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열리고 들어온 체시어가 나를 보더니 우뚝 멈춰 섰다.
멍하니 선 그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쟤 반응 뭐야, 뭐야~! 말도 안 나올 정도로 예쁜가?’
나는 흠흠 헛기침하며 괜히 발끝을 꼼지락거렸다.
“…왜?”
“…….”
“체시어?”
부르자, 얼이 빠져 있던 체시어가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아. 몸 괜찮나 해서.”
“걱정했구나? 괜찮아. 어제 뭐, 다친 것도 아니었는걸.”
“…다행이네. 갈게.”
“으응? 잠깐만!”
그대로 나가려는지 문고리를 잡은 체시어가 돌아보았다.
“그, 그냥 가?”
“그럼?”
“뭐 할 말 없어?”
“…무슨 말.”
“나 오늘 평소랑 좀 달라 보이지 않아?”
“…….”
“아, 아닌가.”
“어. 달라 보여.”
“흠흠. 어떻게 달라 보이는데?”
체시어는 머뭇거렸다.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반응에 나는 기대했다. 자꾸 입꼬리가 올라가려고 해서 힘겹게 내렸다.
그때.
체시어가 뭐라 말하려던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리리스! 준비 다 했어?”
테오였다.
테오도 들어오자마자 나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어라라….”
“오라버니 왔어?”
“꼬맹아아아!”
그 뒤에 레온의 목소리도 들렸다.
테오를 휙 밀치고 들어온 레온이 나를 보더니 멈칫,
“…풉!”
뺨을 부풀리고 웃음이 터진 입을 틀어막았다.
뭐야, 왜 저래.
레온은 이내 배를 붙잡고 깔깔거렸다. 아예 반쯤 뒤집어진 몸이 바닥을 구르며 비웃을 기세였다.
“푸하학! 아하하, 문어 마녀다!”
무, 문어 마녀라고?
참고로 문어 마녀는 <라라 공주의 모험>에 나오는 못생긴 악당이었다.
허연 얼굴에 시커먼 눈, 시뻘겋고 두툼한 소시지 입술을 가진!
“레온, 그만 웃으읍.”
테오는 레온을 말리다가 결국 자기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천천히 뒤에 있는 거울을 돌아보았다.
‘나, 나는 이상한지 잘 모르겠는데….’
아마도 내 생애 첫 화장은 장렬하게 실패한 모양이었다.
“아아아악! 아가씨! 이게 무슨 일이람!”
“세상에나! 안 돼! 비상, 비상!”
뒤이어 온 제티와 쥰도 경악했다.
* * *
다시 언니들에게 붙잡힌 나는 문어 마녀 화장을 지우고 쌍둥이, 체시어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꽃이 만발한 정원은 아름다웠고 봄 날씨는 따뜻했지만 내 마음은 쓰라렸다.
“…예뻐.”
침울한 내 표정을 힐끔거리던 체시어가 마지못해 말했다.
“안 믿어.”
“진심이야.”
“그래, 고마워.”
“아까도….”
체시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나쁘지 않았었어.”
나는 눈을 감았다 뜬 그를 보며 울고 싶었다.
「체시어 루빈슈타인은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었다. 꼭 해야 할 때면 눈을 질끈 감는 터라 항상 티가 났다.」
왜 하필 원작에 나왔던 체시어의 버릇이 선명히 떠오르는지….
딱히 관련된 에피소드도 없었으면서 빌어먹을 원작은 왜 그런 쓸데없는 정보를 서술해 놨어야만 했는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문어야, 문어야.”
“아, 문어라고 하지 말랬다!”
발끈하자 레온이 킬킬거렸다.
“그래, 레온. 그만 좀 해. 리리스, 너 오늘 진짜 예뻐. 공주님이야.”
“으응.”
테오는 화장을 지운 나를 일 분마다 들여다보며 정말로 예쁘다, 예쁘다 해 줬다.
아무래도 내 맘속 오빠 순위를 바꿔야 할 듯했다. 괘씸한 레온 같으니.
“그런데 레온, 너 진짜 애들 안 만날 거야? 그럴 거면 왜 나왔어?”
테오가 묻자, 깍지 낀 손으로 뒤통수를 받치고 걷던 레온이 나를 턱짓했다.
