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받은 나를 보고 아빠가 끼어들었다.
“공주야, 이 아저씨도 어쩔 수 없을 거야. 팔리지 않을 말을 계속 관리하는 것은 손해니까.”
“그치만, 그치만….”
데이몬은 알았을까? 부상을 입고 마사에 되팔린 경주마가 어떻게 되는지.
‘몰랐을 리가 없지.’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주인과의 교감이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승마. 제피르는 그런 승마 대회에서 우승까지 한 말이었다.
아마 인성 터진 주인도 주인이라고 등을 내주고, 함께 달리고, 믿고 따랐겠지.
‘그런데 다리 좀 다쳤다고 죽을 자리에 되팔아?’
“아빠, 나 제피르 데려갈래. 너무 불쌍해.”
나는 아빠의 바짓자락을 붙잡고 말했다.
“꼭 대회 나가서 상 타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치?”
“물론.”
아빠가 웃었다.
“그냥 이 말로 하지. 우리 딸은 말 타는 법만 배우면 되니까 꼭 경주마로서 효용이 있을 필요는 없어.”
“하아, 그런데 공작님. 그….”
주인장이 울상을 지었다.
“제피르가 부상 문제만 있는 말이 아니라서요. 전 주인과 유대가 깊어 그런지 영 말을 듣질 않습니다.”
“말을 안 듣는다니?”
“보시다시피 생긴 게 고와서 몇몇 분들이 데려가려고 했습니다만, 등을 전혀 내주지도 않고 공격적으로 굽니다. 공녀님이 타시기엔 위험하니 다른 좋은 말로 보여드릴게요.”
“아아, 그런가.”
위험하다는 말에 아빠가 망설였다.
“아빠! 나는 제피르가 좋아. 응? 어차피 어린이 승마 대회는 낙마 방지 마법도 걸어 준다며. 연습할 땐 아빠가 도와주면 되구.”
“그렇긴 하지. 이 말이 그렇게 마음에 들어?”
“응. 마음에 들어. 그리고 내가 안 데려가면 죽잖아…. 제발. 응?”
두 손을 맞잡고 애원하자 아빠는 못 말린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에고, 우리 천사. 그래, 그럼. 이 애를 데려가자.”
* * *
주인장 아저씨 말대로 제피르는 무척 공격적이고 경계가 심했다.
우리 공작저 마구간으로 데려오기까지 얼마나 험난했는지.
“말을 탈 땐 앉는 자세가 제일 중요해. 머리부터 허리, 발뒤꿈치까지 땅이랑 일직선으로. 아, 힘은 너무 주지 않는 게 좋아.”
“네.”
나는 처량하게 쪼그려 앉아 아빠에게 개인 교습을 받는 체시어를 구경했다.
멋있는 흑마를 데려온 체시어는 역시나 단번에 승마에 성공했다. 자세도 제법 나왔다.
“잘하는데?”
만족스럽게 웃던 아빠가 별안간 움찔하며 돌아보았다.
내 뜨거운 시선을 느낀 모양이었다.
“저, 공주야. 처음에는 옆에서 잡아 줘야 해서. 아빠는 체시어랑 요 앞에 한 바퀴 돌고 올게?”
“응응. 나는 신경 쓰지 말구 다녀와. 조심해.”
아빠는 말을 탄 체시어를 옆에서 잡아 주며 마구간을 나섰다.
“흠.”
혼자 남은 나는 우리에 들어가 있는 제피르를 보았다.
등에 타기는커녕 쓰다듬기도 힘들 만큼 경계가 심했다.
“제피르, 걱정하지 마. 네 등에 타고 싶은 거 아니야. 안 태워줘도 돼. 대회 나가려구 너 데려온 것도 아니야. 어차피 우승은 체시어가 할 거거든.”
제피르는 무심한 눈으로 나를 깔아볼 뿐이었다.
“너 혹시 네 주인 보고 싶어?”
아마 그렇겠지.
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을 등에 태우고 싶어 하지도 않는 제피르니까 말이다.
