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4/261)

‘설마 내가 말 한 번도 못 타봤다고 하니까 태워주시려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나를 품에 안다시피 한 할아버지는 마구간 옆에 있는 승마장을 거닐기 시작했다.

“우, 우와.”

한 바퀴, 두 바퀴…. 처음 말을 타본 내가 적응할 시간을 주려는지 할아버지는 천천히 속도를 붙였다.

‘엉덩이 하나도 안 아픈데? 들썩들썩하지도 않고!’

체시어에게 듣기로는 엉덩이가 엄청 배긴다고 했는데.

왜인지 나는 폭신한 매트리스 위에 앉은 것처럼 편했고 막 흔들리지도 않았다.

‘이렇게 잘 타다니 나 생각보다 소질 있는 거 아니야?’

“안장에 잠깐 마법을 걸어 둬서 타기가 수월한 게다. 나중에 혼자 타려면 자세가 피로해지는 것에도 적응해야 하지.”

…끙, 그럼 그렇지.

설마 내가 승마 천재?! 하며 속으로 야무지게 김칫국 마시는 손녀를 알아봤는지 할아버지는 냉정하게 말해줬다.

“그런 거였구나. 감사합니다. 헤헤….”

마음이 들떴다. 생각보다 승마는 재미있었다.

한참 승마장을 돌던 할아버지는 고삐를 돌려 저택 뒤로 향했다.

저택 뒤편은 낮은 산과 이어져 있었다. 경사가 완만한 산책로로 들어선 말이 조금씩 속도를 붙였다.

“후아아아.”

청량한 새벽바람과 함께 조금씩 높아지는 고도를 따라 아름다운 저택의 전경이 보였다.

내 심장은 두근두근 뛰었다.

“하, 할아부지! 저기 마을까지 다 보여요!”

어느새 훌쩍 높아진 시야에는 멀리 제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중심부에 화려하게 우뚝 선 황궁.

성스럽고 웅장한 백색 신전.

예술품처럼 멋들어진 귀족들의 타운하우스, 크고 작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은 상업지구까지….

“너무 예쁘다!”

할아버지는 아름다운 전경을 눈에 담느라 정신없는 나를 위해 말을 멈춰줬다.

나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한참 그렇게 있다가 물었다.

“할아버지, 근데 내일 아빠랑 같이 돌아오시는 거 아니었어요?”

“귀족들이 참석하는 만찬 행사는 어제였다. 정식으로 복귀식을 하는 날은 오늘이지. 한데 내가 굳이 오늘까지 거기에 있어 봐야 뭣 하겠느냐?”

할아버지는 쯧, 혀를 차고 덧붙였다.

“집에서 맨날 보는 지긋지긋한 아들놈 얼굴을 반나절 넘게 또 봐야 한다니 그만한 곤욕이 없지. 냉큼 돌아왔다.”

“그러셨구나.”

나는 뒤돌아 할아버지를 훔쳐보면서 쿡쿡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애정이 묻어났다.

“왜 웃는 게냐?”

“할아버지 표정이 좋아 보여요. 그래서 저도 좋아서요.”

“내 표정이 좋아 보인다고?”

“네. 그래도 아빠가 돌아와서 좋으시죠? 그동안 보고 싶으셨잖아요.”

“…전혀. 속 썩이던 놈 없어서 맘만 편했다.”

“에이, 정말요? 제논에 있을 때 아빠는 할아버지 보고 싶다고 자주 말했었는데.”

“…….”

“떠난다고 말도 못 하고 와서 죄송하다고…. 할아버지가 걱정 많이 하실 거라고 마음 아파했어요.”

언젠가 “아빠도 아빠가 있지?” 물었을 때 아빠가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했던 말들이 생각났다.

“저는 아빠랑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슬프거든요…. 그런데 아빠는 할아버지랑 오래 헤어져 있었으니까…. 엄청 슬프고 보고 싶고 또 그립겠구나, 하구 생각했어요.”

나는 말하다가 다시 할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요, 제가 제도로 돌아가자고 아빠한테 떼썼어요. 아빠가 왜 계속 숨어 살려고 했는지는 알지만요…. 제도에 가면 할아버지도 만날 수 있고 고모도 만날 수 있고 하니까….”

“그랬느냐.”