“하녀들이 꼬맹이가 하도 예쁘다고 하길래 잠깐 구경 온 거지. 내가 이 좋은 날씨에 에리카 발레린 얼굴을 봐야겠냐?”
“오늘 에리카 언니도 와?”
내가 묻자, 테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가며 덧붙였다.
“에리카 발레린이랑, 데이몬 마티니랑, 쟝 베버랑, 브루노 펜슬러랑, 샬롯 마이어….”
나는 아는 이름이 있는지 귀를 쫑긋 세웠다.
대충 들으니 전부 엑스트라 같았는데 유독 한 명의 이름이 신경 쓰였다.
‘데이몬 마티니는 원작에 이름이 나왔던 것 같은데, 누구였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한 걸 보니 주요인물은 아니고….’
생각하던 때였다.
“얘들아아아!”
멀리 정원 입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서 보니, 에리카였다.
옆에는 초면인 남자아이도 한 명 있었다.
“뭐, 뭐야! 쟤 왜 이렇게 빨리 왔어?”
“도망치긴 글렀네.”
놀란 레온이 펄쩍 뛰자 테오가 쌤통이라는 듯 웃었다.
“아이 씨! 와! 어!”
정말 싫은가 보다. 레온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이내 테오를 잡아끌었다.
“야, 야! 나랑 귀걸이 바꾸자!”
“미쳤어? 싫어!”
“빨리! 빨리 바꿔!”
레온이 테오의 왼쪽 귀에 달린 사파이어 귀걸이를 강탈하듯 채 가더니 제 루비 귀걸이를 억지로 들려줬다.
테오는 울며 겨자 먹기로 레온의 귀걸이를 달았다.
갑자기 무슨 짓을 하나 했더니.
“레오오오온!”
반가운지 손을 마구 흔들며 달려온 에리카가 테오의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호오. 귀걸이 바꾸니까 둘을 구분 못 하는구나.’
나는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후….”
얼결에 레온 행세를 하게 된 테오가 에리카를 쭉 밀어내며 한숨을 쉬었다.
화려한 감색 드레스를 입은 에리카는 오늘도 키즈모델처럼 예뻤다.
역시 열두 살이라 그런지 제법 어른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저 언니 디게 이쁘지?”
시무룩해져서 옆에 있던 체시어에게 물었더니, 그는 나를 가만 보다 고개를 저었다.
“글쎄, 모르겠는데.”
“나보다 키도 훨씬 크고.”
“…….”
“에휴, 그래. 나는 문어 마녀지, 뭐.”
“…나는 너보고 문어라고 한 적 없어.”
“하아, 나는 언제 크려나….”
중얼거리자, 빤히 보던 체시어가 고개를 돌리며 작게 말했다.
“지금도….”
“응?”
“…아니다.”
“뭔 소리야, 꼬맹이.”
듣고 있던 레온이 불쑥 끼어들어 내 귓가에 대고 말했다.
“네가 백 배 더 귀엽고 이뻐. 쟤는 맨날 시끄럽게 쨍알거리기만 하잖아.”
“머래. 언제는 문어라며.”
“장난이지. 네가 세상에서 제일 이뻐.”
그때 엉뚱하게 테오를 괴롭히고 있던 에리카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안녕, 리리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응, 언니! 언니는 오늘도 공주님 같네!”
“어머? 후후, 부끄럽게 무슨. 너도 여전히 천사 같다, 얘. 오늘 엄청 꾸몄네? 다들 반하겠는걸?”
후후 웃은 에리카가 체시어를 보며 갸웃했다.
“그런데 얜 누구야? 처음 보는 얼굴이네. 시동인가?”
그러자 테오가 다가왔다.
“아, 이쪽은 체시어라고 해. 이번에 우리 삼촌이 후견하기로 해서 지금 여기서 같이 지내는 중이야.”
“오호, 그렇구나. 그런데 레온.”
에리카가 예쁜 눈을 깜빡깜빡하더니 테오의 어깨를 쿡 찔렀다.
“오늘 나한테 왜 이렇게 다정해? 친절하게 설명도 다 해 주고….”
“어어?”
그때 레온이 발을 뻗어 테오의 정강이를 확 걷어찼다.
“억!”
헉, 아프겠다. 맞은 무릎을 붙잡은 테오가 이를 갈며 레온인 척 소리쳤다.