나는 씁쓸해지는 마음에 한숨을 폭 내쉬었다.
* * *
제피르는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것 같기도 했다. 여물도 굶다, 굶다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먹었다.
“끄응. 끙차.”
“아이고, 아가씨!”
“안녕하세여, 릭! 저 또 왔어여!”
공작가 마구간지기, 릭 아저씨가 허둥거리며 달려와 내 손에 들린 무거운 당근 바구니를 빼앗았다.
“이걸 왜 아가씨가 들고 오세요. 절 부르시든가 하인들 시키시지.”
“식당에서 바로 오느라 생각 못 했어요. 주방장 아저씨가 그러는데 이 당근, 바로 어제 남부에서 가져온 무농약 1등급이라 완전 신선하대요!”
히이이잉, 히이이잉!
최고급 간식 냄새를 맡았는지 마구간의 말들이 전부 흥분하며 울었다.
“안 돼! 이거 제피르 꺼야!”
“어휴, 아마 오늘도 안 먹을 텐데요….”
나는 바구니에서 당근 하나를 빼서 제피르의 우리 안으로 뻗었다.
“밥 먹자, 제피르.”
제피르는 푸른 눈으로 힐끔 나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것도 안 먹으면 어떡해….”
속상해라.
“한 입만. 응?”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을 때쯤에야 나는 포기하고 한숨을 쉬었다.
갈색 턱수염을 긁적거리고 있던 릭이 안타까운 눈으로 다가왔다.
“안 먹죠?”
“네에. 배고플 텐데….”
“아마 제피르는 마음의 상처를 치료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자기가 버림받은 거, 제피르는 알까요? 몰랐으면 좋겠는데.”
“아마 다 알 거예요. 말 못하는 동물이지만, 감정이 없진 않거든요. 특히나 대회에서 우승까지 할 정도였으면 전 주인과 교감이 무척 깊었겠죠.”
“데이몬 마티니 재수 없어요.”
“그 갈색 머리 백작 영식 맞죠? 솔직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전에 놀러 왔을 때 마구간에 불쑥 찾아와서는, 저희 말들을 막 품평하더라니까요.”
릭은 화내다가 곧 내게 속삭였다.
“제가 귀족 도련님 욕했다는 건 비밀로 해 주세요, 아가씨.”
“욕 더 해도 돼요. 진짜 나쁜 애거든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나는 릭과 함께 제피르를 보며 동시에 푹,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하면 제피르가 저한테 마음을 열어 줄까요? 한번 쓰다듬기라도 해 보고 싶은데.”
“글쎄요…. 시간이 조금 더 지나 봐야지요. 그래도 진심은 언제나 통하는 법이니까 너무 우울해하지 마세요.”
“네에.”
나는 텅 비어버린 제피르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안 좋았다.
* * *
제피르가 온 이후로 루빈슈타인 공작가의 마구간은 매일매일 시끌벅적했다.
“제피르, 맘마 먹자!”
“릭, 제피르 모 하구 있어요?”
하루도 빠짐없이 자기 말을 보겠다며 들락거리는 어린 아가씨 때문이었다.
“발터, 안녕? 너 오늘도 주인 닮아 잘생겼구나?”
“제피르, 오늘 날씨 엄청 좋아!”
정작 무심한 제 말은 매일 찾아오는 주인에게 관심도 없는데….
“야, 너 울 제피르 당근 뺏어 먹었지? 혼난다? 니꺼 따로 줬잖아!”
“제피르, 오늘은 뭐 했어?”
끈질기게 마구간에 놀러 와 얼굴도장을 찍는 덕에, 도리어 다른 말들이 이 작은 아가씨를 더 반가워할 지경에 이르렀다.
히이이잉, 히이이잉!
일주일하고 사흘이 흐른 어느 날.
오늘도 여전히 시끄러운 마구간 한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던 제피르는 슬쩍 밖을 내다보았다.
이쯤이면 올 시간이 되었는데….
히이이잉.
