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래서, 남의 집 사생아를 들여 키우겠다고?”
노르딕이 물었다. 날이 바짝 선 목소리였다.
작게 헛기침하며 부친의 눈치를 보던 에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안 거두면 아이 생사를 장담할 수가 없잖습니까. 일단은 제가 임시로 후견인이 되어주고, 아이 거취는 천천히 생각해보려고요.”
“알아서 해라. 나가 봐.”
노르딕이 순순히 답하자 에녹의 눈이 커졌다.
“…끝?”
“그럼 또 뭐가 필요한 게냐?”
“아니, 7년 동안 잠적해서 속 썩이다가 돌아오자마자 아버지 뒷목 잡으실 말이나 하는데 이렇게 쉽게 허락해 주십니까?”
“그래도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객관화는 잘 되는 것 같아 다행이구나.”
“크흠.”
노르딕이 사각이던 펜을 놓고 턱을 괴며 에녹을 바라보았다.
‘한결같은 놈.’
아들, 에녹은 언제나 그랬듯 귀족답지 않은 행동을 하곤 했다.
같은 귀족인데도 한쪽은 평판을 위해 제 핏줄을 죽이려 하고 다른 한쪽은 그 아이를 가여워해 거두겠단다. 숱한 구설에 오르내릴 것이 뻔함에도….
“애초에 내게 허락을 구하러 올 일도 아니지. 나야 이미 한참 전에 네게 이 가문을 물려주었으니 말이다.”
“에이, 그래도 가문의 이름을 쓰는 공적인 사안이니 저 혼자 마음대로 처리하면 아버지께 도리가 아니잖습니까.”
“내가 반대라도 하면, 아이를 다시 내보내게?”
“당연히 아니죠. 그래서 아버지를 설득하려고 긴장하고 왔는데….”
“말이 좋아 설득이지, 어차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게 아니냐. 괜히 입씨름하기 싫으니 알아서 하라는 거다.”
“이야…. 아버지, 많이 온화해지셨습니다?”
“네놈 미친 짓에 적응하는 거지.”
말하며, 노르딕은 픽 웃었다.
에녹이 더 어렸을 때에는 많이도 부딪쳤었다.
머리가 크자마자 이 나라의 계급제에 의문을 표하던 아들을 이해시키려고, 얼마나 애를 먹었던가.
다행히도 에녹은 그럭저럭 타협하고 끝내는 순응하며 자랐다.
물론 부조리한 계급제와 선민의식 그득한 귀족 사회를 이해해서는 아니었다.
그저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는 자식 된 도리였겠지.
“네게는 항상 미안한 마음이 있다. 후회도 하고 있고.”
“예?”
노르딕은 에녹에게 그의 신념과 다른 삶을 살기를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들은 항상, 노르딕에게 아픈 손가락이었다.
“자식을 보라 강요했던 것도….”
“…….”
“후회되는구나.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계자를 위해 억지로 시킨 정략혼에도, 아들은 순응했다.
그 결과가 7년 동안의 공백을 만들 줄 알았다면….
강요하지 않았을 텐데.
“아버지?”
에녹은 노르딕의 어두워진 안색을 살피다가 웃고 말았다.
“전 그때 아버지의 선택에 누구보다 감사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때 결혼 안 하고 애 안 갖겠다고 더 고집부렸다가 정말로 아버지 이겨 먹었으면….”
“…….”
“와, 끔찍해. 울 공주 이 세상에 없었을 거 아냐.”
에녹이 정색하며 혼잣말하다 이내 픽 웃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리리스가 태어나서 제 세계가 변했거든요.”
“…….”
“처음으로 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하루 애가 자라는 걸 보면서 행복하다는 게 뭔지 깨달았고요.”
에녹은 딸애의 얼굴을 떠올리며 꿈꾸듯 읊조렸다.
“아이에게 더 좋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도 있습니다. 뭐… 쉽진 않겠지만.”
“못 할 게 무어냐.”
노르딕이 에녹을 직시하며 덧붙였다.
“난 늙었다. 이제 무덤 들어갈 일밖에 안 남았으니 더는 너 하는 일에 어깃장 안 놓으련다.”
“…….”
“아직 안 늦었으니 하고 싶은 거 해라. 가문을 팔아먹든 말아먹든 늙은이는 더 방해 안 하마.”
“하하하….”
에녹이 웃자 노르딕도 웃었다.
두 남자는 더 말이 없었지만, 말보다 진한 애틋함은 꽤 오래 남아 그들 사이에 머물렀다.
* * *
나는 씻고 온 체시어와 침대 위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다 놀랐다.
“이게 뭐야?”
체시어는 해파리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해파리가 나온 동화책을 보여주고 따라 그리랬는데….
“왜. 맘에 안 들어? 다시 그려?”
나는 체시어의 그림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것도 주인공 버프니?’
절로 입이 떡 벌어지는 하이퍼리얼리즘. 도화지에는 극사실주의 해파리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그림인가, 사진인가.
“저기여, 여기 그림책에 있는 해파리랑 전혀 다르게 생겼자너…. 대체 동화책 그림체로 그려진 해파리를 보고 어떻게…!”
…극실사체 해파리를 그려 내냐고! 버프도 좀 개연성 있게 주라!
