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 시각.
리코는 제티와 쥰 자매가 전달해 준 리리스의 편지를 읽고 있었다.
여동생에게 약을 먹여야 하는 주기는 대체 어찌 꿰고 있는 것인지.
늦지 않게 다음 분량의 살바시온을 전해 주며 함께 온 편지였다.
[리코리코씨!
언니들한테 해독약 보내는 김에 처음 편지 써 봐요.
이 약이 필요했던 사람은 지금 어때요? 많이 나아졌나요?
나아졌으면 좋겠다….
괜찮아졌는지 답장 편지 보내줄 수 있어요?
귀찮으면 ○(똥그라미) 하나만
↓여기에 그려 주기]
귀여운 부탁에 리코가 픽 웃었다.
[아! 그리고 궁금한 게 있는데….
‘조제프 뤼트먼’ 남작을 아세요?
원래 제도에서 살던 귀족 아저씨인데요, 리코라면 알고 있을 것 같아서요.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혹시 그 아저씨가 어디 있는지 알면 알려 주세요.
근데 거래하려면 정보 내야 하죠……?
흠, 조만간 큰 거 하나 들고 찾아가겠음.
그때까지 건강하기☺♡♡]
옅은 웃음을 띤 채 삐뚤빼뚤한 글씨를 읽고 또 읽던 리코의 눈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조제프 뤼트먼’ 남작을 아세요?
조제프 뤼트먼.
약 2년 전까지 제도에서 활동했던 그의 화려한 수식어는 바로.
‘정치의 귀재.’
권력의 흐름을 읽는 눈, 인재를 고르는 용인술, 선전, 선동, 책략….
그 모든 정치적 역량이 정계에서 잔뼈 굵은 귀족들을 상회하는, 대단히 명석한 자였다.
‘대체 2년 전에 자취를 감춘 자를 어찌 알고 찾는 건지.’
진짜 뭐 하는 꼬맹이일까.
리코는 이제 리리스의 정체에 대해 추측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어이, 리코! 한잔하자고!”
텅!
굵은 팔뚝이 테이블 위에 흑맥주 잔을 올려놓았다.
<붉은 매>의 길드원, 빌리였다.
리코가 피식 웃으며 맥주잔을 기울였다.
“어제 수고 많았어.”
“수고는. 간만에 몹쓸 놈들 참교육해 줬더니 십 년 묵은 체증이 풀렸다. 껄껄…. 그나저나.”
빌리의 눈이 기대로 빛났다.
“선택한 거냐? 루빈슈타인 공작으로?”
“글쎄.”
리코는 아리송한 대답을 내놓았다.
“글쎄라니? 공작과 접선해 보려고 우리더러 그 집 공주님을 지키라고 한 거 아니었어?”
“그것보다는 내가 그 아가씨에게 도움받은 게 좀 있어서. 공작은 내가 직접 안 만나 봐서 사람이 어떤지는 모르겠고.”
“야, 말도 마라. 아주 딱이더라! 눈빛부터 그냥 사람이 선한 것이, 기대 이상이었다고!”
“그래?”
“솔직히 루빈슈타인 가문만 한 곳이 없었잖아. 이번에 공작이 돌아온 것도 신의 계시 아니겠냐.”
<붉은 매>는 찾고 있었다.
썩어빠진 제국에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자를.
하지만 쉽지 않았다.
추악한 권력에 물들지 않은, 힘 있는 능력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썩은 귀족을, 능력자들을 혐오하는 리코와 <붉은 매>였지만….
모순적이게도, 혁명의 칼이라도 뽑아 보려면 그 주체가 권력을 쥔 귀족이어야만 했다.
“털어서 먼지 안 난 데가 거기 말고 더 있어?”
“그건 맞지.”
리코는 사실 오래전부터 루빈슈타인을 눈여겨봤었다.
황실 다음가는 권력을 자랑하면서도, 빌리의 말대로 구린 구석 하나 없는 올곧은 가문이었다.
그런 와중에….
