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함할 덩치와 달리 아저씨 품에 안긴 여자애는 깡마른 데다가 키도 작았다.
‘이건 불공평해!’
아무리 울 아빠가 주인공이라지만….
“자, 참가 팀은 전부 열한 팀! 여기 A부터 K까지 참가표 목걸이를 걸어 주시고요.”
마X석 뺨치는 아저씨는 J, 마지막에 참가한 아빠는 K였다.
나란히 서 있어서 그런지 내 승부욕이 더 불타올랐다.
아저씨 딸이 울 아빠를 보며 히죽 비웃는 걸 보니까 더.
“아빠! 나 라라 공주 구두 가져야겠어!”
“당연하지! 아빠만 믿어, 아빠만!”
아빠는 자신만만했다.
“참가 인원이 많으니 빠르게 떨어뜨려야겠죠? 자, 다섯 팀! 딱 다섯 팀이 남을 때까지 우리 아빠, 엄마들 힘차게 앉았다 일어서 주세요! 시~작!”
역시나 체력 싸움!
참가자들이 한 번 앉았다 일어설 때마다 사회자가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스물하나! 스물둘!”
“허허. 젊어서 그런가. 체력이 아주 좋구먼.”
“빌리 형님도 한 체력 하십니다?”
마X석 아저씨, 아니, 그새 아빠와 통성명까지 한 빌리 아저씨는 예상대로 강철 체력이었다.
다들 힘들어서 헉헉거리는데 아빠와 잡담을 나눌 여유까지 있는 걸 보면.
“지지 마, 아빠!”
“알았어, 공주!”
나는 제임스 씨의 갈색 머리를 꽉 붙잡고 열심히 응원했다.
“…서른일곱! 그만! 드디어 여섯 번째 탈락자가 나왔습니다! 이만 무대 아래로 내려가 주시고요. 자, 살아남은 다섯 팀은 가운데로 모여 주세요.”
아빠는 드디어 나와 체시어를 내려놓고 턱 밑에 흐른 땀을 닦으며 숨을 돌렸다.
“다음 스테이지도 똑같이 앉았다 일어서기로 진행됩니다! 하지만! 조금 난이도를 높여 볼까요? 우리 아빠들, 제자리에서 코끼리 코 열 바퀴를 돈 다음 자녀분들을 안아주세요! 시~작!”
딸에게 라라 공주 구두를 안겨 주겠다는 집념으로 제임스 브라운 씨는 열심히 코를 잡고 돌기 시작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겠지.
루빈슈타인 공작이 여기서 코끼리 코나 돌고 있다는 걸….
체시어는 제자리에서 팽글팽글 도는 아빠의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다가 내게 물었다.
“꼭 가져야겠어? 라라 뭐 어쩌고 그거.”
“후. 그런 건 아닌데 이미 우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어. 이젠 자존심 싸움이라구. 질 수 없어.”
“하아.”
열 바퀴를 다 돈 아빠가 어지러운지 고개를 세차게 한 번 털고 눈에 힘을 줬다.
“이리 와, 공주!”
아빠는 휘청이면서도 나를 목말 태우고 체시어를 팔에 앉혔다.
나는 타격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 빌리 아저씨를 힐끔 살피고는 아빠에게 귓속말했다.
“아빠, 어지럽지? 살짝 마법 쓰는 게 어때? 아무도 모를 텐데.”
“어허! 그게 무슨 소리야, 공주? 시합은 정정당당하게 해야지.”
“아휴.”
역시 정의감 빼면 시체인 주인공 에녹 루빈슈타인에게는 씨알도 안 먹힐 소리일 줄 알았다.
“허허.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그러다 몸살 나요, 젊은 양반!”
“하하. 걱정 마세요. 하나도 안 힘듭니다.”
비겁한 빌리 아저씨! 쌀 반 포대보다도 가벼울 것 같은 딸 한 명 안고서 여유 있는 척이라니!
나는 이를 갈며 빌리 아저씨를 노려보았다. 빌리 아저씨의 딸도 지지 않고 나를 째렸다.
“자, 그럼 두 팀 남을 때까지 앉았다 일어서기 가 보겠습니다! 시~작!”
