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30/261)

* * *

고롱고롱, 제 옆에 누운 리리스가 곤히 잠들고 나서야 체시어는 눈을 떴다.

그는 애초에 잠든 적 없었다.

제 자리가 아닌 듯한 침대에서 맘 편히 잠들 수 있을 리가.

‘역시 이상한 애네.’

색색 잠든 리리스의 얼굴을 쳐다보던 체시어가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마주 누웠다.

‘정말 이상해.’

오늘 겨우 하루 만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첫 만남, 제도의 골목길에서.

자신을 걱정하던 리리스의 모습을, 체시어는 귀족들의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두 번째 만남.

후작가까지 찾아온 리리스를 보며 놀랐던 것도 잠시.

연고도 없는 자신을 구해준 건, 그저 흥미가 생긴 평민에게 잠깐 보이는 귀족들의 변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게 맞아.’

질리면 내다 버리는 장난감처럼, 귀족들의 눈에 들었다가 쫓겨나는 평민들을 많이 봤었다.

그래도 당분간은 안 굶고 한 몸 누일 곳이 생겼으니 다행이라고….

친부의 손에 죽거나 어디에서 객사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 어린 귀족 아가씨가 보이는 잠깐의 흥미를 잘 이용해 보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꼭, 네 가족이 되어줄 거야.”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체시어는 잠든 리리스의 얼굴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해.’

말로는 장난감이니 뭐니 해도, 리리스가 자길 배려하고 챙기고 있단 걸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눈칫밥만 평생 먹어왔으니까.

그게 부담스러워서 자꾸만 퉁명스러운 말이 나갔다.

“난 너 안 믿어.”

조용히 속삭이며 다짐했다.

그는 이미 많이 지쳐 있었고 더는 아무도 믿고 싶지 않았다.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다며 매일 손을 올리던 엄마가 다음 날 미안하다고 사과할 때면 바보처럼 그걸 믿었고….

따뜻하게 안아주진 않았어도 때리지는 않았던 아버지가, 혹시나 자길 아들이라 여기고 있는 건 아닐까 기대했었다.

그 믿음의 대가는 가혹했다.

어머니에게서는 버려졌고 아버지에게는 죽임당할 뻔했다.

피 섞인 가족도 믿음을 배반하는데, 하물며 남이….

“어차피 버릴 거면 나한테 잘해 주지 마.”

“…….”

곤히 잠든 리리스는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마냥 색색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이제 더 상처받기 싫으니까.’

고작 하루 만에, 다정한 온기에 취해 버린 것 같은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체시어는 리리스가 제게 덮어 줬던 이불을 치웠다.

* * *

‘아니, 같이 덮지…. 울 공주님은 왜 혼자만 이불을 덮고 있어?’

리리스의 방에 도착한 에녹은 침대 위에서 잠든 두 아이를 보고 웃고 말았다.

리리스에게 이불을 주고 휭하니 잠든 체시어의 머리맡에는 해파리 그림 열 장이 놓여 있었다.

‘녀석, 솜씨가 좋은데.’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처럼 그린 그림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에 비해 리리스는….

‘이게 해파리야?’

개성이 강한 해파리인가.

은색과 회색이 마구 뒤섞여 있고 파란 점 두 개가 눈동자처럼 찍혀 있었다.

‘해파리 아니라 나 아닌가?’

과연. 에녹의 눈썰미는 예리했다.

두 아이의 몸 위로 이불을 함께 덮어주던 에녹은 삐뚤빼뚤한 딸애의 글씨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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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에녹은 고롱고롱 잠든 딸의 뺨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좋은 꿈 꿔. 우리 공주님.”

* * *

이튿날.

사각사각.

나는 열심히 문제를 풀며 공부방 창밖으로 힐끔 시선을 던졌다.

체시어는 봄볕이 잘 드는 정원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심심하겠다. 나 수업할 땐 오빠들이랑 놀면 좋을 텐데.’

어제 레온이 그렇게 뛰쳐나간 후로 쌍둥이는 코빼기도 안 보였다.

“에휴.”

“흐아아암.”

그때 옆에서 하품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의자를 벌렁 뒤로 젖힌 오스카가 지루한 표정으로 코를 찡그리고 있었다.

“재미없다.”

“그럼 오시지 말지….”

“일주일에 한 번씩 특별 수업 해 주기로 했잖아. 한 입 갖고 두말할 순 없지.”

오늘은 일정대로 마탑주 오스카와 수학 과외를 하는 날이었다.

지금은 2차 방정식을 푸는 중인데 딱히 질문이 없으니 오스카는 지루한 모양이었다.

나는 선심 쓰듯 문제 하나를 짚었다.