“내, 내가 뭘 다정해! 이 귀찮은 기집애야!”
버럭 내지르는 테오의 모습에 겁을 먹을 법도 한데 에리카는 익숙한지 씩 웃을 뿐이었다.
“이제야 레온답네.”
나는 오늘도 여전한 에리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나쁜 남자 좋아하는 소나무 취향.’
팔짱까지 끼며 테오에게 달라붙는 에리카를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는데, 문득 공기처럼 옆에 서 있던 남자애가 눈에 들어왔다.
끼어들 타이밍을 재는지 쭈뼛거리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잽싸게 다가왔다.
“만나서 반가….”
“넌 왜 왔냐? 반길 사람도 없는데?”
“만나서 반가워요, 루빈슈타인 영애. 마티니 백작 가문의 데이몬이라고 해요.”
왜인지 대놓고 무안 주는 레온을 간단하게 무시한 데이몬이 내게 악수를 청했다.
레온이 질색하며 혀를 차는 걸 보니 그다지 사이가 안 좋은 모양이었다.
‘얘가 데이몬 마티니구나. 역시 이름이 익숙한데…. 기억해 내라, 리리스! 기억해 내!’
짙은 고동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데이몬은 귀티 어린 얼굴이긴 했지만 인상이 흐릿했다.
‘마티니…. 데이몬 마티니….’
그와 악수하며 기억을 더듬던 내 머릿속에 번뜩, 불이 켜졌다.
‘마, 맞다! 기억났다! 얘! 재수 없는 말만 골라서 하던 전형적인 악당 엑스트라 1이었다!’
데이몬 마티니.
사사건건 체시어의 출신을 물고 늘어지며 루빈슈타인 가문도 한물갔네 어쩌네, 밥맛 떨어지는 대사만 골라 치던 등장인물이었다.
어쩐지 느낌이 싸하더라니….
나는 옆에 선 체시어를 힐끔 보며 긴장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마티니 영식. 저는 리리스 루빈슈타인이에요.”
“오호, 제법 예법에 익숙하네요? 듣기로는 평민들이랑 같이 자랐다 해서, 혹시 대화가 안 통할까 봐 걱정했거든요.”
“와, 이 자식 주둥이는 한결같이 재수 없네.”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레온에, 데이몬이 의아해하며 휙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테오 말투는 아닌 것 같아 그렇겠지.
곧 데이몬은 쌍둥이가 서로를 연기 중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아아.” 하며 웃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뭐, 여기 앙트라세 영식처럼 모태 귀족인데도 예법에 무지한 분들이 있긴 하지만요.”
“응, 너나 잘 해.”
레온이 받아쳤지만, 데이몬은 익숙한 듯 빙긋 웃을 뿐이었다.
“그런데 공작님께서 후견을 하신다니, 내가 소식이 늦었네. 너 어디 가문이니?”
…역시. ‘주인공한테 시비 걸기’가 입력된 악당 엑스트라답게 데이몬의 흥미는 곧바로 체시어에게 옮겨 갔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가만히 체시어의 손을 잡았다.
“평민이야. 관심 꺼.”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레온이 대신 대답하자 데이몬이 눈을 크게 뜨며 입을 틀어막았다.
“공작님이 대체 왜? 아아!”
데이몬은 체시어를 꼭 붙잡은 내 손을 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놀이 친구 같은 거구나. 운이 좋았네. 공녀 눈에 들어서 훌륭한 가문에서 교육도 받고. 평생에 한 번뿐인 기회일 테니 후견해 주시는 공작님 실망하시지 않도록 열심히 해. 알았지?”
누가 보면 자기가 후견인인 줄….
데이몬은 격려랍시고 체시어의 어깨를 툭툭 쳤다.
“…예. 말씀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 아, 다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차나 하면서 친해지러 가는 게 어떨까?”
“어머, 너희 벌써 인사 다 끝났니? 좋아! 우리도 가자, 레온!”
멀리서 테오에게 한참 정신 팔려 있던 에리카가, 그를 옆에 끼고 먼저 팔랑팔랑 사라졌다.
“어어, 잠깐.”
나도 따라가려는데 데이몬이 눈을 깜빡이며 체시어를 쳐다봤다.
“설마 너도 따라올 건 아니지? 귀족이랑 평민 사이에는 엄연히 선이 있는 법인데 겸상은 예의가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