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3/261)

* * *

“울 딸 곧 생일이네?”

“엥. 아직 멀었는데….”

“에이, 한 달도 안 남았잖아.”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리리스를 방까지 데려다주며 에녹은 자기가 더 들떠서 물었다.

“공주 뭐 갖고 싶어?”

“글쎄….”

“다 말해 봐. 작년에는 비싼 거 못 사줬지만, 이번에는 공주가 갖고 싶은 거 아빠가 다 사 준다!”

“별로….”

등 뒤에 멘 곰돌이 가방을 추스르며 걷는 리리스의 반응이 심드렁했다.

“갖고 싶은 게 없어? 너 작년에 그거 뭐야, 공주님 구두 갖고 싶댔는데….”

…못 사줬지. 가격이 좀 있어서.

리리스의 생일인 봄에는 땔감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 나무 해다 팔던 제임스 씨는 이맘때가 비수기였다.

“아니야, 신발 많아. 필요 없어. 고모가 많이 사 줬어.”

“그럼?”

“가지고 싶은 거는 딱히 없구….”

고민하던 리리스가 슬쩍 에녹을 올려다봤다.

“곧 제도에서 축제 한다며. 그거 같이 보러 가 줄 수 있어?”

“아.”

그러고 보니, 내달 초부터 2주간은 ‘아이들의 날’ 축제 기간이었다.

축제 기간에 귀족 어린이들은 시 낭송이나 연주, 승마 같은 고상한 행사를 즐기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리리스가 말하는 건 아마 평민 아이들의 축제.

불빛 반짝이는 시가지에 장난감 가판대들이 줄지어 있고 어릿광대 놀이와 인형극을 구경하는….

그야말로 어린이들의 천국이었다!

“아니당…. 그냥 못 들은 거로 해. 안 되겠지. 할아버지가 별로 안 좋아하실 테니깐….”

“왜 안 돼?”

에녹이 시무룩해진 리리스를 번쩍 안아 들었다.

“가자, 가자!”

“에휴, 아빠 바보 아냐? 아빠 일케 번쩍번쩍한데 나가면 사람들이 다 알아보고 또 와서 절하구 그럴 거 아냐?”

“어이쿠, 그건 걱정하지 마. 그날 잠깐 제임스 브라운으로 변장하면 되지. 할아버지 몰래 우리끼리 나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공주님 신발도 사고 그러자.”

“진짜?”

“어, 진짜.”

리리스의 표정이 금세 환해졌다.

“으항항! 아빠 최고다!”

“아빠가 최고지? 그럼 뽀뽀.”

“응!”

배시시 웃은 리리스가 에녹의 뺨에 뽀뽀했다.

마주 보며 킬킬거리던 부녀가 놀란 것은, 바로 그때.

“으아아악! 헉, 아악!”

별안간 저택에서 들려온 비명에 복도를 가로지르던 에녹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고통에 찬 신음의 발원지는 굳게 닫힌 문 너머였다.

‘이런. 테오인가 보군.’

에녹의 표정이 굳었다.

희귀병을 앓고 있는 조카, 테오 앙트라세.

에녹이 제도를 떠나기 전에도 자주 발작을 일으켰던 테오다.

안타깝게도 지금 다른 이들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는.

“있지, 공주야. 아빠랑 잠깐 나갔다가….”

“나 내려 줘!”

“어?”

충격받을 리리스를 안고 자리를 피하려던 에녹이 멈칫했다.

“빨리 내려 줘, 빨리!”

“아니, 잠깐.”

에녹은, 작은 손으로 제 가슴을 팡팡 내려치는 리리스를 엉겁결에 내려놓았다.

발이 땅에 닿자마자 리리스는 등 뒤에 메고 있던 곰돌이 가방을 돌려 열고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펜던트….

아니, 그 안에 든 검보랏빛의 작은 구체는 분명.

‘핵? 마수의 핵이 아닌가?’

애가 왜 저런 걸 가지고 있을까.

의문을 확인할 새도 없이, 황급히 달려간 리리스가 문을 열었다.

* * *

“도련님, 조금만 버티세요!”

“흐, 흐아악! 아아아아!”

문을 열자마자 펼쳐진 보기 힘든 광경에, 나는 그대로 굳었다.

“아….”

테오는 붉게 충혈된 눈을 부릅뜬 채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땀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과 한계까지 꺾인 목.

그의 팔과 다리를 한쪽씩 잡은 하인들은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질끈 감고 있었다.

