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7/261)

[에녹 루빈슈타인 공작은 들어라!

당신의 신념을 버리는 것만이 딸을 지키는 방법은 아니다.

늙은 뱀의 간교에 이대로 순응할 셈인가?

그것이 정녕, 당신이 바라던 미래인가?

상상하라, 에녹 루빈슈타인!

어린 시절의 당신이 그토록 염원했던 세상을!

이 나라는 바뀌어야 한다!

당신은 할 수 있다!

당신만이 할 수 있다!

‘조제프 뤼트먼’을 찾아라.

그에 대해서는 당신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는 중부의 발테락 영지, 시가지 도박장에 가면 만날 수 있다.

위대한 혁명의 첫걸음!

나는 그가 당신에게 꼭 필요한 자임을 확신한다.

-L-]

“이게 무슨….”

에녹의 눈이 흔들렸다. 편지에는 어마어마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한참 멍해 있던 에녹이 재빨리 전에 L에게 받았던 편지를 찾아 펼쳐 보았다.

두 필체는 달랐다. L은 제 신상을 철저히 숨기고 있었다. 아마 그를 찾아내려 한들 쉽지 않겠지.

“대체….”

놀라 일어났던 몸을 털썩 앉힌 에녹이 편지를 다시 읽었다.

늙은 뱀의 간교에 이대로 순응할 셈인가?

황제가 요구한 침략 전쟁에 정말 나서려고 하는가?

당신의 신념을 버리는 것만이 딸을 지키는 방법은 아니다.

L은 에녹이 딸을 위해 황제의 뜻대로 움직이기를 결심한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이 나라는 바뀌어야 한다!

위대한 혁명의 첫걸음!

아무도 없는 집무실을 두리번거리던 에녹은 조용히 편지를 접어 서랍 깊숙이 숨겼다.

“이거 완전 미친놈이군.”

누군가 알면 난리가 날 내용이다.

대놓고 반란을 일으키라는 말이었으니.

“진짜 미친놈이야.”

그게 가능하겠는가?

혁명이 쉬웠으면 진작 누군가가 시도했을 터.

파빌리온 제국에서, 황실은 무소불위 권력의 상징이었다.

주신 ‘프리메라’가 하사했다 전해지는 위대한 능력은 대대로 파빌리온 황가에만 허락되었고 당연히 제국은 신권 정치를 내세웠다.

신으로부터 주어진 절대권력을 주장하는 황제.

그에 대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황제의 능력은 과연 신의 힘과도 비견될 만하였으므로.

“이 자식 대체 누구지?”

에녹이 눈썹을 구겼다. 일전에 보낸 편지도 그랬고, L이라는 자는 분명 자신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감시당하는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지만….

“뭐, 그래. 왜 하필 나한테 이딴 걸 보냈는지는 알겠군.”

에녹이 픽 조소했다.

어린 시절.

제 손으로 직접 황제의 목을 베어보겠다고 치기 어린 꿈을 꿨던 때가 있었다.

그런 꿈을 꿀 수 있었던 이유는 에녹이 자기 자신의 강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능력자들을 마음대로 세뇌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황제가….

유일하게 어찌할 수 없는 규격 외의 능력자이니까.

‘하지만 말 그대로 치기였지.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시절에나 꿨던 꿈이다.’

혁명은 무력만 가지고 되는 일은 아니다.

합당한 명분이 있어야 하는 법.

그러나 에녹에게는 그런 명분이 없었다.

동조해야 할 귀족들 대부분은 계급 사회의 수혜자였고 다들 황제의 통치에 만족하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진짜 미친놈….”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한테 이런 말 해 봤자….”

중얼거리던 에녹이 짜증스러운 눈으로 다시 서랍 속에 처박았던 L의 편지를 꺼내 펼쳤다.

깊어진 눈이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대체 이 자식 누구야!”

난데없는 혼란을 심어준 L.

에녹의 손에서 편지가 구겨졌다.

“비겁하게 숨지 말고 나와서 직접 얘기하든가.”

* * *

비겁한 딸은 걱정이 많았다.

‘지금쯤 아빠 내 편지 봤겠지?’

그 편지가 아빠의 몸속에 들끓는 정의로운 주인공의 피를 터뜨릴 수 있을지….

“체시어, 내 얘기 듣고 있어?”

“어.”