“…….”
체시어는 무심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정말이지 어이가 없군.
과연, #못하는 걸 못함
―따위의 키워드를 가진 주인공다웠다.
“뭐. 다시 그려?”
“후, 아니야. 못 그렸단 소리가 아니었어. 그냥, 너 잘났다구. 응.”
새삼 체시어의 재능을 확인한 나는 슬그머니 내 도화지를 가렸다.
재능 수치부터 주인공과 조연의 경계가 또렷한 세계….
주인공 아니라 참 서럽다.
“왜 가려. 이미 다 봤는데.”
“응, 그래…. 웃어도 돼….”
“그런데 해파리 그리기로 해 놓고 넌 왜 해파리 안 그려.”
“응?”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내 그림을 내려다봤다.
“해파리가 아니라니?”
제티와 쥰, 심지어 그 뒤로도 집사 렘 아저씨와 쌍둥이 오빠들까지 해파리 아니냐고 해서 그냥 해파리라고 치자, 마음먹었던 내….
“네 아버지 아냐?”
…그래, 우리 아빠 얼굴!
“으으응?”
나는 순간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체시어를 돌아봤다.
“이, 이거 울 아빠로 보여?”
“어.”
“세상에! 맞아!”
와. 내 심오한 미술관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통찰력까지.
과연 주인공.
“으히히, 다행이다. 그럼 이거 아빠한테 선물해 줘도 되겠지?”
울적했던 기분이 나아져서,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그림을 봤다.
“…넌, 아버지가 좋아?”
“응? 갑자기 그건 또 몬 질문이람. 아빠니까 당연히 좋….”
…지 않을 수도 있겠지. 친부에게 학대당한 체시어 앞에서 눈치 없이 할 말은 아니었다.
“으음, 울 아빠는 다들 좋아할 만한 사람이야. 그래서 나도 좋은 거구.”
“그래.”
“울 아빠 멋지고 착하지?”
“응.”
“그럼 너도 우리 아빠 아들 할래?”
나는, 나를 부러워하는 것 같은 체시어에게 말해 줬다.
“뭐?”
“너 진짜 아빤 나쁜 사람이잖아. 낳아줬다구 다 아빤 아니지. 울 아빠 아들 해.”
그게 원래 네 자리니까.
당당하게 말하는 나를 빤히 보던 체시어가 픽 조소했다.
팔자 좋은 7살 꼬꼬마의 발언을 우스워하는 얼굴이었다.
“안 믿는 거야? 울 아빤 분명 네 가족이 되어준다고 할걸?”
“필요 없어.”
“응?”
“가족 같은 거 필요 없다고.”
“…….”
체시어의 반응이 너무 냉정해서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열 장 다 그렸는데. 자도 되지.”
“아, 어어. 응.”
도화지 열 장을 내민 체시어가 몸을 일으켰다.
“하인들 방은 어디야.”
“하인들 방은 왜?”
“자라며.”
나는 곱게 놓인 베개를 팡팡 두들겼다.
“여기서 나랑 같이 자자. 네 방은 내일 아빠한테 내 방 옆에다가 꾸며 달라구 할게.”
“…….”
체시어는 황당한 눈으로 베개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됐어. 내가 어떻게 이런 데서 자. 잘 만한 다른 곳을 알려 줘.”
“어허, 장난감 씨. 너 내가 하는 말 다 듣기로 하지 않았어?”
“…….”
“누우시지.”
팡팡. 베개를 한 번 더 두드리자 체시어는 결국 한숨을 쉬며 몸을 눕혔다.
“히히. 폭신폭신 몽글몽글하지? 잠 엄청 잘 올걸?”
“…….”
“잘 자, 체시어.”
엎드려 턱을 괴고 굿나잇 인사를 하는 나를 보며 체시어는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멍이 든 얼굴을 얼마간 지켜보았을까.
고르게 색색 들려오는 숨소리.
나는 체시어가 완벽히 잠든 걸 깨닫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리코에게 주고 남은 살바시온을 찾아 따뜻한 물과 섞어 천에 묻혔다.
“안 깨겠지?”
많이 피곤했을 테니까.
나는 작은 손으로 조심조심 체시어의 얼굴 위에 난 멍이며 상처를 닦아 줬다.
‘이야, 효과 보소.’
체시어의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어서 금세 잘생긴 얼굴을 되찾았다.
“히히.”
나는 천을 치워놓고 침대에 엎드려서 잠든 체시어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았다.
“가족 같은 거 필요 없다고.”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체시어가 그 누구보다 가족의 정을 그리워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아버지에게 학대당하고….
그럼에도 체시어가 왜 그들을 먼저 떠나지 않았는지를.
“있지, 체시어. 내가 너한테만 특별히 엄청난 비밀을 알려 줄게.”
나는 그가 깨지 않도록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야.”
꿈에서나마 내 목소리를 듣기를 바라면서.
“주인공에게는 시련이 있는 법이거든. 그런데 시련은 언젠가 다 지나가. 네가 너무 안 힘들게 내가, 내가 도와줄게…. 그리고.”
나는 잠든 체시어의 몸 위로 조심히 이불을 덮어주며 약속했다.
“꼭, 네 가족이 되어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