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기요, 지금 뭐라고….”
“아이 씨. 이 자식 말하는 거 진짜!”
“아아. 예, 뭐.”
체시어는 욱하려는 나와 레온의 팔을 강하게 휘어잡았다.
나서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을 준 그가 내 귀에 작게 속삭였다.
“나 어차피 연무장에 가 봐야 해. 이따 보자.”
“잠깐만, 체시…!”
그리고는 잡을 새도 없이 떠나가 버렸다.
“자, 이제 가 볼까?”
뒤에서 들려오는 데이몬의 목소리에 나는 작은 주먹을 꽉 쥐고 이를 갈았다.
‘와, 이 X끼 진짜 재수 밥 말아 므긌느….’
* * *
화려한 응접실에는 어린아이들과는 퍽 어울리지 않는 고상한 티 테이블이 차려졌다.
뒤늦게 온 다른 아이들과도 인사를 나눴는데 딱히 특이한 인물은 없었다.
적당히 오냐오냐 자란 전형적인 재벌 3세들이랄까.
그리고.
“…해서, 작년에 승마 대회 우승 트로피를 차지했었죠.”
밥맛 떨어지는 캐릭터인 데이몬 마티니는 벌써 30분째 자기 자랑 중이었다.
‘아무도 안 듣는 것 같은데 진짜 열심히 말하네.’
테이블을 둘러앉은 아이들 모두 지루한 얼굴이었다.
“그나저나 앙트라세의 두 영식께서는 이번에도 승마 대회 나가시려나?”
“아니. 우린 이번에 사냥 나가려고.”
데이몬이 묻자, 에리카가 권하는 디저트를 꾸역꾸역 입에 집어넣고 있던 테오가 답했다.
“푸흡. 왜? 설마 날 이길 자신이 없어서 둘 다 사냥으로 전향한 건가? 뭐, 현명한 선택이긴 하다만.”
삐딱하게 앉아 있던 레온이 “재수 없는 놈….” 하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승마는 마티니 영식을 따라올 사람이 없긴 하지.”
“이번에도 마티니 영식이 우승이겠죠, 뭐. 저도 이번엔 그냥 시 낭송이나 하려고요.”
쟝 베버와 브루노 펜슬러가 한마디씩 했다.
‘흠, 허세는 아닌 모양이네?’
데이몬이 한참 자랑을 늘어놓은 승마 대회는, 축제 기간의 귀족 행사 중 하나였다.
이때 6살부터 15살까지의 어린 귀족 자제들은 각종 고상한 대회에 참가하곤 했다.
승마, 사냥, 연주, 시 낭송 등….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는 부문에 아낌없이 투자하고 참가시켰다.
사실상, 귀족들에게는 마냥 즐기기만 하는 축제가 아니라 1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경쟁의 장인 것이다.
“공녀도 이번에 참가하나요? 어느 부문에 나갈 생각이에요?”
귀여운 분홍색 단발을 한 샬롯 마이어가 내게 물었다.
“음…. 저는 아직 생각 안 해봤어요.”
“리리스, 악기 배운 거 없어? 연주 대회가 제일 쉬울 텐데. 나랑 같이 나가자.”
에리카가 다정하게 권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뭔가 하기는 해야겠구나. 어휴, 소질 없는데….’
가문의 명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행사이기 때문에 피해 갈 순 없었다.
“공녀, 다른 건 몰라도 승마 대회 구경은 꼭 오도록 해요. 어차피 우승자가 정해져 있으니 긴장감은 없겠지만.”
“긴쟁갬은 앲갰쟤맨~~”
레온이 듣다 듣다 대놓고 비꼬자, 에리카가 아하하 웃었다.
“어머, 테오가 오늘따라 왜 저러지? 꼭 레온처럼 귀엽잖아?”
레온이야….
비꼬건 말건 데이몬은 계속 으스댔다.
