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빨리 정신을 차린 에녹이 무대를 정리하고 내려가려는 사회자를 붙잡았다.
“이봐.”
“뭡니까?”
“뭐긴 뭐야. 내 딸이 없잖아.”
“예?”
사회자는 무대 위를 힐끔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딸이 없다뇨? 저기 안에 없었나요?”
“지금 장난하나? 계속 같이 지켜보고 있어 놓곤?”
“글쎄요? 전 댁의 따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능청스럽게 말하는 모습에 에녹은 할 말을 잃었다.
“이것 좀 놔주시겠어요?”
“…….”
잡힌 팔목을 털어내고 떠나려는 사회자를 돌려세운 에녹이 그의 멱살을 붙들었다.
“장난하지 말고 내 딸 데려와.”
“허어. 이 사람이 미쳤나. 어디 딴 데서 딸을 잃어버려 놓고 여기 와서 분풀이야.”
“뭐?”
“여어, 가드! 가드!”
사회자가 허공으로 휙휙 손짓하며 신호하자 장정 둘이 에녹을 제압하며 달라붙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황당해하던 에녹의 머릿속에 순간 악시온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실종이라기보단 납치에 가깝지. 수법이 대담해. 어차피 평민들은 백날 범죄 신고를 해 봐야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니.”
“치안대의 눈치도 안 보고 아이들을 납치한다고?”
“치안대가 유명무실해진 지는 좀 됐다. 네가 떠나 있던 7년 동안 여긴 더 좀먹었거든.”
같은 제도 안에서, 귀족과 평민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평민들의 공간은 그야말로 무법지대 그 자체.
에녹은 허탈하게 웃으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떠나지 않고 있던 참가자들 몇이 소란에 벌벌 떨고 있었다.
분명 그들도 이 황당한 상황을 전부 지켜보았다.
그럼에도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현실을 알고 있는지 그저 자기 자식들은 무사하다는 데에만 안도하고 있었다.
‘하.’
만약 자신이 평민이고 비능력자라면….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눈뜬장님처럼 그저 딸이 사라지는 걸 지켜보고, 누가 봐도 딸을 빼돌린 듯한 범죄자들을 추궁할 수도 없을 테지.
‘여전하네. 이 빌어먹을 나라는.’
헛웃음을 터뜨린 에녹이 멀어져 가는 사회자에게로 다가갔다.
가드들이 그를 막으려 손을 뻗었지만,
“으악!”
우두둑, 뼈가 꺾이는 소리와 함께 팔이 돌아갔다.
표정 없는 얼굴로 단숨에 가드 둘을 제압한 에녹이 다가오자 사회자가 주춤거렸다.
“이, 이봐. 지금 뭐 하는 거야? 어? 치안대 불러? 어? 이게 무슨 짓이…!”
다시 멱살을 붙잡힌 사회자가 흠칫 목을 밀어 넣었다.
에녹이 날 선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내 딸, 어디 있어.”
“모른…!”
그 순간.
이를 악문 에녹이 한 손으로 흐트러진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사르륵,
끝에서부터 머리칼이 은빛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푸른 눈이 번뜩였다.
“어디 있냐고.”
“…….”
사회자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능력자잖아….’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세 번 묻게 하면 죽을지도 모른다.
“죄, 죄송합니다. 마, 마, 말할게요.”
* * *
문제! 자타공인 세계관 최강자, 먼치킨 주인공을 아빠로 둔 딸이 납치당할 수도 있을까?
정답, 있다!
‘이게 되네.’
어둡고 좁은 방.
나는 소동물용 우리 같은 곳에 갇혀있었다.
무대 뒤에서 결승전 게임을 준비하다가 난데없이 포대 자루에 담겨 옮겨진 곳이었다.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보는 눈만 수십 개인 제도 한복판에서 대놓고 애를 빼돌릴 줄.
‘체시어는 괜찮겠지? 아빠랑 있으니깐.’
그때.
“이 기집애 봐라. 울지도 않네.”
무릎을 끌어안고 얌전히 앉아 있는 나를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던 남자가 말했다.
남자의 왼쪽 눈에는 세로로 길게 가로지른 칼자국이 나 있었다.
“야, 안 무서워?”
남자는 혀를 빼더니 들고 있던 단도를 아래에서 위로 쓱 핥았다.
어우, 드러. 아마도 내가 겁먹었으면 하고 바라는 모양이었다.
“무서워요…. 집에 보내 주세요.”
“크하하하! 안 돼, 안 돼.”
남자가 칼로 내가 갇힌 철창을 툭툭, 쳤다.
“너 이제 집에 영원히 못 가.”
“왜, 왜요?”
“딴 데서 살게 될 거야. 그런데 너무 원망은 하지 마라. 나한테 고마워할 날이 올걸.”
말하며, 남자는 담배를 물고 주머니에서 지폐 뭉치를 꺼내 파라락 세기 시작했다.
“지금 네가 사는 집보다 훨씬 크고 좋은 데로 보내 줄 거거든. 귀족 나리들이 맛있는 것도 주시고 잔뜩 귀여워해 주실 테니까 상심은 마.”
…인신매매범이구나. 곱상한 평민 아이들을 빼돌려다가 귀족에게 비싼 값에 팔아치우는 모양이었다.
‘그럼 악시온 삼촌이 조사하고 있던 그 아동 실종 사건도 이 남자가 범인인 걸까?’
