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인 널 판 거야.
아들을 위해서.
오스카의 말을 곱씹으며 나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그랬구나.’
아빠 성격상 같이 낳은 자식을 엄마도 모르게 데리고 도망치진 않았을 거다.
엄마에게는 거취를 알렸던 모양이다. 엄마가 황제에게 그 거취를 발설할 것까지는 예상 못 했겠지만.
‘그렇다면 이 비극의 시작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엄마였다고?’
원작에서 나는 납치당했다.
그다음 양성소로 옮겨졌을 테고.
계급을 확인받은 다음, 감금되었겠지.
‘엄마는 지금 양성소에서 일하고 있댔지. 그럼, 그럼 엄마는 전부 알고 있었다는 말이네.’
아무것도 모른 채 납치돼 아빠와 떨어지고 계급이 밝혀지고 황실에 감금되는 그 과정 전부….
원작의 엄마는 알고 있었고, 보고 있었고, 그럼에도 모른 척 입을 다물었다는 말이다.
‘…이건 좀 많이 충격인데.’
비극 중의 비극이었던 내 삶에 다른 누구도 아닌 친엄마가 기여했다는 사실은 꽤나 충격이었다.
“후아, 후아.”
“이번엔 충격이지?”
“네에…. 쪼끔요.”
순순히 답하자, 오스카가 왜인지 묘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양성소 갔다가 바로 마탑으로 들어와. 이 몸의 권한으로 널 조기 채용해주지.”
“엥…. 제가 왜요. 싫어요.”
“뭐? 왜?”
나는 우울해져서 멍하니 종이 위에 펜을 끼적였다.
“아빠랑 집에 있을래요. 거기 가서 뭐 해요.”
“너 마탑에 안 들어오면 전쟁터 굴러야 해. 어리다고 봐 주는 것도 없어. 소년병들도 다 이빨 백 개 달린 마수들 토벌하러 다녀.”
“그래도 안 가요. 아빠랑 떨어지기 싫어요.”
“믿는 구석이 있구나.”
오스카가 비웃었다.
“왜, 아빠가 아무것도 하지 말라던? 손 하나 까딱 안 하는 공주님처럼 살게 해 주겠대?”
“…….”
“대가 없이 그런 호사를 누릴 순 없지. 네 엄마가 널 팔아서 자기 아들 지켰듯이.”
오스카가 검지로 내 이마를 꾹 밀며 덧붙였다.
“네 아빠도 마찬가지야. 너 공주님처럼 살게 하는 대신에 자기가 전쟁터 구를 생각일걸?”
“…….”
“네 아빠 무시무시한 사람인 건 알 거고. 황제도 제멋대로 전쟁터 나가라 말라 못 했어. 특히… 침략 전쟁 같은 건. 네 아빠가 사사건건 반대하고 그랬거든. 그런데.”
말을 멈춘 오스카가 픽 웃었다.
“딸이 생겼네? 아마 지금 황제는 옷 벗고 춤이라도 추고 싶을걸. 너 가지고 협박하면 쉽잖아.”
“…….”
“너, 아빠가 약점 잡혀서 황제 앞에서 찍소리도 못 하길 원해? 아무 잘못 없는 사람들 죽이러 가고, 그래도 괜찮아?”
그럴 일 없다. 내가 징병 의무를 지는 상위 3계급만 아니면 될 일이고, 그에 대한 대비책은 이미 세워뒀으니까.
다만 나는, 날 도와주려는 듯한 오스카의 속내가 궁금해졌다.
‘진짜 속 모를 능구렁이 캐릭터 1위란 말이지? 말하는 걸 보면, 황제를 안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대체 왜 원작에서는….
아빠가 혁명에 힘을 보태 달라고 했는데도 한사코 거절했을까?
나는 눈을 부릅뜨고 원작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반란에 성공한 아빠와 체시어의 최종 목적지는 황궁이었다.
적폐 제국에서 독재를 일삼았던 폭군 황제의 목을 쳐야 했기 때문이다.
반란군이 궁에 도착했을 때.
황제의 옆에는 놀랍게도 마탑주, 오스카가 있었다.
‘그거 보고 역시 오스카는 황제 편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오스카는 황제의 목이 잘리는 걸 지켜보기만 했다.
어억, 마탑주! 하면서 황제가 도와달라고 손을 뻗었는데도 눈길 한번 안 줬다.
그런 오스카가 나섰던 건.
‘최종 빌런인 내가 등장하고 나서였지, 아마?’
죽은 줄만 알았던 나는 세뇌된 상태로 등장했다.
악랄한 황제 놈이 몰래 숨겨둔 최후의 보루.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는, 내 의지는 아니지만 황제의 편이었고 아빠의 적이었다.
패닉에 빠진 아빠를 대신해 체시어는 나를 죽이려고 했는데, 그때 체시어를 막아선 게 오스카였다.
한 번도 자기 힘을 남발한 적 없던 오스카는 이상하게도 마지막에 피까지 토하며 체시어와 싸웠다.
어쨌든 그는 주인공과 빌런들의 대립에서 빌런의 편에 붙었으니 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영 헷갈린단 말이지. 그럼 왜 나는 지켜주고, 황제가 죽을 때는 지켜만 봤던 걸까?’
나는 고민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오스카가 큭큭 웃으며 내 이마를 문질렀다.
“인상 펴라. 주름 생긴다.”
“후우, 어려워요.”
“뭐가.”
“마탑주님이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인지 모르겠어요.”
“푸하하하…!”
