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본모습으로 돌아와 있는 아빠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뭐? 아빠라고?”
“큭큭. 꼬맹이가 방금 말했던 그 아주아주 무서운 아빠인가 본데?”
크렉이 조롱했다.
둘은 아직 제도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아빠를 알아보지 못했다.
“뭐, 뭐. 따님 구하러 오셨쎄여? 뭔 자신감이람? 우리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돌려줄 줄 아냐? 그르니까 이쁜 딸 간수 좀 잘하지 그랬어?”
킬킬거리던 뚱보가 바지 뒷주머니에서 몰래 단도를 빼고 있었다.
“아, 아빠아아! 조심해!”
이윽고 그의 팔이 둔한 몸과 달리 제법 날렵하게 휘둘러졌다.
탁.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 아빠는 한 손으로 그의 팔목을 제압했다.
“뭐, 뭐…. 억!”
그리고는 그대로 당겨 문 밖으로 끌어냈다.
“으아아악!”
팔이 꺾인 뚱보의 뒷목을 잡은 아빠가 그대로 그를 옆으로 밀어 넘어뜨렸다.
퍽,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났지만.
‘으.’
다행히 문 밖에서 벌어진 처참한 모습은 내게 안 보였다.
“…….”
아빠가 저벅저벅 방 안으로 들어오자 크렉은 나를 던지듯 내려두고 칼을 잡았다.
“너 좀 치는구나?”
“…….”
“그런데 안됐군. 저 둔한 놈은 몰라도 나는 힘들 거다. 이래 봬도 내가 평생 칼밥만 먹고 살아온 외길인생이거든.”
크렉은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양손에 칼을 쥐고 아빠에게 날듯이 달려들었다.
탁, 탁!
“어….”
그러나 칼이 아빠에게 닿기도 전에 크렉은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정확히 양쪽 팔목을 가격당하고 바로 뼈가 부러진 그는 주저앉아 버렸다.
“하, 으아, 아…. 뭐, 뭐야. 이게.”
아빠는 고통스러워하는 크렉의 목을 잡아 그대로 바닥에 메다꽂더니 위로 올라탔다.
“컥!”
나는 그때.
아빠의 눈을 보고 눈물이 쏙 멎었다.
‘아빠 무서워.’
살기….
제논에서 성기사단들과 맞붙었을 때도, 아빠는 저런 눈을 하고 있진 않았다.
아마도 은연중에, 기사들은 나를 진짜로 해치지 않을 거란 생각을 했을 테니.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아빠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내가 어떻게 됐을지 모를 상황이었다.
“…….”
크렉의 얼굴에 내지르려는지, 주먹 쥔 아빠의 팔이 허공으로 크게 솟았다.
나는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하지만 무서운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조심히 눈을 가린 손을 내려 보니, 아빠는 그 상태 그대로 멈춰서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분노를 삼키려는지 한참 몸을 떨던 아빠는 곧 손바닥으로 크렉의 이마를 눌렀다.
파직,
소리와 함께 크렉이 몸을 부르르 떨고는 기절했다.
“아, 아빠….”
아빠는 일어나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걸음이 조금 비틀거렸다. 무릎을 꿇고 철창문을 열려는 손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텅,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후우.”
아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화를 내는 것보다 화를 참으려는 모습이 더 무서워 보였다.
“아빠아….”
“미안해, 공주야.”
콰직! 약간의 힘을 흘려 넣으니 자물쇠가 굉음을 내며 부서졌다.
이윽고 끼이익, 열린 철창 안으로 아빠가 팔을 뻗었다.
“이리 와.”
* * *
“아빠, 미안해…. 내가 괜히 축제 구경하러 나오자구 해서….”
품에 안자마자 세상이 떠나가라 엉엉 울던 딸은 그 말을 남기고 실신하듯 잠들어 버렸다.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이 어린아이가 왜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걸까.
미안한 건 이런 몹쓸 곳에서 살게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고 어른들인데.
“아니야, 공주야. 아빠가 미안해. 아빠가….”
이미 큰 소란을 일으켜 의미는 없었지만, 에녹은 다시 본모습을 감추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뜻밖의 얼굴이 있었다.
악시온.
그 옆에 체시어까지.
‘녀석, 위험하게. 악시온을 찾으러 갔던 건가.’
사회자가 범인들의 본거지를 불자, 체시어는 뒤도 안 돌아보고 어딘가로 달려갔었다.