제피르의 바로 옆 칸에 사는 체시어의 흑마, 발터가 비웃는 소리를 냈다.
내심 리리스를 기다리는 제피르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제피르는 아닌 척 다시 목을 밀어 넣었다.
“제피르으으! 늦었지, 미안!”
…오늘도 왔다.
“빨리 올라 그랬는데 오늘 마탑주가, 아니, 마탑주님이 수업 늦게 끝내줬어!”
조잘조잘.
“들어 볼래?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원. 나 겨우 일곱 살인데 무슨 일차함수를 지금 배우자구 그러는 거 있지?”
조잘조잘.
마냥 시끄럽다고 생각했던 목소리를 언제부터 기다렸더라.
어쨌든 이 작은 아이를 이제 매일 기다리게 되었으면서, 제피르는 또 아닌 척했다.
* * *
눈 뜨면 매일같이 마구간에 출석한 지 10일째.
“우와아, 체시어 잘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제피르에게 눈도장을 찍은 다음, 나는 발터와 체시어를 구경했다.
체시어는 능숙하게 승마장을 돌고 있었다.
“공주, 여기서 뭐 해?”
처량하게 턱을 괴고 쪼그려 앉아있던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돌아보았다.
“어? 제임스 씨, 뭐야? 멋있다.”
아빠였다. 번쩍번쩍 빛이 나는 풀 플레이트 아머에 푸른 성기사단 망토까지 두르고 있는.
나는 평소와 다른 아빠의 착장에 놀랐다가 곧 깨달았다.
‘…오늘이 기사단 복귀식인가 보구나.’
황궁 가는 날인 모양이었다.
뭔 짓을 해도 피할 수 없는 복직….
“아빠 복귀식 오늘이었어?”
“엉. 며칠 전부터 말했는데 벌써 까먹었어?”
“글쿠나. 잘 다녀와.”
“와, 그게 다야? 아빠 오늘 가면 황궁에서 이틀 밤 자고 와야 하는데? 아빠는 공주 이틀이나 못 본다고 생각하니까 너무너무 슬픈데?”
“나도 슬퍼.”
“…슬픈 표정이라도 좀 짓고 말해 주지.”
아빠는 입을 삐죽거리며 내 옆에 털썩 앉았다.
“우리 공주 뭐 하고 있었나.”
“체시어 구경.”
“아하.”
아빠는 시무룩한 나를 위로하려는지 뺨을 툭 건드렸다.
“제피르는 아직도 울 공주 태워주기 싫대?”
“제피르는 아직 마음의 상처를 치료할 시간이 필요하대. 억지로 태워 달라고 안 할 거야.”
“하하, 우리 천사 말하는 거 봐. 그래, 걱정하지 마. 제피르도 곧 공주 마음을 알아줄 거야.”
“아빠.”
“왜?”
“오늘 가면 황제 폐하 보겠네?”
“…….”
답이 없었다. 나는 체시어를 구경하던 시선을 물끄러미 아빠에게 옮겼다.
“어어, 그렇겠지?”
아빠는 내가 갑자기 황제 얘기를 꺼내니 긴장한 눈치였다.
“아빠 옛날에는 막, 황제 폐하가 전쟁터 나가라 그러면 말 안 듣고 그랬다며?”
“뭐? 누가 그래?”
“마탑주님이.”
“하하하.”
아빠는 어색하게 웃으며 “애한테 별 소릴 다 했네.” 하고 중얼거렸다.
“황제 폐하가 또 전쟁터 가라구 하면 어떡하지?”
“가야지. 아빠 엄청 쎈 거 알지? 무서운 괴물들 쳐들어오면 우리 공주 위험하니까 아빠가 미리 가서 그냥 다 확…!”
“괴물 잡으러 가는 전쟁 말구.”
“응?”
나는 괜히 흙장난하는 척하며 덧붙였다.
“딴 나라 쳐들어가는 전쟁 있잖아.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 땅도 막 뺏고, 죽이고 그러는 전쟁.”
“…….”
“아빠는 그런 거 안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