「발작하는 주기는 테오 앙트라세가 자랄수록 점점 짧아졌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올 때면 그는 제 손으로 목과 가슴을 쥐어뜯으며 상처를 내곤 했다.

그때마다 하인들은 그의 팔과 다리를 억지로 붙잡고 발작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모든 상황을 텍스트로 읽을 때와 실제로 볼 때의 괴리는 엄청났다.

“아아, 테오…. 제발, 제발 조금만 견뎌 주렴. 곧 괜찮아질 거야.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고모는 주저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레온도 그 옆에 서서 입술을 물고 주먹만 쥐고 있을 뿐.

‘이럴 때가 아니야.’

충격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었다.

“오라버니!!”

나는 급히 소리치며 테오에게로 달려갔다.

“리리스!”

“아, 아가씨! 가까이 오시면!”

나는 말리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무작정 침대로 뛰어들어 테오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목에 건 펜던트가 맞닿은 가슴에 지그시 눌렸다.

“허억! 아….”

“오라버니, 아프지 마. 아프지 마, 제발….”

“아아악!”

나는 고개를 흔들어 금세 뿌예진 눈가를 털어내며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제발. 제발 괜찮아져라.’

마수의 핵이 테오의 고통을 가라앉힐 방법인 줄은 알고 있지만, 원작에서 실제로 쓰인 적은 없었기에 내심 걱정이 되었다.

‘설마 소용없는 건 아니겠지. 그럼 안 돼. 제발….’

그때.

“하아, 하….”

놀랍게도 거칠었던 테오의 숨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격한 몸부림도 수그러졌다.

‘세상에. 정말로 됐어!’

나는 재빨리 목에 건 펜던트를 빼 쥐고 기도하듯 테오의 손을 맞잡았다.

“왜 그래, 오라버니. 아파? 응?”

“하아, 하…. 리, 리리스…?”

“도, 도련님. 괜찮으세요?”

“정신이 드시나요?”

순식간에 발작이 가라앉은 테오를 보며 하인들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테오! 아가!”

놀란 고모가 달려왔다. 나는 테오의 손에 펜던트를 쥐여주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너… 너 괜찮니?”

“…아. 네, 엄마.”

“이럴 수가, 세상에….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뭐야, 너 안 아파? 벌써?”

레온이 눈이 휘둥그레져 묻자 마른 입술을 달싹이던 테오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다행이에요, 오르디아 님. 오늘은 발작이 빨리 잦아들었어요.”

“그러게나 말이야. 이런 적은 처음이야. 신이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안도하는 고모와 하인들을 보고 있던 나는 아차 싶었다.

‘헉. 이게 아닌데.’

상황이 내가 그린 그림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주변에서 갑자기 발작이 사라진 이유를 의아해하고 그 원인을 찾으려 하면, 자연스럽게 펜던트로 시선을 모을 생각이었는데….

‘다들 발작이 잦아든 것에만 안도하고 있잖아! 이럼 안 돼!’

테오의 병은 완치되는 종류가 아니라 주기적인 힘의 충돌을 계속 상쇄해야 하는 병.

다시 말해, 마수의 핵을 평생에 걸쳐 지니고 다녀야 한다.

하지만 이래서는, 궁극적인 치료제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넘어가게 될 거다.

그렇다고 불쑥 끼어들어서 ‘왠지 이 펜던트가 오라버니를 낫게 한 것 같지 않나요?’ 하고 말하면 수상해 보일 테고.

‘눈치 빠른 사람 없냐고오오!’

속으로 절규하던 때였다.

“괜찮으냐, 테오.”

뒤에 있던 아빠가 다가와 침대 곁에 서며 물었다.

“아아, 네. 삼촌. 괜찮아요…. 이제 안 아파요.”

“그래, 다행이구나. 누님, 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다고요?”

“응. 한 10분쯤.”

“뭔가 이상하네. 항상 서너 시간은 고생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역시 주인공.

예리하게 빛나는 눈으로 상황을 의심하는 아빠를 보며 나는 안도했다.

“다행이다, 오라버니. 내가 아프지 말라구 해서 빨리 나은 거 아니야? 히히.”

나는 눈치껏 펜던트를 쥔 테오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정말 그런가 봐…. 고마워, 리리스. 많이 놀랐지?”

“응. 그치만 오라버니 이제 안 아프면 괜찮아.”

배시시 웃으며 안기자 테오가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슬쩍 아빠를 보니, 역시나 테오의 손에 들린 펜던트를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었다.

“리리스.”

“응, 아빠.”

“너 그거 어디서 났어?”

“응? 이거?”

모두의 시선이 펜던트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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