‘솔직히 놀랐지. 공녀가 날 먼저 찾아와서.’
정말 신의 계시라도 되는 걸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렵긴 할 거야.”
맥주잔을 기울이며 빌리가 쯧쯧 혀를 찼다.
“사람이 좋아 보이긴 하는데 또 욕심은 없어 보이더라고.”
“…….”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어디 혁명이란 게 무력만 가지고 되는 일이냐. 7년이나 자리 비운 통에 정계에는 연도 없고.”
리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정계에서 에녹 루빈슈타인의 입지는 마치 갓 태어난 신생아와도 같았다.
중앙 귀족들과 연도 없을뿐더러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워 권력의 흐름을 읽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런 에녹 루빈슈타인을 단시간에 각성하게 하려면….
‘잠깐. 설마.’
리코는 리리스의 편지를 다시 펼쳐 보았다.
‘조제프 뤼트먼’ 남작을 아세요?
이 타이밍에 리리스가, 조제프를 찾는 이유가 뭘까.
조제프 뤼트먼은, 지금 에녹 루빈슈타인에게 가장 필요한 책사였다.
‘의도가 있다 봐야겠지. 이 수상한 아가씨가 조제프를 찾아내 소꿉놀이하려는 건 아닐 테니까.’
리코는 리리스의 의도를 짐작해 보며 혀를 내둘렀다.
‘대체 이 꼬마 아가씨의 정체가 뭘까. 설마 인생 2회 차?’
리코는 곧바로 리리스에게 보낼 답장을 준비했다.
리리스가 궁금해한 조제프 뤼트먼의 거취쯤이야, 리코의 손바닥 안이었다.
* * *
울 아빠와 라라 공주 구두를 두고 경쟁했던 빌리 아저씨가 <붉은 매> 길드원이었다고?
나는 새삼 그들의 수완에 놀라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지, 진짜 상상도 못 했네.’
<붉은 매>는 길드원 하나하나가 마치 특수 훈련을 받은 간첩과도 같은 모양이었다.
하긴. 괜히 리코가 제도 사정을 꽉 잡고 있는 게 아니다.
‘역시 리코랑 빠르게 편먹은 건 정말 잘한 일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공작님께 들키면 안 되니 혹시나 아가씨께 변고가 생기면 최후의 최후까지 살피다가 끼어들라는 사장님 지령이 있었죠.”
“그랬구나. 사장님한테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후후, 그럴게요.”
“그런데 아가씨!”
쥰이 손뼉을 치더니 허둥지둥 나를 안았다.
“오잉?”
“시간이 없어요! 오늘은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꾸미셔야 하거든요!”
* * *
고모가 티 파티를 열었단다.
내로라하는 중앙 귀족 가문 귀부인들이 오는데, 그들의 어린 딸과 아들들도 함께 초대받았다.
아마도 고모는 또래 귀족 애들과 내 안면을 터줄 생각인 듯했다.
‘원작은 사나이들의 소설이라서 사교 모임 에피소드 같은 건 없었는데….’
걱정하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곳은 소설이 아니라 현실!
나는 루빈슈타인 공작 영애!
세계 평화는 아빠와 체시어의 몫이고, 나에게는 나만의 할 일이 있는 것이다.
‘대귀족 가문에 걸맞은 품위를 내보이고 나아가 사교계도 주름잡아 주지!’
나는 주인공!
‘…의 딸이니까!’
콧김을 뿜으며 의지를 다지는데 제티와 쥰이 탄성을 내뱉었다.
“오, 말도 안 돼.”
“거, 거울 한번 보시겠어요?”
단장이 끝난 모양이었다.
‘헉. 이게 나야?’
방에 있는 전신거울 앞으로 간 나는 그 앞에 서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보았다.
어깨까지 오는 동글동글 물결 모양 웨이브 머리에 육각형 다이아몬드가 달린 파란색 머리띠.
설탕 인형처럼 하얀 내 얼굴에 꼭 어울리는, 흰색과 파란색이 섞인 레이스 드레스.
