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묵하던 아빠가 나를 불렀다.
“있잖아, 리리스.”
“옛날에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황제 폐하한테 그런 전쟁은 하기 싫다구 꼭 말해. 그런 전쟁은 나쁜 전쟁이니까….”
“…….”
“제임스 씨, 왜 대답 안 해?”
나는 흙 묻은 손바닥을 탁탁 털고 아빠를 돌아보았다.
아빠는 빤히 나를 쳐다보다가 씩 웃었다.
“그래, 그럴게.”
“아빠.”
“응, 공주.”
나는 일어나 아빠에게 안겼다.
“나는 괜찮아.”
“뭐가?”
아빠는 품으로 파고드는 나를 안고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나 때문에 아빠가 막 나쁜 전쟁 나가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
“약속해. 알았지?”
나를 끌어안은 아빠의 팔이 살짝 떨렸다.
“약소옥.”
“…응, 그래. 약속.”
거짓말하는 목소리가 씁쓸했다.
* * *
달도 잠든 깊은 새벽.
루빈슈타인 공작저 마구간.
체시어의 흑마 발터와 리리스의 백마 제피르만 깨어 있었다.
[야, 왕자.]
발터가 제피르를 불렀다.
왕자…. 옛날에 함께 있던 마사에서부터, 다른 말들이 아름다운 생김새에 도도한 제피르를 놀리는 별명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제피르는 대꾸도 안 했다.
[이 정도 했으면 공주님 한번 태워주지 그러냐?]
[…….]
공주님은 리리스의 별명이었다.
이 집 주인이라는 리리스의 아빠 인간이 딸을 항상 공주님이라고 부르기 때문이었다.
[듣고 있냐?!]
[…시끄러워. 닥쳐.]
[듣고 있네. 야, 공주님 맨날 마구간에 앉아서 우리 주인이 나 타는 거 부러운 눈으로 구경만 하고 있는데 불쌍하지도 않냐?]
[…….]
[내 주인은 공주님 걱정하는지 어제오늘 집중도 못 했다고.]
제피르도 눈이 있고 귀가 있으니 다 알고 있었다.
능숙하게 발터를 타는 체시어를, 리리스가 부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걸.
그때.
어둠 속에서 작은 기척이 났다.
두 말의 귀가 쫑긋 섰다.
“어라, 뭐야? 너희 안 자고 있었어?”
[엇, 공주님? 뭐야, 이 시간에!]
한 손에 등잔을 들고 옆구리에 작은 바구니를 낀 리리스였다.
“쉿, 쉿. 발터, 조용해. 친구들 다 깨겠다.”
[나 당근 줘!]
“조용히 하라니까?”
리리스에게는 히이잉, 울부짖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을 텐데 발터는 연신 당근을 달라 외쳤다.
리리스가 가져온 바구니를 들여다보며 망설였다.
“혹시 이거 달라구? 무거워서 네 개밖에 못 가져왔어. 이거 다 제피르 껀데….”
[편애하지 마!]
“어쩌지…. 그럼 딱 한 개만이다?”
마구간 구석에 등잔을 내려놓은 리리스가 발터에게 당근을 먹였다.
“히히, 잘 먹네. 이쁘당.”
[공주님이 더 예뻐.]
당근 하나를 순식간에 해치운 발터가 콧김을 쉭쉭 뿜으며 리리스의 손등에 다정하게 치댔다.
발터를 몇 번 쓰다듬어 준 리리스가 제피르의 여물통에 남은 당근을 몽땅 쏟아부었다.
[부러운 새끼….]
발터가 중얼거렸다.
“제피르,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깨어 있었네. 오늘은 아빠 없어서 겨우 새벽에 몰래 나올 수 있었던 건데…. 아, 울 아빠 황궁에 갔어. 이틀 밤 자구 온대.”
언제나 그랬듯 꼭 제피르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조잘거린 리리스가 조심조심 엎드렸다.
제피르가 흠칫 놀랐다.
뭘 하나 했더니, 우리 안으로 작은 몸을 밀어 넣고 들어오는 게 아닌가.
겁도 없이.
“이게 뭐냐면, 제피르. 어제 리코한테 또 보내주고 남은 엄청 좋은 약이야. 물에 타가지구 따뜻하게 적셔 왔어. 아, 리코가 누구냐면 내 친구.”
리리스는 품 안에서 젖은 천을 한 장 꺼냈다.
그리고는 이제야 겁이 나는지 살짝 거리를 두고 서서 머뭇거렸다.
“아야한 발에 묶어줄게. 원래는 자고 있으면 몰래 해 주고 가려 했는데…. 너 발 가만히 있어야 해? 맞으면 나 아프니까.”
제피르는 여전히 무심한 눈길이었다. 리리스가 조심조심 제피르의 오른쪽 앞발에 천을 둘렀다.
“착하다…. 있지, 내가 플린한테 물어봤는데. 아, 플린은 우리 집 주치의야. 이거 되게 좋은 약인데 동물한테는 안 듣고 사람한테만 듣는대. 그래서 소용은 없겠지만 또 혹시 모르니깐….”
리리스가 한숨 쉬며 덧붙였다.
“네가 안 움직이는 게 아직도 발이 아파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릭 아저씨가 말했거든.”
[아니야, 공주님. 왕자 이 새끼, 다리 진작 나았어.]
“발터, 쉿 하래두? 아무튼, 작년에 너 승마 대회 우승했을 때 신문 기사를 봤는데 막 10분도 못 쉬고 하루에 열 시간씩 연습하고 그랬다며?”
