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2/261)

나는 작아지는 레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체시어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아프지?”

“아니.”

“미안해. 울 집에 오자마자 이런 일이 생겨서…. 너 절대 안 맞게 해 준다구 약속했는데.”

“네가 왜 미안해. 그리고 맞을 만했어.”

“응?”

“저 형이 내 말을 오해한 것 같아.”

“무슨 소리야?”

체시어는 나를 빤히 보더니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나한테 와서, 너랑 진짜 친구냐고 물어봤어.”

“그래서?”

“친구 아니라고 했어.”

“그럼 뭐라고 했는데?”

체시어는 잠시 망설이다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장난감이야― 라고.”

“뭐?”

나는 황당해져서 눈만 깜빡였다.

“네 친구라고 하면 저 형이 싫어할 것 같아서. 친구가 아니라 네 장난감이라고 말하려던 건데.”

“…….”

“그 말을 반대로 이해한 것 같아.”

“반대로? 아!”

그러니까 레온은….

체시어가 날 두고 ‘친구가 아니라 내 장난감인데?’라고 말한 것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아니….”

“오해한 것 같아서 해명하려고 했는데 틈을 안 줘서.”

욱한 레온은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을 테고 오해를 바로잡기 전에 내가 온 거다.

이제야 모든 상황을 이해한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으아아.”

“내가 말을 이상하게 했다. 미안.”

“아니야, 아니야…. 이건 내 잘못이야….”

체시어가 호의를 부담스러워하니까 그냥 장난친 거였는데.

“체시어, 있지.”

“누가 또 물어보면.”

이제 장난감 얘기는 하지 말라고 정정하려는데, 체시어가 내 말을 잘랐다.

“친구라고 대답하면, 돼?”

“…….”

체시어는 내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별생각 없이 꺼낸 말 같으면서도 약간의 걱정이 느껴졌다.

거절당하면 어쩌나 싶은….

“응! 꼭!”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입술 또 터진 거는….”

“나는 괜찮아. 그보다 아까 그 형한테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 응.”

제대로 상처받은 것 같던 레온이 떠올라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짜고짜 주먹질은 심했지만, 제 딴에는 날 생각해서 욱했을 텐데….

* * *

“내 동생이라고요! 내 동생!!”

“얘가 진짜 왜 이렇게 아이처럼 굴까! 그만 못 해!”

레온의 방 앞에 도착하자마자 문밖으로 새어 나오는 소란에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잔뜩 심통이 난 레온이 고모까지 붙잡고 화를 내는 모양이었다.

“오라버니이.”

조심스레 문을 열자 고모가 돌아보았다.

“어머, 리리스?”

“…….”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는지 레온은 나를 보고 놀란 눈을 크게 떴다가 곧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고모가 반갑게 달려왔다.

“레온이랑 다퉜다며? 둘이 얘기 좀 할래? 고모는 나가 있을게.”

“네에.”

고모가 나가고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레온에게 쭈뼛쭈뼛 다가갔다.

“오라버니.”

“왜.”

“체시어 왜 때렸는지 들었어.”

“…….”

“체시어가 나보고 장난감이라고 해서 화났지?”

“그래. 걔 나쁜 놈이야. 사람한테 장난감이 뭐야?”

“오해야…. 체시어는 자기가 내 장난감이라구 말한 거야. 내가 체시어 장난감인 게 아니라.”

“뭐?”

“사실 내가 체시어한테 장난감 하라구 했거든.”

레온이 입을 떡 벌렸다.

“물론 장난이었어. 그런 장난은 하면 안 되는데. 내가 나빴어.”

“…….”

“아무튼, 체시어는… 나랑 친구라 그러면 오라버니가 싫어할까 봐 그렇게 말했대.”

“어이없네. 내가 왜 싫어하는데?”

“오라버니가 체시어 마음에 안 들어 했잖아. 어제도 막 노려보고 그랬으니깐….”