“이거 모르겠어요. 알려주세요.”

“거짓말. 뭘 몰라.”

오스카가 비웃더니 문제지를 싹 치웠다.

“의미 없다. 다 아는 걸 풀려니까 너도 지루하지?”

“다 아는 건 아닌데….”

“그래, 그래. 그렇다 치고.”

오스카가 엎드려 나를 쳐다봤다. 흐드러진 백발 사이로 기다란 금색 귀걸이가 반짝였다.

“곧 양성소 가지? 아홉 살에 의무 입소이긴 한데… 일곱 살부터는 다 들어갈 수 있으니까. 생일 언제야?”

“5월 19일이요.”

“한 달도 안 남았군. 가서 엄마 얼굴 보겠네?”

“네?”

뜬금없는 말에 나는 놀랐다.

“엄마라니요?”

“뭐야, 아빠가 말 안 해줬어?”

오스카는 재미있는 건수라도 잡은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뜨며 씨익 웃었다.

“애는 혼자 낳나? 너 엄마 있는 줄 몰랐어?”

“아, 아녀. 그건 아닌데요….”

정확히는 깊게 생각해보질 않았었다. 아빠도 먼저 엄마 얘기를 꺼낸 적 없었고.

제논에서 살 때, “나는 왜 엄마가 없어?”라고 물으니 제임스 브라운 씨 왈―

“너, 너 갓난아기 때 집을 나갔어….”

―하고 얼버무린 게 다였다.

‘하긴. 나도 엄마가 있긴 하겠지. 아마 제도에 살고 있을 거고.’

원작에서는 딸을 잃었다는 사실만이 나와 있을 뿐.

에녹 루빈슈타인의 아내에 대한 언급은 단 한 줄도 없었다.

‘와, 나 조금 전까지는 정말,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오스카에게서 엄마의 존재에 대해 들은 순간 놀랍게도 내 가슴은 콩콩 뛰기 시작했다.

“마, 마탑주님은 울 엄마 아세여?”

“알고말고. 유명하지.”

“어떤 분이신데요?”

“알고 싶어? 지금 네 반응 보니 엄마 얘기 처음 듣는 것 같은데. 아빠도 그렇고, 이 집안 사람들도 그렇고…. 굳이 너한테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구, 구, 궁금해요. 알려 주세요.”

“그렇다면 알려 줘야지. 셀레나 루덴도르프 후작 부인. 알아주는 마법사였는데, 5년 전에 은퇴해서 지금은 능력자 양성소 연구원으로 있지.”

후작 부인?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오스카는 킬킬 웃으며 덧붙였다.

“네 아빠 사라지고 나서 뒤도 안 돌아보고 루덴도르프 후작과 재혼했거든. 사이에 아들도 있고.”

“아아, 그러, 그렇구나….”

“왜? 충격받았어? 너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관심도 없는 것 같지? 바로 딴 남자랑 재혼하고 애도 낳고 잘 사는 걸 보면 말이야.”

충격받았을까 걱정하기보단 충격받길 바라는 것 같은 얄미운 오스카의 표정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녀. 충격 안 받았는데.”

“그으래?”

“네. 엄마도 엄마의 인생이 있잖아요. 어리고 능력도 있는데 하고 싶은 거 하구 살아야죠.”

“뭐, 그렇지. 어리고, 능력 있는 마법사였고, 가문도 좋았어. 그래서 그 당시에 제일 잘나가던 네 아빠랑 결혼한 거고. 귀족들 결혼 장사에 사랑이야 있었겠냐만….”

의자를 젖힌 채 중얼거리던 오스카가 덧붙였다.

“그래도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남편은 몰라도 너는, 배 아파 낳은 자기 자식이잖아?”

“아빠가 저 태어나자마자 데리고 도망쳤는데요? 어디 있는지도 몰랐을 텐데 엄마가 뭘 어뜨케 해요.”

“풉. 순진하긴.”

의자를 당겨 앉은 오스카가 내 코끝을 툭 건드렸다.

“네 엄마도 도스야. 아직 서른 살도 안 된 젊은 능력자지. 그런데 어떻게 벌써 은퇴하고 몸 편히 양성소 연구원이나 하고 있을까?”

“…….”

“너랑 네 아빠가 어디에서 숨어 살고 있었는지, 황제에게 다 분 게 바로 그 여자야.”

“…네?”

“그 대가로 은퇴할 수 있었지. 또, 자기 아들이 소년병으로 차출되지 않도록 황제에게 약속받았고 말이야. 이게 무슨 말인지 알아?”

“…….”

“딸인 널 판 거야. 아들을 위해서.”

쿵.

그 순간, 나는 오스카의 말에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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