할아버지가 픽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 때문에 아빠랑 할아버지가 오래 헤어져 있었다는 거 알아요. 그래서 죄송해요….”

“죄송하단 말이 아주 입에 붙었구나. 사고 친 건 네 아빈데 왜 매번 네가 죄송해?”

“그치만 다 저 때문인걸요…. 아빠가 여길 떠났던 것도, 또, 또…. 이제 저 때문에 다시 전쟁터 가야 하는 것도요.”

나는 시선을 내렸다. 할아버지가 굳는 게 느껴졌다.

“아빠는 다른 나라 사람들 괴롭히는 나쁜 전쟁은 하기 싫을 텐데…. 그런데 저 때문에 하게 될 수도 있죠?”

“얘야, 리리스.”

“할아버지, 저는 진짜 괜찮아요.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아빠한테 나쁜 전쟁 나가지 말라고 말 좀 해 주세요. 네?”

할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으로 한참 나를 쳐다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네게는 어려운 말일지도 모르겠다만, 세상살이라는 것이 언제나 뜻대로는 되지 않는 법이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고 지키려는 것이 있으면 버려야 하는 것이 있지.”

“…….”

“네 아비는 항상 잃거나 버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어렸을 적엔 황제를 찾아가 계급제를 폐해 달라고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려는 걸 내 몇 번이나 막았지.”

아빠다웠다. 나는 울적한 기분에도 웃고 말았다.

“하지만 결국에는 순응하며 제 성질 죽이고 살았다. 나 때문이었어. 부모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거다. 선택의 순간에서 그 녀석은 항상 제 신념을 버렸거든. 아버지인 나를 위해 참고 살았고, 이제는 딸인 너를 위해… 네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하겠지.”

할아버지도 알고 있었다.

나를 군인이 아닌 그저 평범한 귀족 아가씨로 살게 하기 위해….

아빠가 칼을 들고, 자기 신념과 반대되는 싸움을 각오했다는 것을.

“이런 세상에서 살게 하는 것이 네게는 참으로 미안한 일이다. 네 부탁을 들어줄 수 없는 것도.”

할아버지는 내 머리 위에 손을 푹 얹고는 덧붙였다.

“나 또한, 네가 매일같이 사선을 넘나들어야 한다면…. 그 모습만은 도저히 못 보겠구나. 네 아비는 나보다 더한 마음이겠지.”

“…….”

“그저 언젠가는 이 세상이 바뀔 날이 오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할아버지는 그 말을 끝으로 침묵했다.

새벽바람이 조금 전과 달리 차가웠다.

* * *

파빌리온 제국 황궁.

에녹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 우두커니 서서 화려한 대전을 눈에 담았다.

붉은 융단 카펫이 깔린 대전 복도의 끝.

눈부신 금빛 황좌.

그 절대자의 자리에는, 7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변함없이 젊고 건강한 황제가 앉아 있었다.

에녹은 천천히 황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에녹의 뜻대로 조용히 준비한 복귀식 당일에는 익숙한 얼굴들 몇만 자리했을 뿐이었다.

황제, 니콜라스 폰 파빌리온.

그리고 그의 앞에 부복한 성기사단원들.

에녹은 그들의 가운데 우뚝 서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파빌리온의 태양, 위대하신 프리메라를 신하 에녹 루빈슈타인이 뵙습니다.”

“잘 돌아왔네. 제국의 위대한 검, 나의 충직한 신하여.”

미려한 얼굴에 다정한 웃음을 띤 황제가 자리에서 내려왔다.

“오랜 방황을 정리하고 제국에 헌신하고자 돌아온 나의 신하를 다시 보니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네.”

“심려 끼쳐 드려 송구합니다.”

“나의 충직한 신하에게 지난날의 과오를 물어 무엇 하겠는가. 그저 다시 나의 뜻에 따라, 평화라는 성기사의 본분을 위해 검을 들길 바랄 뿐이네.”

평화라.

조소를 삼킨 에녹은 황제 앞에 무릎 꿇고 부복했다.

“모든 것은 위대하신 프리메라의 뜻대로.”

* * *

황제의 방.

벽면의 지도를 보며 뒷짐 지고 있던 황제가 돌아보았다.

“딸도 데려오지 그랬나. 내 오늘 보기를 고대하였는데.”

