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5/261)

“자, 마셔! 오늘도 수고했어!”

“…고마워.”

“히히.”

기분 좋은 일은 또 있었다.

아빠는 일단 체시어의 후견인이 되어주기로 했고, 그 뒤부터 우린 같이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 둘의 시간표는 두 개 빼고 다 똑같았다.

나는 마탑주 오스카에게 수학 특별 과외를, 체시어는….

‘아빠에게 검을 배우는 중이지!’

나는 물을 마시는 체시어의 옆모습을 지켜보며 쿡쿡 웃었다.

2년 빨리 아빠에게 검을 배우게 됐으니, 체시어가 아빠의 뒤를 이어 소드마스터가 되는 것도 2년 빨라질지 모른다.

‘이거, 이거…. 이렇게 쉬워도 되는 거야?’

원작대로 착착, 순항하고 있었다.

“체시어!”

“응.”

“일로 와바.”

나는 손짓했다. 체시어가 고개를 숙여 귀를 빌려주었다.

“오늘 우리 그거! 그거 하기로 한 거 잊지 않았지?”

“무슨. 아아.”

체시어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다 말했다.

“그냥 아저씨랑 둘이 갔다 오는 게 어때.”

“안 돼! 나랑 약속했잖아!”

“…알았어.”

마지못해 체시어가 대꾸했다.

“야! 너네 왜 둘이만 귓속말하냐? 뭔 말 했는데?”

레온이 끼어들었다.

“히히. 아냐, 아냐. 별말 안 했어.”

“별말 안 하기는?! 너 일로 와. 무슨 말 했는지 불어!”

“꺄하하! 아, 시러어어!”

나는 쫓아오는 레온을 피해 열심히 도망쳤다.

오늘은 어린이의 날 축제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 * *

“준비됐나, 제군들!”

“옙, 제임스 브라운 대장님!”

“…….”

해가 저문 초저녁.

평민 복장을 한 아빠와 나, 체시어는 아무도 몰래 저택을 빠져나왔다.

나란히 선 두 꼬마 부하를 내려다보며 씩 웃은 아빠가 뒤돌아 “전진!” 하고 외쳤다.

동시에 아빠가 제임스 브라운으로 변했다.

간만에 보는 엑스트라의 상징, 갈색 머리와 갈색 눈이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돼, 돼!”

“오늘 우리 재밌게 놀자구!”

나와 아빠는 걱정하는 체시어를 이끌어 제도로 나왔다.

“히야아아!”

축제 첫날.

축제인지도 모르겠는 귀족들의 타운하우스 거리와 달리 평민 거주지역은 화려하고 시끄러웠다.

반짝이는 불빛이 거리마다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사탕과 과자를 파는 노점 상인들이 반갑게 손짓했다.

저마다 부모님들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은 행복한 분위기에 흠뻑 젖어 웃고 있었다.

‘캬, 이게 진짜 축제지! 귀족들은 고상한 척하느라 바빠서 바보처럼 즐기지도 못하고!’

나는 아닌 척해도 들떠 보이는 체시어의 옆모습을 훔쳐보며 속으로 웃었다.

내가 오늘 아빠에게 축제 구경을 하러 오자고 한 건 체시어를 위해서였다.

‘아빠가 체시어를 데리고 축제 구경 갔던 날…. 잊지 못해! 얼마나 감동적인 에피소드였는데!’

원작에서, 아빠와 체시어는 처음부터 살가운 부자 관계가 아니었다.

뭐, 당연했다. 에녹 루빈슈타인의 성격은 딸을 잃고 난 이후 어디 북부 대공 뺨칠 만큼 찬바람이 쌩쌩 불었고, 체시어는 체시어대로 원체 무뚝뚝했으니까.

하지만 알다시피, 에녹 루빈슈타인은 뼛속까지 차가운 캐릭터가 아니다.

살갑진 못했어도 체시어에게 항상 신경을 쓰고 있었고 부모의 정을 못 느껴 본 그에게 서툴게나마 진짜 아빠가 되어주려 했다.