중얼거리던 리리스가 “인성 터진 데이몬 마티니….” 하고 아주 작게 덧붙였다.
“얼른 나았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아, 탄성을 내뱉었다.
“오해하지는 마. 나 태워달라구 이러는 거 아니니까. 안 태워줘도 돼.”
[왕자 놈 버려! 내가 태워줄게, 공주님!]
“발터, 안 돼. 오늘 치 당근은 끝났어. 내일 또 줄게.”
발터를 달랜 리리스가 제피르의 다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나 대회 안 나가도 돼. 어차피 체시어가 우승할 거니까 상관없거든.”
[맞아, 나랑 주인이 우승할 거야!]
서툰 치료를 마친 리리스가 더러운지도 모르고 구석에 털썩 주저앉아 제 무릎을 끌어 모았다.
제피르는 그런 리리스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러니까 달리기 싫으면 안 달려도 돼. 네가 달리고 싶을 때 달리면 되지, 뭐.”
리리스는 웃으며 말했다.
왜인지 전 주인의 얼굴이 겹쳐 보여서, 제피르는 리리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만 쉬어! 자지도 말고 달려! 대회가 코앞이라고!”
“대체 왜 갈수록 느려지지? 빨리 달려! 빨리! 속도가 이따위면 어떡하라고!”
“다리 다쳐서 전만큼 안 빠른 게 속상할 수도 있지만…. 빠른 게 꼭 좋은 건 아니야. 느려야만 보이는 것들도 있거든.”
“넌 달리기 위해서 태어났어. 경주마로서의 네 존재 가치를 증명할 방법은 딱 하나야. 대회! 우승! 최고!”
“경주마라는 말도 좀 이상하지 않아? 달리기 위해서 태어난 말이라니…. 음, 세상엔 즐거운 일도 많고 맛있는 것도 많은데.”
“아아, 이 말? 새로 가져왔어. 네 꼴을 보니 가망 없을 것 같아서. 다시 날 태우고 달리고 싶으면 원래 기량을 찾아. 느린 말은 필요 없으니까.”
“잘 달려야만 사랑받고 대회에서 우승해야만 이쁨받고 그런 거 아니야. 그러니까 정말, 옛날처럼 빨리 달리지 못해도 괜찮아.”
[…….]
“나는 그냥 네가 빨리 나았으면 좋겠어…. 다리도, 마음도….”
중얼거리던 리리스는 작게 하품하더니 돌아가는 것도 잊고 그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제피르는 그 모습을 한참 지켜보다가 조심히 거리를 붙여 다리를 굽히고 주저앉았다.
이내 아이의 작은 몸이 보드라운 백마의 목덜미 위로 폭 파묻혔다.
* * *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게냐?”
깜빡깜빡.
꿈결인지 현실인지 모르겠는 엄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자 새벽인지 뿌옇게 밝은 하늘이 보였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나 여기서 잔 거야?’
옆에는 제피르가 누워있었다. 겁도 없이 제피르한테 기대어 잠들었던 모양.
심지어 나를 깨운 건….
“하, 하, 할아버지?”
검은 제복 차림으로 위엄 넘치는 포스를 풀풀 풍기고 있는 할아버지였다.
나는 호다닥 몸을 일으켰다.
‘할아버지 분명 어제 아빠랑 같이 복귀식에 간다고 했는데?’
왜 집에 계시지? 그것도 마구간에?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지만 일단 먼저 빌어야 했다.
더러운 마구간 바닥에 주저앉아 태평하게 잠까지 자다니. 귀족의 품위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행동이었으니까.
“할아버지, 그게요…. 제가 어제 말 먹이를 주려고 잠깐 나왔다가 깜빡 잠들어 버렸어요. 죄송해요.”
“…….”
할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우리 안에서 어쩔 줄 모르고 허둥거리던 나는 하는 수 없이 들어왔을 때처럼 엎드려 엉금엉금 기어나갔다.
…난 끝났다. 할아버지가 제일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하고 말았다.
“죄, 죄송해요….”
흙이 묻어 더러워진 치맛자락과 구두를 감추려고 나는 쭈뼛쭈뼛 뒤로 몸을 물렸다.
“이게 승마 대회에 나가겠다고 데려온 말이냐?”
“아, 제피르요? 네에.”
“등을 내어주지도 않는다고 들었는데.”
할아버지가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알지? 이상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을 바꿔야지.”
“아니요!”
나는 놀라서 손사래 쳤다.
“제피르는 그… 마음의 상처가 있는 말이에요. 안 태워준다고 저도 다른 말을 찾아 버리면 제피르가 실망해서 아예 마음의 문을 닫아버릴지도 몰라요…. 그래서 제피르를 기다려 주려고 해요….”
“…….”
“할아버지, 그래서 승마 대회는 못 나갈 것 같아요. 나가서 상도 타고 그래야 하는데 죄송해요.”
“내가 언제 너더러 대회에 나가서 상을 타오라고 했더냐?”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말을 한 번도 못 타봤다는 게로구나.”
“네에.”
나는 쭈뼛거리다가 눈만 살짝 들어 할아버지의 표정을 살폈다.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던 할아버지는 갑자기 무릎을 굽혀 흙이 묻은 내 치마며 신발을 손수 털어주었다.
“어, 할아부지…?”
그리고는 일어나 제피르의 맞은편 우리를 열었다.
근육질의 갈색 말에 고삐를 걸고 밖으로 나온 할아버지가 이내 나를 번쩍 들어 앉혔다.
“……?”
그리고는 뒤에 훌쩍 올라타더니 천천히 말을 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