종아리까지 오는 하얀색 양말에 앞코가 둥근 블루 에나멜 구두까지….
‘최, 최고다! 역시 난 주인공의 딸이 맞아!’
확신의 비중 있는 캐릭터!
계속 봐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거울을 짚고, 나는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흥분해서 콧구멍이 벌렁벌렁하는데도 예뻤다.
이거, 이거… 라라 공주는 명함도 못 내밀겠는걸?
“최고다, 우리 아가씨.”
“하아. 하얗게 불태웠어….”
진이 쏙 빠진 언니들이 뒤에서 꼭 아저씨들처럼 무릎을 벌리고 쭈그려 앉아 중얼거렸다.
“헤헤.”
나는 젖살이 안 빠져서 통통한 게 살짝 아쉬운 뺨에 손을 얹고 눈을 깜빡여 보았다.
“꺄아아악! 우리 아가씨, 최고야! 너무 귀여워!”
“미쳤어! 인형이 움직이고 있어!”
“아이, 그건 쫌….”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평소보다 어른스러워 보이는 것이었다.
‘화장을 조금만 하면 더 어른 같고 예쁠 텐데.’
나는 키가 큰 화장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고모가 사 준 화장품들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지만, 오늘의 나는 맨얼굴이었다.
언니들이 아직 화장하기에는 이르다고 해서였다.
“그런데 진짜 화장은 하면 안 돼요? 라라 공주는 입술 빨간데….”
“아녜요, 아가씨. 지금 딱 예쁘신걸요. 괜히 입술 칠하면 오히려 안 어울려요.”
“맞아요. 아직 아가씨 피부에는 화장품이 독하기도 하구요.”
둘은 단호했다.
“어머, 시간이 너무 늦어졌네. 테오 도련님께서 아가씨 준비되면 불러 달라 하셨는데.”
“아가씨, 기다리고 계세요. 얼른 도련님들 모셔 올게요.”
“넹.”
제티와 쥰이 방을 나가고 나는 혼자 남아 또 거울을 봤다.
‘역시 뭔가 부족하단 말이지.’
그리고 훌쩍 높은 화장대도 올려다봤다.
‘…하, 한 번만! 이상하면 지우면 되지!’
결국 유혹에 못 이긴 나는 의자를 질질 끌어와 화장대 앞에 놓고 영차 올라갔다.
종류가 많기도 많아서 화장품을 하나하나 열어 보며 확인해야 했다.
‘이건 아이라인 같은 건가?’
연필처럼 생긴 화장 도구를 손등 위에 쓱쓱 그어 보니, 과연 눈화장용이 분명했다.
나는 조심조심 눈매를 덧그리기 시작했다.
‘화장은 처음 해 보네….’
부끄러운 말이지만, 25년 살았던 전생에서도 나는 화장해 본 적이 없었다.
왜냐고?
공부하느라 바빴다.
두꺼운 안경을 쓰고 무거운 책을 든 채 대학교 캠퍼스를 이리저리 쏘다니며 논문이나 왕창 쓰던 기억뿐.
어쩌면 그래서 화장에 더 욕심이 나는지도 몰랐다.
‘요거는 대충 립스틱이겠군!’
눈화장을 마친 다음에는 립 화장 도구를 골라 입술에 발랐다.
“어, 어렵네…?”
생각보다 입술 선을 따라 예쁘게 칠하기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해냈다.
‘예쁜가?’
헷갈렸다.
맨얼굴일 때보다 딱히 더 예뻐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확실히 어른스러워지긴 한 것 같은데?’
마냥 귀엽다는 소리만 듣는 데에 이골이 났던 나는 나름 만족했다.
그때.
똑똑,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너 일어났다며. 안에 있어? 나 들어가도 돼?”
체시어의 목소리였다.
나는 호다닥 의자에서 내려와 다시 전신거울을 들여다보며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괘, 괜찮겠지? 나쁘지 않은 거 맞겠지?’
평소의 두 배쯤은 되어 보이는 입술 크기가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농염(?)해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긴장하며 대답했다.
“응, 들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