체시어가 걱정되었지만, 시간이 촉박해 결국 리리스에게로 갔던 에녹이었다.
“안에 몇 명 있지?”
“둘.”
악시온이 묻자, 짧게 답한 에녹이 체시어를 내려다보았다.
“걱정했잖아. 위험한데 혼자 돌아다니면 어떡해. 그리고 미안하다. 리리스를 구하는 게 급해서….”
체시어의 표정이 묘해졌다.
혼자 뛰쳐나간 자신을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뜻인가.
역시,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아뇨. 제가 죄송해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요.”
“…? 그건 또 무슨 소리냐. 하아, 우리 집 애들은 왜 이렇게 나를 못난 어른으로 만드는지 모르겠네.”
“알면 됐다.”
한숨 쉬는 에녹에게 악시온이 핀잔줬다.
“악시온. 그건 그렇고 이놈들 조직이었다. 나머지는….”
“걱정하지 마라. 웬 남자가 다 잡아 놨더군. 저기.”
악시온이 턱짓했다.
쳐다본 에녹이 놀랐다.
흠씬 두들겨 맞아 기절해 버린 조직원 잔당들 앞에서 손을 탁탁 털고 있는 빌리가 보였다.
“형님, 귀가 안 하셨습니까?”
다가가자 빌리가 반갑게 맞았다.
“오, 젊은 양반. 어디 다친 덴 없고? 나는 소란스럽길래 돌아왔지. 여, 거꾸로 묶어서 열흘 밤낮 후려 패도 모자랄 놈들이라길래 내가 간만에 실력 발휘해 봤어.”
“이야, 역시 근육이 범상치 않으시더라니.”
“껄껄!! 공주님은 괜찮으신가?”
빌리가 품에 안긴 리리스를 보며 걱정했다.
“예. 지쳤는지 잠들었어요.”
“아이고.”
빌리가 쯧쯧 혀를 차며 머리를 긁적였다.
“세상이 참 말세야, 말세…. 언제쯤 우리 애들이 맘 편히 돌아다닐 수 있을지.”
“…그러게요.”
“아, 맞다! 요거!”
빌리가 내민 것은….
라라 공주 구두였다.
“이걸 왜.”
“허허, 정정당당한 시합이 아니었잖아. 우리 에밀리는 내가 돈 벌어서 하나 사 주면 돼.”
“하하….”
“오늘 고생했네, 젊은 양반. 내 펍에 한번 꼭 들르라고! 같이 맥주 한잔하게!”
에녹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 새벽.
제도의 소동은 곧바로 황제에게 보고되었다.
“뭐라고?”
보좌관의 말이 끝나자 황제가 이를 갈았다.
“버러지들이 감히…. 그게 뭔지 알고 건드려.”
에녹의 딸은, 7년이나 공을 들여 겨우 만든 목줄이었다.
까딱 잘못됐으면 어쩔 뻔했나.
“그래서.”
“악시온 리브르가 안 그래도 개인적으로 조사 중이었다 합니다. 관련된 자들 전부 잡아들였고 아마 그의 권한으로 처벌할 듯합니다.”
“아아, 그러지 말고.”
황제가 손을 휘휘 저었다.
“황실에서 처리하는 거로 하지.”
“예?”
“내 명령으로 말이야. 버러지들은 극형에 처해라. 비슷한 짓거리는 엄두도 못 내도록. 그리고….”
황제가 턱을 매만지며 덧붙였다.
“악시온 선에서는 귀족들까지 건드릴 순 없겠지. 거기 관련된 귀족들까지 찾아 한꺼번에 처벌해.”
보좌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귀족들에게는 죄가 없는데요?”
평민들은 길바닥에 돌아다니는 주인 없는 들개들이 아닌가.
이번 사건에서 귀족들은 그저 돈을 주고 예쁘장한 어린 들개 몇 마리를 사들인 것뿐이었다.
“왜 굳이 폐하의 이름으로 귀족들이 불만을 가질 일을 하려 하시는지요?”
보좌관은 당황했다.
황제에게, 비능력자와 평민들은 제국민이 아니었다.
굳이 칙령을 내려 황제 자신의 이름으로 평민들을 처벌하라는 명도 이상했지만….
귀족들까지 잡아넣으라는 것은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 고지식하고 정의로운 에녹 경이 이런 걸 좋아하거든. 화가 많이 났을 텐데….”
“…….”
“주인 된 자로서, 이런 성의 정도는 보여 줘야지.”