오스카가 배를 잡고 웃었다.
재밌나. 나는 눈꼬리에 눈물까지 매달고 웃는 오스카를 뾰로통하게 쳐다봤다.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세요?”
원작에서 필사적으로 나를 지켜줬던 것도 그렇고.
지금, 징병되지 않도록 마탑으로 스카우트해주겠다는 것도 그렇고.
영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임에도 나에게만은 호의적인 게 의아했다.
‘설마 얘 나랑 뭐 있었나?’
혹시 핑크빛, 뭐 그런 거?
원작에선 나오질 않았으니 알 턱이 없었다.
나는 오스카의 멱살이라도 잡고 짤짤 털며 미래에 왜 날 지킬 거냐고 묻고 싶었다.
“사랑해서?”
“…네에에?!”
진짜 핑크빛? 입을 떡 벌리는 나를 보며 웃음을 터뜨린 오스카가 덧붙였다.
“천재들을 사랑하거든. 나는.”
“아고, 깜짝이야!”
가슴을 쓸어내리는 내 모습을 보고 오스카가 책상을 쾅쾅 치며 막 웃었다.
“아하하! 아아, 얘 미치겠네, 진짜. 놀라셨어요?”
“네, 쫌. 오해할 뻔했자나요! 우린 나이 차이가 넘 많이 나서 안 돼요!”
“푸하하하하!!”
사람 놀려먹긴. 나는 뺨을 잔뜩 부풀리곤 오스카를 노려보았다.
“아하, 야….”
“왜여.”
오스카가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훔치더니 창밖을 턱짓했다.
“쟤네 싸운다.”
“네?”
뭔가 싶어 돌아보니, 1층 정원에 뒤엉켜 있는 두 남자아이가 보였다.
체시어와….
‘레온?’
아래 깔린 체시어는 일방적으로 레온에게 주먹질을 당하고 있었다.
“저, 저게 몬 일이야!”
나는 화들짝 놀라 달려 나갔다.
* * *
짧은 다리로 뽈뽈 달려 나간 리리스가 창 너머로 보였다.
오스카는 턱을 괸 채 리리스를 지켜보며 피식 웃었다.
“나이 차이 좋아하시네.”
리리스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일순 애틋함이 스쳤다.
왜인지, 아주 오랜 듯한….
“속은 완전 늙은이면서. 연기도 잘해.”
* * *
“멈춰!!”
내가 소리치며 달려가자 체시어의 얼굴 위로 주먹질하던 레온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지금 이게 모 하는 짓이야!”
“…….”
“비켜! 체시어 놔줘!”
레온은 이를 갈면서 아래 깔린 체시어를 보다가 이내 일어났다.
“괘, 괜찮아?”
나는 후다닥 체시어에게 달려갔다. 일어나 앉는 그의 입술이 그새 터져 있었다.
겨우 나은 상처가 또….
“대체 왜!”
폭행당한 트라우마가 여전할 텐데, 구해온 지 하루 만에 또 맞게 했다.
아무도 널 못 때리게 해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는.
“왜 때렸어! 왜!”
나는 울컥해서 레온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는 대답도 하지 않고 체시어를 죽일 듯 노려볼 뿐이었다.
“말해! 왜 때렸냐구!!”
“쟤랑 친구 하지 마.”
“…뭐?”
“하지 말라고. 나쁜 놈이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얘가 널…!”
레온은 뭐라 말하려다가 꼭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내 말 들어. 이 새끼랑 놀지 마. 평민인 주제에 건방지게 구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뭐라고?”
지금 내가 들은 게 맞나. 레온이 평민 운운한 게, 정말?
세상 사람 다 체시어를 무시하고 깔봐도 레온만은 아니어야 했다.
겉으로는 틱틱거렸지만, 뒤에서는 체시어 욕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혼내 주고 다녔던 멋진 형이 아니었던가.
‘대체 왜 이렇게 되는 거야?’
나는 원작과 달리 둘의 관계에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뭐가 잘못된 거지? 어디서부터 틀어진 걸까?
체시어를 조금 더 빨리 구해온 게 잘못이었을까?
아니, 그런 걸 다 떠나서….
나는 레온에게 실망하고 말았다.
“나는 평민 아니야?”
“뭐?”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가 평민인 줄 알고 살았는데. 내가 아빠 딸 아니었으면 오라버니는 나랑 말도 안 했겠다.”
“야, 그게 아니라….”
“나 제논에서 살 때는 평민 친구들도 있었어. 수잔 아줌마도, 죠 아저씨도 평민이었어. 다들 착했고 지금도 보고 싶어.”
“…….”
“나는 귀족 됐다 해서 친구 가려 사귀고 그러지 않을 거야. 체시어는 내 친구야. 그러니까 때리거나 무시하지 마.”
나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레온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레온은 그런 나를 지켜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눈시울도 살짝 붉어졌다.
“너….”
“…….”
“나보다 쟤랑 더 친하냐? 쟤가 더 좋아?”
열두 살다운 유치한 질문에 나는 전투 의지를 잃고 말았다.
그렇지. 레온은 아직 어리지.
그러니까 이해해야 하는데도 쉽지 않았다.
“오라버니가 더 좋았는데 이제는 몰라. 나는 폭력 쓰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싫으니까.”
나는 분해 보이는 레온에게 냉정하게 말했다. 이런 말로 레온의 버릇을 고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
레온은 충격받은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껌뻑거렸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고 한참 부들부들 떨더니, 이내 뒤돌아 달려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