석상처럼 앉아 있던 에녹의 얼굴 위로 미미한 균열이 일었다.

그 작은 변화에 황제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루빈슈타인의 핏줄이니 능력은 검증해 볼 필요도 없겠지. 제국을 위해 기꺼이 피를 흘릴 인재가 한 명 더 늘었다는 것에 짐은 얼마나 기쁜지 몰라.”

에녹은 꽉 주먹 쥐었다. 보자마자 하는 말이 딸의 징병 얘기라니….

무표정한 얼굴 너머 분노를 읽었으면서도 황제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이리로 와 보겠나.”

천천히 일어난 에녹이 황제의 옆에 다가가 그와 같은 것을 보았다.

대륙을 거의 집어삼킨 제국 지도.

황제는 그 옆에 무언가를 가려 놓은 천을 휙 걷어냈다.

“……!”

에녹의 눈이 커졌다.

죽은 전우들의 초상화였다.

“익숙한 얼굴들이 많지? 제국을 위해 기꺼이 희생한 선열들을 내 어찌 기리지 않을 수 있겠나.”

지독한 충격이 에녹을 덮쳤다.

함께 울고 웃던 전우들의 시체를 수습하던 많은 순간.

시간이 지났어도 전혀 바래지 않고 남아있는 끔찍한 기억.

“나 또한 슬프네. 제국의 안녕을 위해서라지만, 내 신하들을 사지로 밀어 넣는 일이니.”

“…….”

“전쟁은 참혹하지. 아비규환 속에서는 그 누구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어.”

전우들의 초상을 하나하나 훑는 에녹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럼에도 이 나라를, 나의 제국민들을 위해 멈춰서는 안 되는 일이야.”

“폐하.”

“그래, 에녹.”

황제가 다정히 대꾸했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십니까.”

비열한 의도를 짐작한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황제가, 에녹의 기억 속 끔찍한 전쟁의 참상을 끌어낸 이유는 뻔했다.

“불면 꺼질까 쥐면 터질까, 가만 두고 보기만 해도 아까운 딸이 아닌가.”

“…….”

“자네가 그런 딸을 어찌 사지로 보낼 수 있겠어.”

에녹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황제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어깨 위에 다정하게 손을 얹었다.

“마음 같아서는 자네의 딸이 그저 평화롭게 자라기를 바라네. 내 권력으로 편의를 봐주고 싶기도 하고. 하지만, 알잖나.”

“…….”

“자네만 부모가 아니야. 이 땅의 수많은 부모가 불공평함을 토로할 걸세. 그 누가 자식을 전쟁터에 보내고 싶겠어.”

황제의 자식들도 예외는 없었다.

리리스도 마찬가지다.

루빈슈타인의 핏줄이며 부모 모두 최상위 계급, 도스.

굳이 검증하지 않아도 고위 능력자일 딸에게는 피할 수 없는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자네에게는 힘이 있지. 딸을 지킬 힘이. 자식의 의무를 대신 짊어지겠다고 한다면, 그 누구도 불만을 표할 수 없을 힘이.”

뱀 같은 목소리가 에녹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옛날부터 항상 자네와 나의 뜻이 맞지 않는 전쟁이 있었지.”

그저 땅을 넓히기 위한, 짐승 같은 정복욕으로만 점철된 의미 없는 침략 전쟁.

“자네는 대륙을 호령하는 일이 부질없다고 늘 말해 왔지만, 글쎄.”

“…….”

“모든 것은 다, 나의 소중한 제국민들을 위해서네. 나는 이 제국을 더 강대하게, 그 누구도 넘볼 수 없게 만들 거야.”

“침공을 준비하십니까.”

에녹은 목을 죄는 기분으로 물었다.

그는 황제가 딸을 빌미로 어떤 요구를 해올지 예상하고 있었다.

딸을 위해 황제에게 제 목줄을 쥐여 줄 다짐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벼랑 끝에 내몰린 자신의 신념을 외면해야 하는 순간이 지독히도 괴로웠다.

“그래. 항상 한결같던 자네지만, 이번에는 다른 대답을 기대해 보지. 7년 전과 지금의 제국이 다르듯이….”

“…….”

“자네도 달라졌을 테니까.”

황제가 에녹의 귓가에 비열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이제 아버지가 되었으니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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