황제가 뱀 같은 웃음을 지었다.
* * *
깜빡깜빡.
창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떴더니 아침이었다.
‘헐.’
왜 아침이지? 생각해 보니, 아빠 품에 안긴 이후로 기억이 없었다.
긴장이 풀려 그런지 바로 잠에 든 모양이었다.
“아가씨이이익!”
“일어나셨어요? 정신이 드셨어요? 우리 아가씨 어쩌면 좋아? 어디 아픈 데는 없으시고요?”
몸을 일으키자마자 쥰과 제티가 벼락같이 달려들었다.
“아빠는…. 아빠랑 체시어는요? 체시어 어디 안 다쳤어요?”
“공작님은 방금까지 계시다가 저희 오고 나서 나가셨어요. 아마 어제 일을 수습하러 가셨을걸요.”
“체시어도 무사하구요. 그 애도 한숨도 못 자고 아가씨 옆에 있었는데…. 제발 눈 좀 붙이라고 등 떠밀었더니 겨우 나갔어요.”
“아, 그랬구나.”
나는 안도했다.
그도 잠시.
어제의 사고를 다 아는 것 같은 둘의 반응에 당황했다.
“어, 언니들. 그런데 어제 저한테 무슨 일 있었는지 다 알아요? 설마 할아버지도?”
혹시나 할아버지 귀에도 들어갔으면 큰일인데.
몰래 축제를 보러 나간 것도 모자라 사고까지 치고 온 걸 알면 아빠는 할아버지한테 탈탈 털릴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털렸을지도….
“어, 음.”
“아, 그게.”
왠지 제티와 쥰은 서로 눈치를 봤다.
그러다 제티가 조용히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큰 주인님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세요. 아니, 이 집안 사람들 전부 어제 아가씨가 몰래 나가신 것도 몰라요.”
“네. 저희는, 아가씨에게 사고가 생겼다는 걸, 으음…. 사장님? 네, 사장님이 말해 주셔서 알았고요.”
“사장님이요? 아아!”
리코를 말하는구나. 나는 슬쩍 뺨을 긁으며 모른 척했다.
언니들의 정체를 알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대놓고 말하지는 않는 편이다.
나름 암묵적인 합의랄까?
“우리 아가씨, 씻으실까요?”
“넹넹.”
나는 따뜻한 세숫물로 얼굴을 씻겨 주는 제티의 손길을 받으며 물었다.
“그런데 리코, 아니, 사장님은 또 어떻게 아셨대요?”
“사장님이 어제 아가씨 놀러 나가시는 걸 무척 걱정하셨거든요. 요즘 제도에 아동 실종 사건이 많아서요.”
“아하, 그렇구나. 근데 나 어제 몰래 놀러 나갈 계획 언니들한테밖에 말 안 했는데?”
제티가 뜨끔하더니 웃었다.
“흠흠. 죄송해요. 이해해 주세요. 공작가 일원들 일거수일투족 보고하는 게 저희 임무잖아요.”
“으항항! 네에, 이해해요.”
“아무튼, 그래서 사장님이 아가씨 뒤에 위장 경호를 한 열 명쯤 붙이셨죠. 공작님이 같이 나가시긴 했지만, 혹시 또 모르니까요.”
“네에에에?”
아니, 뭐 그렇게까지? 놀란 나를 보고 쥰이 후후 웃었다.
“공작님이 아가씨를 못 구하실 분은 아니지만, 혹시나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고 해도 아가씨는 무사하셨을 거예요.”
“그르케까지 안 해 줘도 되는데 미안하게…. 글구 그런 거 붙이면 울 아빠 다 눈치채요.”
“오, 전혀요. 저희 <붉은 매>는….”
“얘, 쥰!”
제티가 쥰에게 눈치를 주자, 쥰이 하하 웃으며 정정했다.
“…가 아니라 저희 동료들? 그래, 저희 동료들은 다 훈련받은 베테랑인걸요.”
“그래도 울 아빠 소드마스터인데? 막, 막… 누가 미행하면 다 느끼고 그러는데?”
쥰이 씨익 웃었다.
“미행은 하수들이나 하는 거죠. 아무리 공작님이래도 모르실걸요? 어제 저희 동료가 공작님이랑 악수도 하고 통성명도 했다던데요?”
“…네?”
뭔 소리람. 나는 눈을 깜빡깜빡하다가 이내 경악했다.
설마?
“비, 비, 빌리 아저씨?”
제티와 쥰이 까르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