왜인지 꼭 잡은 나와 체시어의 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너 오늘 나갔다 오면 나랑 거미 잡기로 했잖아.”

“아, 그랬나? 어어!”

그러더니 갑자기 체시어를 잡고 있던 내 손을 불쑥 빼서 끌어당겼다.

“나가자.”

“응. 체시어도 같이 갈까?”

“…….”

내 말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침묵하는 레온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왜, 왜? 다 같이 잡으면 안 돼?”

“너랑 나랑 우리 둘이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치만… 체시어도 있으니까 같이 가야지.”

“…….”

내 손을 잡은 레온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이상하다? 레온이 왜 이러지?’

나는 어리둥절했다.

거듭 말하지만, 원작 속 쌍둥이와 체시어는 무척이나 막역했다.

테오는 체시어에게 누구보다 다정했고 레온은 틱틱거리면서도 항상 체시어를 챙겨 줬다.

체시어의 출신을 다 알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딱히 내가 나서지 않아도 애들끼리 자연스럽게 친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적대적이람?’

나는 체시어를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는 레온의 표정을 살피며 의아해했다.

얼어붙은 분위기에 테오가 끼어들었다.

“우리도 인사할까? 체시어라고 했지? 나는 테오 앙트라세야. 열두….”

체시어에게 다가가며 악수하려던 테오가 멈칫했다.

킁킁. 그러더니 코끝을 꿈틀댔다.

“왜 구래, 오라버니?”

“아니. 아니야.”

내가 묻자, 테오가 어색하게 웃었다.

곧 레온이 툭 내뱉었다.

“냄새나. 쟤한테서.”

“으응?”

난 몰랐는데? 킁킁, 냄새를 맡아 보니 과연. 퀴퀴한 지하실 냄새가 어렴풋이 체시어에게 묻어 있었다.

모인 시선이 민망한지 낯을 붉힌 체시어가 눈을 내리깔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어이쿠, 그래. 체시어는 삼촌이랑 씻으러 가야겠다. 리리스랑 먼저 놀고 있어라, 얘들아.”

아빠가 재빨리 끼어들어 체시어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

나는 곧바로 레온에게 물었다.

“오라버니, 체시어한테 왜 그래?”

“뭐가.”

“자꾸 노려보구 무섭게 말하잖아. 그리고 냄새난다고 대놓고 말하면 어떡해?”

“냄새가 나니까 난다고 한 거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민망하지!”

“…….”

“설마 체시어가 평민이라구 해서 그런 건 아니지?”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그냥 냄새가 나니까 난다고 말한 건데.”

“어어, 그만.”

우리 둘 사이로 끼어든 테오가 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맞아, 리리스. 그거랑은 상관없어. 레온은 원래 아무한테나 말을 이렇게 해.”

“그거 나쁜 버릇인데…. 체시어한테 그러지 마.”

말하자, 레온이 눈썹을 꿈틀대다 빽 소리쳤다.

“야!”

“머….”

“너 지금 걔 편드냐?”

“몬 소리야? 편을 들다니?”

“미술품 보러 간다고 나가더니 뜬금없이 무슨 친구를 데려온 건데? 쟤 정말 여기서 사는 거야?”

“응. 체시어 갈 데가 없어….”

“하.”

“오라버니는 모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냐구. 말을 해야 알지. 자, 말해 봐.”

“…….”

“오라버니?”

“몰라!”

레온은 씩씩거리며 소리치더니 이내 쿵쾅쿵쾅 발소리를 내며 방을 나가 버렸다.

나는 놀라 눈만 깜빡였다.

‘왜 저러는 거야, 대체….’

* * *

“자, 씻어볼까?”

욕탕이 준비되자마자 에녹은 제 옷을 훌렁훌렁 벗었다.

아랫도리에 수건만 두른 채 나신으로 뿌듯하게 자길 내려다보는 에녹에, 체시어는 황당했다.

설마 같이 씻자는 건가?

“혼자 씻을 수 있는데요.”

“구석구석 닦기 힘들걸. 아저씨가 등도 밀어주마.”

믿기지가 않았다.