「“축제.”

“…예?”

“축제 한다고. 밖에.”

“아, 예.”

“…….”

“…….”

“…나가자.”

“예?”」

“푸흐흐흐.”

지금과는 180도 다른 아빠와 말수 없는 체시어의 원작 속 대화를 떠올리던 나는 웃고 말았다.

“공주야! 저거 완전 귀엽다! 저거 쓸까? 어때?”

“우아! 나 토끼! 토끼!”

우리는 동물 머리띠를 파는 가판대에서 머리띠를 하나씩 사서 쓰고 다시 걸었다.

나는 토끼, 체시어는 표범, 아빠는 곰돌이였다.

설탕을 듬뿍 묻힌 과일 꼬치도 먹고 광대 마술도 구경하니 금세 시간이 흘렀다.

“우히히. 너무 재밌당. 기분 최고야.”

“재밌어, 공주?”

“응응! 체시어, 너도 재밌지?”

내 옆에서 뺨에 하트 모양 페이스페인팅을 하고 걷고 있던 체시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히히.”

그때였다.

왜인지 앞쪽이 웅성거리는 듯하더니 제복 차림의 치안대원 여섯 명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 선 흑발의 미남자는….

‘악시온 삼촌이잖아?’

간만에 보는 얼굴.

등장하자마자 제임스 브라운 씨에게 부지깽이로 얻어맞았던 성기사단장 악시온 삼촌이었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서로를 발견했다.

아빠의 모습을 본 악시온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어라, 단장님 아니십니까. 수고가 많으십니다?”

아빠가 능글맞게 인사하자 뒤에 서 있던 치안대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원 한 명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이, 이런 건방진 놈이 다 있나? 이분이 누구신지 모르는 거냐?”

“그만.”

악시온이 대원을 물리고 나를 힐끔 내려다봤다.

“안녕하세요!”

“…….”

몰래 축제를 구경하러 나온 우리 부녀를 알아봤는지 악시온은 푹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내, 친구다.”

“예? 친구요?”

“됐고. 너. 체통 없이 평민 거주지역에는 왜 돌아다니는 거지? 얼굴 팔리기 전에 맘껏 즐기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단장님이야말로 바쁘신 분이 무슨 치안 관리까지 하러 나오셨습니까?”

“그런 거 아냐. 그냥 개인적으로 조사하고 있는 일이 있어서.”

“조사?”

악시온이 피곤한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요새 평민 거주지역에서 아동 실종 신고가 치안대로 자주 들어온다고 하더군. 직접 알아보려고 나왔다.”

“뭐?”

아빠의 표정이 구겨졌다.

‘흐음, 평민들 범죄 신고만큼 의미 없는 게 없는데….’

나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생각했다.

평민 거주지역은 그야말로 무법 세계나 다름없었다.

범죄를 제국법으로 다스리는 것은, 귀족이 관련되었을 때뿐.

평민들이 폭행을 당했네, 실종이 되었네 치안대에 백날 신고해 봐야 그것을 조사하지는 않는다.

‘역시 멋진 삼촌이네. 악시온은.’

자기 권력을 개인적으로 움직여 평민들 범죄 사건을 조사해 주는 귀족이라니.

이 몹쓸 세계관에서는 유니콘 같은 존재라 할 수 있겠다.

‘뭐, 이 정도로 정의로운 사람이라야 우리 아빠의 최측근이 될 수 있는 거지.’

생각하는 사이 대화를 마친 악시온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제발 얼굴 팔릴 일 하지 말고 조용히 놀다 들어가라. 복귀식이 내일모레다.”

“잔소리는. 알아서 할 거야. 수고.”

“삼촌!”

나는 악시온을 불렀다. 그가 멈칫하고는 돌아봤다.

달려간 나는, 아빠가 사 준 박하사탕 하나를 가방에서 꺼내 악시온의 손에 쥐여주었다.

