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5/261)

그렇다. 7년 전과 달리 아버지가 된 에녹에게는 지켜야만 하는 것이 생겼다.

신념보다 더 중요한, 딸이라는 존재가.

“…….”

에녹의 어깨를 두어 번 다독이던 황제가 다시 지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겨울쯤이 좋겠지. 모든 생명이 숨죽이는 때가 아닌가. 눈보라에 피 냄새가 덮일 걸세.”

그에 더 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았다.

올해가 지나기 전, 겨울. 아직 대륙 한쪽 끄트머리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들의 이름을 지워버리라는 뜻이었다.

“…….”

한참의 침묵 후에, 에녹은 황제를 지나쳐 걸었다.

그리고 잠시 멈춰 섰다.

“…준비하겠습니다.”

황제의 입에 웃음이 걸렸다.

* * *

황제의 방을 나오니 악시온이 기다리고 있었다.

“폐하와 무슨 얘기 했나?”

“뻔한 얘기.”

“…그렇군.”

둘 사이에는 더 말이 없었지만, 대화는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잠시 네 얼굴 보자는 사람이 있다. 만나고 돌아가.”

“누구.”

“셀레나.”

“…….”

숨 막히는 궁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어 빠르게 복도를 가로지르던 에녹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셀레나.

7년 전 함께 전장을 누볐던 동료이자 위대한 마법사.

그녀는 리리스의 친모였다.

“나를 왜?”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툭 내뱉은 악시온이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딸 얘기를 하고 싶겠지. 너 혼자 낳은 애 아니잖아. 엄마니까 딸 만날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겠지.”

“아, 그런가.”

에녹은 잠시 고민했다.

제도로 돌아오길 결심했을 때 아이 엄마를 떠올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리리스가 엄마를 궁금해한다면 당연히 만나게 해 주고픈 마음도 있었다.

다만 에녹은 반쯤 독단적으로 자식을 빼돌린 입장이었고 셀레나는 이미 새로운 가정을 꾸렸기에….

‘리리스를 만나고 싶어 한다면 그렇게 해 줘야겠지.’

다른 가족이 있는 엄마. 평범한 가정의 형태가 아니라는 것에 딸은 혼란할 수도 있겠지만, 에녹이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마저 걷던 걸음이 또 멈추었다.

셀레나였다.

고요한 복도 한가운데서 마주친 둘의 시선이 얽혔다.

“이따 보자.”

악시온이 자리를 비켜주자 셀레나가 다가왔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그래. 무슨 일이지?”

금발을 살짝 쓸어 올린 셀레나가 옅게 웃었다.

“여전하네. 필요한 말만 하는 성격은.”

“…….”

“우선 미안해. 알고 있겠지만, 당신 얘기 폐하께 한 거 나야.”

“괜찮아.”

에녹은 덤덤히 말했다.

거취를 알린 것. 친모인 셀레나에 대한 존중으로 터를 옮기지 않은 것. 전부 에녹의 선택이었다.

“네가 말하지 않았어도 폐하는 어떻게든 나를 찾아냈을 테니까. 마음 쓰고 있다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

“그래? 나 당신 얘기 하는 대가로 폐하께 이것저것 받았는데. 은퇴도 했고 아들 징병도 면제받았어.”

“알고 있어.”

셀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욕 들을 각오를 했는데 에녹의 반응은 생각보다 무덤덤했다.

“왜 돌아왔어? 당신이라면 어떻게든 도망칠 줄 알았는데.”

“딸이 제도에 오고 싶어 해서.”

“그렇구나. 아이는 어때? 잘 키웠어?”

“어. 이름은 리리스야. 착하고 밝아. 예뻐. 키는 또래보다 작은데 곧 클 거야. 편식이 좀 있거든.”

딸 얘기를 줄줄 늘어놓으며 웃는 에녹의 얼굴에 셀레나가 놀랐다.

“하나도 안 변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아이 얘기, 하려고 왔지?”

“맞아.”

“보여줄게. 그런데 아직 애한테 엄마 얘길 못 꺼내서….”

“아니야, 에녹.”

“……?”

“애한테 혹시라도 내 얘기 하지 말라고 부탁하러 온 거야. 아직 안 했다니 다행이네.”

에녹의 눈이 커졌다. 예상과는 다른 말이었다.

“그 애 곧 입소하지? 나 양성소에서 일하고 있거든. 아마 한 번은 마주칠 테니까.”

“아이를 안 봐도 된다고?”

“아마… 아이도 혼란스러울 거야. 나는 새로 가정도 꾸렸고 아들도 있잖아. 그 애 엄마가 되어줄 순 없으니까.”

“…….”

“내 아들, 다섯 살이야. 아들도 지금 양성소에 있어. 그래서 혹시라도 리리스…, 그 애가 날 보고 허튼소리라도 하면 아들 정서에도 안 좋을 것 같아서.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말문을 잃은 에녹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셀레나가 말했다.

“미안. 자식이 생기니까 정말 사람 마음 달라지더라. 당신이 가장 잘 알겠지만, 애를 위해선 못 할 게 없더라고.”

이내 그녀가 몸을 돌렸다.

“다시 한번 미안해. 잘 지내.”