사회자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축제가 한창인 평민 거주지역을 순찰하는 악시온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아동 실종 사건이 기승을 부리는 와중에 하필이면 어린이의 날 축제 기간이라니.
범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분명 어딘가에서 입맛 다시고 있겠군.”
한 달 만에 무려 스무 명이 넘는 평민 아이들이 실종됐다.
공통점은 고운 피부나 곱상한 얼굴. 귀족가에 팔아넘기면 돈깨나 챙길 수 있을 터였다.
바스락.
악시온이 용의자의 몽타주를 펼쳐 보며 인상을 썼다.
“이렇게 생긴 놈을….”
왼쪽 눈을 가로질러 난 험악한 흉터.
잡히는 건 시간문제일 정도로 특징 있는 인상이었다.
“…아직까지 못 봤다고?”
날카로운 질문에 치안대원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한 대원이 소심히 입을 열었다.
“그…. 못 본 건 아닙니다만.”
“그럼.”
대원들은 대답하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봤다.
악시온은 그 모습에 조소했다.
뻔했다. 뒷돈을 받아먹고 눈감아주었겠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평민 거주지역에서는 특별할 일도 아니었다.
악시온은 제 시선을 피하는 치안대원들을 매섭게 노려보며 탁, 몽타주를 접었다.
“내 권한으로 처벌할 테니,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이놈 잡아들여. 실패하면 너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예, 예! 공작 각하!”
“예!”
치안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사라졌다.
악시온도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멈칫, 손에 쥔 사탕을 내려다보았다.
“시원한 맛 나는 사탕이에요. 먹고 힘내세요.”
제도에서 지내는 동안 잘 먹고 잘 컸는지 리리스는 처음 봤을 때보다 얼굴색이 훨씬 좋았다.
생긴 것은 또 잘난 제 아버지를 어찌나 닮았는지….
꼭 말하고 걸어 다니는 인형 같았다.
‘그래서 다들 애를 낳나.’
무심코 생각하던 악시온이 사탕 껍질을 까 입에 넣었다.
그러다 문득, 발 디딜 틈도 없이 빽빽하고 시끄러운 축제 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혹시.’
곱상하고 귀해 보이는 아이들이 표적이라면, 리리스는 노려지기 딱 좋았다.
하지만….
‘늙었나. 나도 참. 별걱정을 다 하는군.’
정말이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감히 시도라도 했다간, 극성인 애 아빠에게 걸려 뼈도 못 추릴 테니.
악시온은 리리스를 인질로 삼았다가 지옥 문턱을 구경하고 돌아왔던 것을 떠올리며 괜한 걱정을 털어냈다.
* * *
“드디어 최후의 2인이 남았군요! 빌리 아빠와 제임스 아빠! 다들 박수로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결승전.
비 오듯 땀이 쏟아지는데도 생글생글 웃음을 잃지 않는 에녹을 보며, 관중석에 내려와 대기하고 있던 체시어는 한숨을 삼켰다.
다행히도 결승전은 체력과 무관했다.
“결승전 게임 룰은 간단합니다! 자, 여기 보이는 다섯 개의 나무 상자 안에 다섯 명의 어린이들이 들어가 있는데요. 제가, 아빠와 딸이 아니면 맞힐 수 없는 질문을 드릴 겁니다!”
사회자가 웃으며 덧붙였다.
“딸의 답을 듣고, 아빠들은 어느 상자에 내 딸이 있나 맞혀 주시면 됩니다! 참고로 아이들 전부 헬륨 가스를 마셔서 목소리로는 알아맞힐 수 없어요!”
에녹이 입을 가린 채 악당처럼 웃었다.
“크큭…. 이거, 이거. 제가 이긴 것 같습니다. 울 공주는 저에 대해 모르는 게 없어서.”
빌리가 자신만만한 에녹을 비웃었다.
“후후. 과연 그렇게 쉬울까? 우리 에밀리도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데?”
두 아빠 사이에 파직, 스파크가 튀었다.
“나머지 상자에는 앞서 탈락한 어린이들이 들어가 있답니다. 자, 그럼 바로 첫 번째 문제 나가겠습니다! 하나, 둘, 셋! 하면 대답해 주세요!”
사회자가 들고 있던 종이를 휘적휘적 넘기더니 소리쳤다.