“…뭐야.”

“시원한 맛 나는 사탕이에요. 먹고 힘내세요.”

“…….”

“그럼 안뇽!”

나는 멍하니 선 악시온을 두고 다시 아빠에게로 돌아왔다.

그렇게 아빠 손을 잡고 또 걷기 시작하는데 저 앞에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 있었다.

“자, 1등 상품이 무려 ‘라라 공주 구두’! 참가비는 단돈 5천 테르! 사랑하는 따님을 위해 지금 바로 참가하십시오!”

사회자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무대 위에는 큰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아빠랑 나랑>

경품이 걸린 이벤트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1등 상품이 무려 라라 공주 구두라니.

‘여자애들 난리 나겠네.’

<라라 공주의 모험>이라는 유명 동화가 대박을 치면서 라라 공주 굿즈는 제국 전역에 유행을 일으켰다.

라라 공주 마법봉, 라라 공주 콤팩트, 라라 공주 구두….

참고로 작년에 내가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지만, 너무 비싸서 결국 포기한 그 구두가 바로 라라 공주 구두였다.

“힘센 엄마들도 얼마든지 참가할 수 있으십니다! 2등 상품은 ‘토끼 친구 바니바니 잠옷’! 어른용과 아이용이 한 세트!”

“공주야.”

“아니야, 아빠. 괜찮아. 나 이제 라라 공주 안 좋아해.”

“이건 신의 계시야.”

“아니, 괜찮다니까 그러네?”

아빠는 냉큼 나와 체시어의 손을 잡고 무대로 올라갔다.

무대에는 이미 열 팀은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부모님 손을 잡고 올라와 있었다.

“앗, 마지막 참가자가 되시려나요? 이름이?”

“제임스 브라운입니다.”

“제임스 브라운 씨. 그런데….”

참가자 명단에 아빠의 이름을 쓰던 사회자가 체시어를 가리켰다.

“<아빠랑 나랑>은 어린이들을 위한 행사! 아드님을 섭섭하게 만들 순 없죠? 행사 원칙상 오늘 데리고 나오신 자녀분들이 전부 참가해야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네에?”

나는 인상을 썼다.

힘센 엄마도 참가하라느니 뭐니 하는 걸 보면, 분명히 아이들을 안고 앉았다 일어나기나 코끼리 코 돌기 같은 걸 시킬 게 뻔해 보이는데….

“두 명 안으면 울 아빠가 불리하잖아요!”

“어이쿠, 어쩔 수 없어요. 꼬마 공주님. 원칙이라서요.”

체시어가 눈치를 보다 끼어들었다.

“저기요. 저는 아들이 아니고….”

“에이, 쉽지!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마! 아빠가 다 이겨!”

“끄악!”

“아.”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가슴을 텅텅 친 아빠가 나를 목말 태우고 체시어를 팔에 앉혔다.

…이거 진짜 괜찮은 걸까?

라라 공주 구두에는 흥미 없지만 그래도 승부욕이 발동한 나는 경쟁자들을 재빨리 살폈다.

그때.

쿵, 쿵, 쿵.

웬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가 나더니 내 위로 그늘이 졌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헐.’

짙은 주황색 턱수염이 숭숭 난 거구의 아저씨가 보였다.

“허허. 젊은 양반이 귀여운 남매를 데리고 나왔네. 보기 좋구먼. 우리 한번 재밌는 시합 해 보자고요.”

“오오. 덩치가 엄청 좋으시네요.”

2m, 아니, 무슨 3m에 가까운 듯한 키. 쫙 붙는 검은색 민소매 밖으로는 울 아빠의 얼굴만 한 근육질의 팔뚝이 우락부락함을 뽐내고 있었다.

저 주먹에 한 대 맞으면 최소 사망!

나는 악수를 나누는 두 남자의 손 크기 차이를 보며 경악했다.

‘마동X이야, 뭐야….’

이 아저씨를 어떻게 이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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