에녹은 멀어지는 셀레나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혹시나 리리스가 들었다면 끔찍했을 대화다. 언제 어떤 식으로든 궁금해할 엄마의 존재를 아이에게 어찌 알려야 할지도 막막했다.

“하아.”

허공을 향해 가만 고개를 젖힌 에녹이 중얼거렸다.

“피곤하네….”

* * *

아빠는 이틀 밤을 자고도 사흘째 저녁 늦게야 돌아왔다.

사실 이것도 줄이고 줄인 일정이라고 들었다. 원래 황제가 준비한 복귀식은 일주일이나 됐다고.

“흐어어어. 공주야.”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꼬물꼬물 들어온 아빠가 나를 부둥켜안았다.

“아빠 얼굴이 반쪽이 됐네….”

얼마나 피곤했을지 안 봐도 눈에 훤해서 나는 얌전히 안겨줬다.

“그래? 아빠 못생겨졌어?”

“아니, 아니. 잘생긴 건 똑같은데 피곤해 보여. 고생했어.”

나는 덤덤히 말하고 무릎에 놓은 동화책을 펼쳤다.

“흠. 뭐 안 물어봐? 복귀식 어땠는지, 황궁에 뭐 있는지….”

“별로 안 궁금한데?”

“그래?”

“응.”

“…공주야.”

“응.”

벌렁 누운 아빠가 앉아 있는 나를 빤히 올려다봤다.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있잖아.”

“응.”

“있잖아….”

“모야? 뜸 들이지 말구 얼른 말해.”

“너 엄마 안 보고 싶어?”

“…….”

뜻밖의 질문에 나는 멈칫했다.

‘…가서 엄마라도 만나고 온 모양이구나.’

내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말 꺼내길 망설이는 아빠의 표정하며 마탑주에게 들은 바로 미루어 봤을 때 엄마가 무슨 말을 했을지는 뻔했다.

“엄마? 갑자기?”

“응. 제도에 왔으니까 궁금해할 법도 한데 지금까지 공주가 아무 말도 없어서.”

말끝을 흐리는 아빠의 얼굴은 꼭 벌 받길 기다리는 어린애 같았다.

내가 여기서 엄마를 보고 싶다 하면 무슨 변명을 해야 할지 고민스럽겠지.

‘그나마 마탑주한테 엄마 얘기를 미리 들어서 다행이네.’

안 그랬다면 지금 눈치 없이 나도 엄마 있었냐며 보고 싶다 했을 테니까.

“흠, 글쎄…. 혹시 아빠 황궁 가서 엄마라도 만났어? 나 봐야겠대? 나는 쪼끔 그런데.”

“응? 좀 그렇다니?”

아빠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는 책장을 팔랑이며 관심 없는 척 말했다.

“제도에 왔으니까 어딘가 엄마가 있겠지 생각은 했는데 모, 그렇게 보고 싶은 것도 아니구 만나면 어색할 것 같기도 하구…. 굳이 엄마 있어야 해?”

“안 궁금하다고? 옛날에는 엄마 어디 있냐고 아빠한테 물어봤었잖아?”

“그거야 다들 나처럼 아빠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친구들이 원래 집에는 엄마도 있는 거라구 하니까 궁금해서 물어봤지. 엄마가 보고 싶어서 물어본 건 아니었어.”

“그, 그래?”

“응. 그리고 지금까지 아빠밖에 없었는데 갑자기 엄마 있다 구러면 기분 이상할 것 같아. 내가 꼭 만나야 하는 거 아니면 안 보구 싶은데…. 알고 싶지도 않구.”

“…….”

“…만나야 해?”

책 읽는 척하던 눈을 들어 묻자,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아빠가 냉큼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어어, 공주 생각이 그렇다면 그래야지. 엄마 안 봐도 돼. 누군지도 몰라도 되고. 응, 그래.”

“알았어. 이제 자자.”

나는 책을 덮고 누워서 눈을 감았다. 아빠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내 방을 밝히고 있던 초 몇 개를 꺼트린 아빠가 옆에 누웠다.

“흐음.”

아빠는 곧바로 잠들지 못하고 한참 뒤척였다.

‘진짜 끔찍한 복귀식이었겠네.’

나는 생각했다.

재수 없는 황제의 얼굴을 봤을 거고, 황제는 분명 나를 약점 삼아 아빠를 협박했겠지.

전쟁을 준비하라고 했을까? 아마 그럴 거다.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오는데 마주친 엄마.

‘새 남편도 있고 아들도 있으니까 아예 모르는 사이로 지내자는 말을 했을까? 아니면 아빠가 내 얘길 먼저 꺼냈는데 만나기 싫다고 했으려나?’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는데 한숨만 나왔다.

아빠가 불쌍했다. 다 나 때문인 것만 같았다.

‘아니, 나 때문인 거 맞지, 뭐.’

나는 자꾸 뒤척이는 아빠의 품에 쏙 안겼다. 아빠가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아빠.”

“응, 공주야.”

“나는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하하, 아빠도.”

“나는 아빠만 있으면 돼.”

“…….”

뜬금없는 애정 표현이 갑자기 나온 엄마 얘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아빠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아빠의 품으로 더 파고들며 말했다.

“그냥 우리 둘이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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