그럴 확률이 높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납치 감금이라니, 이게 가능해?
‘응, 여기서는 가능하지….’
보통의 상황이라면, 부모는 아이가 난데없이 증발했다며 경찰에 신고할 것이다.
그러면 경찰은 관련되어있을 법한 이들을 잡아들여 조사하겠지.
하지만.
이 미친 나라의 평민들은, 이런 일반적인 조치를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이 정신 나간 세계관에서 비능력자들, 그러니까 평민들의 위치는 딱 그거거든.’
길고양이 두 마리가 다투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공격하고 새끼를 빼앗았다.
그 상황에서 경찰이 이 길고양이 두 마리를 불러 중재하거나, 원만한 합의에 실패한 두 길고양이가 법정까지 가 재판을 하게 될 일은 없지 않은가.
딱, 그와 같은 이치인 것이다.
‘에휴. 내가 진짜 평민의 딸이었다면 여기서 무사히 나갈 방법은 없었겠지?’
그 사실이 새삼 소름 돋았다.
“야, 크렉!”
그때 누군가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접힌 턱살과 산만 한 배. 몸을 가누기 힘들어 보일 정도로 뚱뚱한 남자였다.
“시간 없어! 우리 지금 빨리 튀어야 해!”
“왜, 뭔데?”
“성기사단장이 떴다더라고. 요즘 평민 거주지역이 하도 시끄러우니 자기 권한으로 우릴 직접 잡아들일 생각인가 봐.”
“뭣? 리브르 공작 말이야?”
남자, 크렉이 인상을 썼다.
“어. 대체 왜 공작씩이나 되는 자가 이 바닥에 신경을 쓰지? 그렇게 할 일이 없나?”
“내 말이. 아, 이거 귀찮게 됐네. 블리먼 자작에게 이 애를 넘겨야 하는데. 천만 테르는 더 받을 수 있을 거란 말이야.”
크렉이 나를 쳐다보며 입술을 물었다.
“안 돼. 시간 없어. 언제 자작가까지 가? 네 얼굴도 팔렸고 하니, 잠잠해질 때까지는 여길 떠나 있자. 배 불러 놨으니 바로 항구로 가자고.”
뭐라고? 밀항이라고?
어차피 아빠가 곧 나를 구하러 올 테니 그냥 다치지 않고 얌전히 기다리는 게 상책이라 생각했는데.
꽁지에 불붙은 이놈들이, 아빠가 오기 전에 나까지 데리고 밀항을 시도한다면 큰일이었다.
“저, 저… 아저씨!”
다급해진 나는 철창을 붙잡았다.
“얘 어떡해, 그럼?”
크렉이 묻자, 급히 짐을 챙기던 뚱뚱한 남자가 나를 보았다.
“와, 엄청 예쁘게 생겼잖아? 죽이거나 버리고 가기엔 좀 아까우니 같이 배에 태우자. 나가서 팔아치우지, 뭐.”
안 돼!
지금 여기서 시간을 벌기 위해 7살 응애 애기 리리스가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겠나. 빌자.
“저, 저 그냥 보내주시면 안 돼요?”
“뭐? 내가 왜?”
“보내주셔야 할걸요. 왜냐면 울 아빠는…!”
아빠 이름을 팔아 보려고 했던 나는 멈칫했다.
가만 있자.
여기서 내가 에녹 루빈슈타인의 딸이라고 밝힌다면?
일단 믿을지도 미지수지만, 혹시 믿는대도 문제였다.
나에게 이미 얼굴이 노출된 상황. 감히 귀족을 건드린 이들에게는 살아나갈 방도가 없었다.
다친 데 없이 곱게 풀어주고 싹싹 빌어도 무조건 죽음!
그리고 이들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 테니….
‘얘네가 목숨이라도 부지하려면, 오히려 쥐도 새도 모르게 날 죽이거나 무조건 숨겨서 빼돌리려고 하겠지?’
“뭐? 네 아빠가 뭐?”
입을 다문 나를 보고 크렉이 킬킬 웃었다.
“우, 울 아빠는 그니까….”
“뭐어어.”
“…아주아주 무서운 사람이에요.”
“푸하하하!”
나는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아빠, 언제 와….’
한없이 무력한 7살 어린이는 그저 아빠를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밀항 준비를 하며 정신없이 짐을 싸는 두 남자를 보고 벌벌 떨었다.
‘이러다 진짜 얘네가 아빠 오기 전에 도망치면 어떡하지?’
처음에 난데없이 납치됐을 땐 조금 무섭긴 했어도 그뿐이었다.
아무렴 울 아빠가, 세계관 최강자이며 주인공인 사람이 날 구하지 못하겠나?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막상 아빠가 구하러 올 시간도 없이 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무, 무서워 죽겠어. 어떡해.’
심장이 쿵쿵 뛰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뿌예지는 눈가를 쓱쓱 닦았다.
“야! 다 챙겼으면 얼른 가자! 뒷문으로 조용히 나가게!”
뚱뚱한 남자가 소리치자 크렉이 내가 들린 철창을 캐리어 들듯 번쩍 집어 들었다.
“자, 잠깐만요! 아저씨이….”
그때.
“깜짝아, X발.”
짐을 챙겨 먼저 나서던 뚱뚱한 남자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우뚝 멈춰 섰다.
남자를 가로막은 누군가.
“뭐야, 이 새낀?”
아빠였다.
멀리서 아빠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빠아아…. 으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