“이번에 내가 새로 명마를 구했거든요. 드디어 내 수준에 맞는 말을 찾았달까?”
“음? 데이몬, 말 바꿨어?”
테오가 물었다.
“왜 갈아치웠냐? 너 작년에 우승한 거 전부 그 백마 덕이었잖아.”
“아니거든. 내 실력이거든.”
레온의 말에 데이몬이 드물게 발끈했다.
“그 말은 비실비실했어. 연습량도 못 따라오고. …아무튼, 공녀. 꼭 구경하러 와요? 하하하핫!”
데이몬의 솟아오른 콧대를 보고 있자니 내 안의 비틀린 경쟁심이 불타올랐다.
그래, 보고 싶다.
격렬하게 보고 싶다.
악당 엑스트라가 잔뜩 이를 갈며 ‘으윽, 분하다! 내가 지다니!’ 하고 퇴장하는 그 모습을.
‘응, 체시어랑 승마 나가야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 * *
“아빠, 아빠, 아빠아아!”
“엇! 공주!”
나는 귀가한 아빠의 마차가 돌아오는 것이 보이자마자 한달음에 마중 나갔다.
아빠는 입이 귀까지 찢어져서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뭐야, 공주. 아빠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그새를 못 참고 여기까지 나오다니 감동인걸?”
“그건 아니구 할 말….”
“울 공주 아픈 데는 없어 보여서 다행이네. 몸 괜찮아? 일어났는데 아빠 없어서 놀랐지? 어휴, 기사단장 삼촌이 어제 일로 아침부터 아빠를 부르지 뭐야.”
“아하, 그랬구나? 근데 나 할 말….”
“움움움움.”
정원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걸어가며 아빠가 내 뺨에 무자비하게 뽀뽀했다.
“하아.”
“그런데 우리 공주 오늘 왜 이렇게 이쁘냐? 누가 또 납치해 가면 어쩌려고 이렇게 입었대, 어?”
나는 거의 내 볼을 빨아먹을 기세인 아빠의 턱을 쭉 밀어냈다.
“아, 할 말 있다구!”
“음? 무슨?”
“나 말 사줘! 애기용 말!”
“말? 갑자기 무슨 말?”
“축제 때 대회 나가야 하잖아? 승마 나가려구. 체시어랑 같이.”
아빠가 인상을 찌푸렸다.
“승마아?”
“응!”
“웬 승마. 그거 생각보다 어려워. 다른 거 해. 아니다, 그리고 그거 꼭 안 나가도 돼.”
“몬 소리야. 남들 다 상 타려고 난리던데. 아빠는 무슨 가주가, 가문의 명예는 생각도 안 하구?!”
“…허허. 할아버지가 들으면 좋아하시겠네.”
“바로 그거지! 아무튼, 난 승마 할래. 체시어도 같이 해도 되지?”
“그거야 상관없는데, 음.”
아빠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열심히 눈을 빛내는 나를 보고 결국 항복했다.
“그래, 그럼.”
* * *
아빠는 그 길로 나와 체시어를 데리고 제도에서 제일 유명한 마사를 찾았다.
엉겁결에 따라온 체시어는 말을 고르라고 하니 망설였다.
“그런데 저도 대회에 나가도 돼요?”
“물론이지. 내가 너를 후견하고 있으니 입상하면 우리 가문의 공적에 오르긴 하겠지만.”
“아, 그럼 열심히 해 볼게요.”
예상했던 대로 체시어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승부욕이 비쳤다.
‘큭큭. 내 저럴 줄 알았지.’
주인공은 참지 않는다.
과묵한 성격상 체시어는 조무래기 악역들에게 말발로 사이다를 먹인 적은 없었지만, 대신에 모든 방면에서 월등한 능력치로 그들을 무릎 꿇렸다.
“마음에 드는 말로 골라 봐.”
“예.”
말을 고르러 가는 체시어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히죽 웃었다.