“그건 걔가 마음에 안 들어서가 아니라!”

“아니라?”

레온이 고개를 휙 틀며 덧붙였다.

“네가 걔랑 더 친한 것 같으니까.”

“…머?”

“집에까지 데려와서 같이 산다고 할 정도면 걔가 엄청 마음에 든 거잖아.”

“…….”

“거미도 나랑만 잡으러 가기로 해 놓고 갑자기 걔도 데려가자고 하는 게 어디 있냐? 네가 걜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짜증 났던 거야.”

나는 뾰로통해진 레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말 생각도 못 했던 이유다.

신분을 들먹이길래 평민이라는 데에 반감을 느끼는 줄 알았는데.

‘그러니까 질투라는 거지?’

깨달은 나는 끙차, 레온의 옆으로 올라가 앉았다.

“에휴우, 오라버니…. 체시어는 친구지만, 오라버니는 가족이잖아.”

“…….”

“나 좀 봐바…. 응?”

팔을 당기며 칭얼거리자 레온이 여전히 불퉁한 표정으로 쓱 돌아봤다.

나는 침대 아래로 가만히 발을 구르며 말을 시작했다.

“나는 있지, 가족이 아빠밖에 없는 줄 알았어. 그래서 제논에서 살 때는 언니나 오빠가 있는 애들이 부럽구 그랬는데….”

“…….”

“여기 와서 나도 오라버니들이 생겼잖아? 그것도 아주아주 멋지고 잘생기고… 음, 또 거미도 잘 잡구, 착하구….”

돌아보니 레온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내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히히. 나는 요즘 넘넘 행복해. 아빠만 있어도 좋다구 생각했는데, 오빠들도 생기구 같이 노니까 너무 좋아.”

나는 레온의 허리를 답삭 끌어안았다. 멈칫하던 레온이 이내 쭈뼛쭈뼛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라버니는 나랑 가족이구 평생 내 옆에 있어 줄 거잖아. 앞으로 나한테 친구가 많이 생겨도 오라버니는 나한테 제일 소중한 사람이야.”

“…진짜?”

“응, 진짜. 앞으로 많이많이 같이 놀구 맛있는 것도 같이 많이많이 먹구 그러자.”

레온이 내 뺨을 잡고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씩 웃었다.

“좋아.”

그리고는 곰 인형 안듯 다시 나를 와락 안고 물었다.

“그런데 걔가 좋아, 내가 좋아?”

한참 이런 질문에 예민할 나이, 열두 살.

나는 웃음을 참으며 레온을 더 꽉 끌어안았다.

“오라버니!”

“그럼 테오가 좋아, 내가 좋아?”

“오라버니!”

“푸하하! 삼촌이 좋아, 내가 좋아?”

“엥. 그건 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레온이라도 아빠를 이길 순 없지.

“알았어. 삼촌은 봐준다.”

레온이 웃음을 터뜨렸다.

* * *

이튿날.

체시어는 쌍둥이의 방으로 불려왔다.

‘어제 일 때문에 벌이라도 주려는 건가.’

레온은 의자에 다리를 착 꼰 채 앉아 있었다. 귀티 나는 얼굴하며 거만한 포즈가 전형적인 귀족 도련님다웠다.

“야.”

체시어가 레온을 바라봤다.

“어제 때린 건 미안하다.”

레온의 입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순간 놀란 체시어가 말문을 잃었다.

“내가 오해했다며. 아무리 그래도 폭력은 안 좋은 거니까 사과한다. 리리스가 사과하래서 억지로 하는 거 아니고, 진짜 진심이야.”

“…괜찮아요. 내가 말을 이상하게 했으니까.”

“그래. 말 놔라.”

“…….”

“놓으래도?”

“어.”

대답하자, 레온이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레온이 말투가 좀 그래서 그렇지 나쁜 애는 아니야. 네가 이해해 줘.”

“내가 뭐!”