자기 몸도 제 손으로 씻는 일이 없을 귀하신 귀족 나리께서, 냄새나는 평민 나부랭이를 손수 씻겨주시겠다니.

“싫으냐?”

“…….”

그러나 체시어는 진심으로 섭섭해하는 에녹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밥도 주고 재워도 준다는데 어찌하겠나. 결국,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에녹이 씩 웃었다.

“자, 만세!”

체시어의 낡고 더러운 옷을 벗긴 순간 에녹은 멈칫했다.

울긋불긋한 멍이 마른 몸을 전부 뒤덮고 있었다.

“…….”

“…….”

한참 침묵하던 에녹은 씁쓸하게 웃으며 체시어를 욕탕 안으로 이끌었다.

“캬, 이게 얼마 만이야. 울 딸은 같이 씻자고 하면 아주 질색해서 말이야. 아직 쬐끄만데 다 컸다고 일 년 전부터는 혼자 씻었다니까.”

“…그 전에는 같이 씻으셨고요?”

“그랬지?”

…이상하다. 체시어는 이 부녀에게 어딘가 특이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제 몸을 씻겨주는 제법 능숙한 손길을 의아해하며, 체시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저씨.”

“엉.”

“아버지가 저 죽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뭐?”

당황한 에녹이 보이자 체시어가 조소했다.

“알아요. 저 아저씨 딸 때문에 지금은 살아있는 거잖아요. 귀족들 눈에 잘 보여서 떵떵거리고 사는 평민들 많이 봤어요.”

“…….”

“뭐, 질리면 쫓겨나고 죽고 그랬지만요.”

덤덤하게 말하는 체시어를 보며 에녹은 한숨을 삼켰다.

“아저씨,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뭔데?”

“아저씨 딸이 저한테 질리면, 저 죽이지 마시고 잠시 하인으로라도 써 주시면 안 될까요.”

“…….”

“염치없지만 봉급도 조금만 주시고요. 밖에서 일을 구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바로 나가서, 남들 눈에 안 띄고 조용히 살아볼게요.”

체시어는 마치 준비해 놓은 사람처럼 막힘없이 말했다.

여태껏 이런 말을 하려고 준비한 모양이었다. 열한 살짜리가.

“체시어.”

“예.”

“어린이들은 일하지 않아도 된다.”

“…….”

“나는 너를 돈 주고 부려먹으려고 데려온 것도 아니고 울 딸 비위 맞추라고 할 생각도 없어. 네가 따로 갈 곳이 있었다면 보내줬을 거야.”

체시어는 물끄러미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저한테 왜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데요?”

“음, 꼭 네가 아니었더라도 모른 척 지나치진 않았을걸. 나도, 울 딸도.”

“…….”

“그래도 정 네 마음이 불편하고 내가 의심스럽다면. 아저씨도 부탁 하나 할까.”

에녹은 고민하는 척 입술을 모으다가 말했다.

“울 딸 능력자라서 곧 양성소에 가야 하거든. 혼자 보내기가 걱정됐는데, 네가 같이 가 주면 아저씨 마음이 놓일 것 같다.”

체시어는 놀랐다.

자신도 능력자이긴 했으나, 양성소에 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저는 신분이 없어서 못 가는데요.”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네 후견인이 되어주마. 그럼 입소할 수 있거든.”

“예?”

체시어의 표정 없던 얼굴에 놀란 빛이 스쳤다.

말이 부탁이지, 오히려 체시어에게는 고마운 일이었다.

능력자 배지만 받는다면 언젠가 이 집을 나가게 되더라도 충분히 사람답게 살 수 있으니까.

‘왜지?’

높은 신분의, 그것도 귀족 위의 귀족이라고 불린다는 대단한 사람이 베푸는 지나친 호의….

‘그 애 때문이겠지. 아버지에게 사랑받는구나.’

체시어는 조금 울적한 기분이 되어 말했다.

“…감사합니다.”

“뭘.”

에녹이 거품 묻은 체시어의 머리로 장난쳤다. 양쪽 머리 위로 뿔이 솟았다.

“짜식.”

에녹이 피식 웃었다.

“이래도 잘생겼네.”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