‘불변하는 원작의 법칙 1번. 주인공들의 사전에 2등이라는 단어는 없다!’
아직 말을 타본 적 없는 체시어지만, 결국 우승은 체시어의 것이 될 터.
이번 승마 대회는 밥맛 떨어지는 데이몬의 콧대도 누르고 체시어의 재능과 이름도 알릴 계기가 될 거다.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님도 보고 뽕도 따는 일석이조의 큰 그림!
“공주도 골라야지?”
“아. 나는 모, 대충….”
물론 나는 체시어 옆에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 셈이다.
승마는 해 본 적도 없는데 2주 남은 대회까지 연습해 봐야 가망도 없을 테고.
“흠.”
나는 무심히 마사를 둘러보았다.
어린아이들과 맞는 몸집이 작은 품종의 말들이 잔뜩 있었다.
“어?”
그때.
유난히 한쪽 구석에서 빛이 났다.
“와아…! 아빠, 쟤 봐!”
나는 외따로 서 있는 독보적인 생김새의 말을 향해 홀린 듯 달려갔다.
“세상에!”
“오, 예쁘네.”
아름다운 백마였다.
관리가 잘 되어 윤기 나는 순백색의 털에, 갈기는 오묘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나붓나붓 움직이는 긴 속눈썹 아래… 눈동자!
그 눈동자가 킬링 포인트였다!
“얘, 눈이 파란색이야!”
사람으로 치면 고고한 귀족 같은 느낌. 마주친 푸른 눈은 거만하면서도 우수에 차 있었다.
나는 그 백마를 가리켰다.
“나는 얘로 할래!”
“앗, 공녀님.”
그때, 나와 아빠의 뒤에서 기웃기웃하던 주인장이 미안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이번 봄 축제 승마 대회에 나갈 말을 보시는 거지요? 그러시다면 죄송하지만 이 아이는 안 됩니다.”
“왜 그러지? 문제가 있나?”
아빠가 묻자, 주인장이 뺨을 긁적였다.
“이놈이 그 제피르입니다. 작년 승마 대회에서 마티니 백작 영식과 우승했던 말이요.”
“어어? 네에, 들었어요. 얘가 마티니 영식의 말이었어요? 그런데 주인 있는 말이 왜 여기 있어요?”
“연습 도중 다리 부상이 생겼거든요. 뭐, 지금은 거의 낫긴 했습니다만, 전과 같은 기량은 다시 나오지 않지요.”
“네? 설마 그럼 마티니 영식이 얘를 버렸어요?”
묻자, 주인장이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엄…. 뭐, 경주용으로 길러진 말들은 보통 부상을 입으면 수명이 다했다고 보니까요.”
“그, 그러니까 버린 거 맞잖아요…. 아니, 정이 들었을 텐데 어뜨케…? 대회는 같이 안 나가도 계속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하하. 뭔가 사정이 있으셨겠죠.”
사정은 무슨 놈의 사정.
악당 엑스트라 데이몬의 인성을 생각해 보면 뻔할 뻔 자였다.
버린 거다. 1년은 더 넘게 동고동락했을 친구를.
심지어 작년에 우승 트로피까지 쥐여 줬다는 아이를.
“인성 터졌다….”
“예?”
“아저씨, 그럼 제피르는요. 다른 데 안 팔리면 여기서 계속 살아요?”
“아뇨. 경주마로 키워진 놈이라 팔리지는 않을 겁니다. 상품 가치 없는 말은 폐기 처분이 원칙이라….”
“……?”
“보통 도살장으로 보내죠.”
뭐라고? 순간, 뜨악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주, 죽인다고? 이렇게 멀쩡한 애를?’
나는 말문을 잃고 입을 떡 벌린 채 다시 제피르를 올려다보았다.
꼭 사람처럼 우수에 젖어있다고 생각했던 눈이, 사정을 알고 보니 정말 슬퍼 보였다.
마치 상처받은 것처럼.
“말도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