침대에 누워있던 테오가 말하자 레온이 발끈했다.

“체시어라고 했지? 나는 테오야. 편하게 지내. 우리 집은 아니지만….”

테오는 과연 레온과 얼굴 빼고 모든 게 딴판이었다. 상냥한 표정이며 말투까지.

다만….

‘어디 아픈가?’

왜인지 좀 아파 보였다. 창백한 얼굴색과 파랗게 질린 입술이 눈에 밟혔다.

“야! 너 이제부터 여기에서 지낼 거면, 서열 정리를 좀 해야겠다.”

테오에게서 눈을 뗀 체시어가 레온을 바라보았다.

서열 정리?

귀족다운 발언이긴 했으나….

‘정리할 서열이랄 게 있나. 난 이 집에 얹혀살게 된 평민일 뿐인데.’

체시어가 의아해하는데 레온이 히죽 웃었다.

“리리스가 말하길, 너보다 내가 더 좋다고 했거든.”

“…뭐?”

“하하하! 짜식, 패배감이 가득한 표정이군!”

그냥 어이없는 표정인 건데….

“그리고 테오 녀석보다도 내가 더 좋다고 했지.”

“진짜?!”

이불 속에서 끙끙대고 있던 테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 진짜. 못 믿겠으면 리리스한테 가서 물어봐.”

진지하게 충격받은 테오를 보며 레온이 뿌듯한지 쓱 코를 훔쳤다.

“삼촌까진 못 이겼지만, 아빠를 어떻게 이기냐? 예외로 쳐야지, 뭐. 그러니까 내가 서열 1위다. 불만 없겠지?”

서열이 그 서열이었어? 체시어는 황당해졌다.

“야, 레온. 잠깐. 체시어랑 나 중에는 누가 더 좋다고 했는데?”

“그건 안 물어봤어. 네가 3등일지도?”

“하.”

테오의 심각한 표정을 지켜보던 체시어가 재빨리 말했다.

“내가 3등 할게.”

“…응? 양보해 주는 거야? 너 착하구나.”

“뭐래, 멍청이들. 그건 리리스가 정하는 거지!”

지금 이딴 거로 서열 싸움을 하는 것 자체가 멍청하다고!

체시어는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걸 참았다.

“하, 지금 리리스 뭐 해?”

“수업 듣고 있겠지. 큭큭…. 왜? 물어보게? 너 쟤 이길 자신 있어? 아서라, 괜히 상처받는다.”

테오가 띵한 머리를 붙잡고 침대에서 휙 내려왔다.

그러나 한 발자국도 제대로 걷지 못하고 휘청거리다 풀썩 엎어졌다.

“윽.”

“야, 테오. 괜찮냐?”

“아니… 헉.”

“아이 씨. 또야?”

테오가 목깃을 움켜쥐었다. 갑자기 식은땀이 뚝뚝 쏟아졌다.

“야, 기다려! 하인들 데려올게!”

레온은 뒤도 안 돌아보고 방을 달려 나갔다.

‘몸이 많이 안 좋은 건가.’

테오와 단둘이 남겨진 체시어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호흡만 좀 힘든 듯했던 테오의 상태는 계속 심해졌다.

“으, 으끅, 흐.”

놀란 체시어가 주춤거렸다.

뒤로 뒤집히는 동공. 바르르 경련하는 팔과 다리.

이내 바닥에 널브러진 테오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으아아악! 아아악!”

“……!”

꼭 불 속에 던져진 것처럼 꿈틀거리는 몸이 바닥을 기었다.

“아아아아악!”

테오는 제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얼마나 세게 후비는지 금세 살이 찢어져 피가 비쳤다.

“무슨….”

극한의 고통을 참으려는지 테오는 계속 제 몸에 상처를 냈다.

“그만해!”

체시어는 본능적으로 테오에게 달려가 그의 몸을 짓누르고 자해하는 두 팔을 제압해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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