“우리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에녹은 풉 웃음을 터뜨렸다.
‘울 공주랑 똑같은 거지. 토마토소스를 끼얹은 꼬꼬알 스크램블!’
“하나, 둘, 셋!”
“흑맥주!”
“감자 수프!”
“당근 퓨레!”
“닭가슴살 수프!”
“소시지!”
띠용.
에녹이 삐끗했다.
옆에서 껄껄 웃은 빌리가 손을 들었다.
“두 번째 질문까지 안 가도 바로 알겠는데 골라도 되남?”
“예, 얼마든지요!”
“잠깐.”
성큼성큼 걸어가는 빌리의 팔을 에녹이 붙잡았다.
“형님.”
“왜에?”
“질문 따악 한 개만 더 들읍시다. 그래도 우리 사이에 같이 땀 흘린 전우애가 있는데 섭섭하게.”
“푸하하하! 아, 이 친구 참 웃기는 친구일세! 좋아, 내가 함 봐줬다! 사회자! 문제 하나 더 내!”
“어이쿠, 너그러우셔라.”
에녹이 한숨을 쉬며 상자 안에 있을 리리스를 향해 말했다.
“공주야. 아빠 좀 서운하려 그래? 아니, 어떻게 이런 걸 틀려…. 다음번엔 잘하자?”
“그럼 바로 다음 질문 가겠습니다! 우리 아빠의 발 사이즈는?!”
사회자가 소리쳤다.
‘캬! 이건 좀 어려운 문제지만, 울 딸은 못 맞힐 수가 없지!’
에녹은 안도했다.
“하나, 둘, 셋!”
“14펠리!”
“…모르겠어여.”
“몰라여!”
“모르는데?”
“4펠리!”
또 띠용.
에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공주야?”
발 사이즈가 14펠리나 되는 건 안 봐도 빌리일 테고 4펠리를 외친 건 아마도 엄마와 나온 아이일 테다.
아빠 발 사이즈도 모르다니!
같이 신발 가게 많이 가 봤으면서!
“끅. 끅. 크하하하!”
“후우.”
완벽한 패배다. 빌리가 성큼성큼 다가가 첫 번째 상자를 열자 그의 딸 에밀리가 튀어나왔다.
“우와, 아빠아!”
“우리 딸, 잘했어!”
훈훈한 부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에녹이 가운데 세 상자 앞에서 망설였다.
‘살짝만 능력을 써 볼까?’
마나를 흘려 리리스의 기척을 찾아 볼까 하던 에녹은 곧 고개를 저었다.
‘정정당당하게 해야지….’
결국 그는 두 번째 상자를 열었다.
당연히도 처음 보는 남자아이가 튀어나왔다.
“어이쿠….”
씁쓸하게 웃으며 돌아서자 한껏 코가 올라간 빌리가 보였다.
“축하합니다! 오늘의 우승자는 빌리 블랙 씨와 에밀리 블랙 양! 여기 라라 공주 구두 가져가세요!”
“허허.”
빌리가 에녹에게 다가와 악수를 건넸다.
“재밌었어, 젊은 양반. 나 요 옆 골목에서 펍을 운영하고 있거든. 언제 한번 놀러 오라고. 시원한 맥주 한잔 대접하지.”
“예, 형님. 저도 재밌었습니다. 나중에 놀러 갈게요.”
빌리와 구경꾼들이 떠나고 왁자지껄했던 무대가 조용해졌다.
“공주야, 화났어?”
에녹은 터덜터덜 걸어가 세 번째 상자를 열었다.
낯선 아이가 웃으며 제 부모를 찾으러 달려 나갔다.
“하아. 솔직히 이건 아빠 잘못이라고는 할 수가 없는 게…. 어떻게 그 쉬운 문제들을 하나도 못 맞혀? 진짜 아빠 좀 섭섭하다….”
네 번째 상자를 열자 주근깨가 있는 여자아이가 나왔다.
‘어?’
에녹이 멈칫했다.
마지막에 있는 아이는 리리스가 아닐 텐데?
그때.
뒤에 있던 체시어가 인상을 찌푸린 채 달려오더니 마지막 상자를 다급히 열어젖혔다.
나온 것은 키가 작은 남자아이.
에녹이 멍해졌다.
리리스가 아무 데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