발터에게 여물을 먹이는 데 여념 없는 체시어를 보며 나는 입을 삐죽였다.

“거짓말. 내가 모라구 했는데?”

“아저씨가 갑자기 엄마 얘기 해서 마음이 안 좋다며. 너는 엄마 없어도 상관없는데 아저씨가 평생 혼자 사는 건 걱정된다고 그랬잖아.”

“으응? 다 들었네?”

“듣고 있다고 했잖아.”

한숨을 쉰 체시어가 내 옆에 와 털썩 앉았다.

나는 아직도 쓰다듬을 엄두가 안 나는 제피르를 보고만 있었다.

“정말 엄마가 없어도 괜찮은 거 맞아?”

체시어가 물었다.

“응, 난 진짜 괜찮아.”

“그럼 걱정할 필요 없잖아. 아저씨는 아저씨가 알아서 하겠지. 재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하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고.”

“그러니까 그게.”

나는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제 갑자기 엄마 얘기가 나온 후로 나는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바로… 주인공들의 사랑.

이제 현실이 된 이곳에서 주인공들은 원작을 끝마친 다음에도 계속 살아가야 한다.

세상은 평화를 찾았으니 주인공들도 행복해야 할 텐데.

‘여긴 로맨스가 없거든.’

피 튀기는 혁명 소설.

로맨스의 로, 아니, ㄹ도 없었던 <도스의 반란>.

원작 어디에도 주인공들의 연애 감정선 자체가 서술된 적이 없다 보니, 문득 두려워지는 것이었다.

만약 작가가 아빠와 체시어를 만들 때 ‘로맨스’를 한 줌도 넣지 않았다면?

복수, 정의, 반란, 뭐 이런 건 왕창 들이부은 주제에 ‘사랑’은 안 줬으면 어쩌지?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얘 장가갈 수 있을까?’

체시어는 무뚝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에서부터 로맨스 같은 거 안 키운다는 느낌이 폴폴 풍겼다.

“체시어.”

“왜.”

“너 가족 필요 없어?”

“…또.”

체시어는 인상을 찌푸렸다.

“너희 아버지 아들 하라느니 이상한 소리 할 거면 하지 마.”

“아아, 그래. 그거 말구.”

나는 꿈꾸듯 손을 모았다.

“네가, 너의 의지로 만든, 너만의 가족.”

“그건 또 뭔 소리….”

“네가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구 상상해 봐. 그럼 결혼을 하겠지?”

“…….”

“결혼하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아가도 생기겠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자, 눈을 감아! 상상해 보라구!”

“…….”

“빨리 감아!”

재촉하자 체시어는 못 이기는 척 눈을 감았다. 나는 그의 귀에 대고 천천히 말했다.

“아침에 눈을 떴더니 맛있는 음식 냄새가 집 안에 가득 차 있어. 예쁜 아내가 부엌에서 널 불러. 여보~ 우리 아들 기저귀 좀 갈아 줘요!”

체시어가 움찔했다.

“아가 방에 갔더니 너랑 아내를 반반씩 꼭 닮은 귀여운 아들이 웃고 있어. 기저귀 갈아주고 젖병 물려주니까 널 보면서 막 웃어. 빠빠, 빠빠…! 막 그래.”

“…….”

“너무 귀여워. 안아서 둥가둥가 해 주고 있는데 아내가 다가와서 너를 뒤에서 이르케, 이르케 딱 안아.”

나는 체시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제법 몰입하는 듯하던 그가 또 움찔했다.

“여보, 오늘 날씨도 좋은데 우리 도시락 싸서 피크닉 갈까요?”

“…….”

“눈부신 햇살. 지저귀는 새 소리. 졸졸 흐르는 시냇물…. 네 품에 안긴 아들이 막 빠빠, 빠빠 하구…. 아내는 기분이 좋은지 꽃 냄새를 맡다가 너를 돌아봐.”

왜인지 나는 체시어보다 더 몰입해서, 허공을 향해 눈을 반짝이며 기도하듯 손을 모았다.

“여보, 체시어. 사랑해요. 나는 너무 행복해. 우리 가족 이렇게 평생 행복하도록 해요.”

말을 마치고 휙 돌아보니 어느새 체시어는 눈을 뜨고 있었다.

어쩐지 표정이 묘했다.

“…어때? 내가 말한 건, 바로 이런 가족이야.”

“…….”

“어떠냐니까.”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정말?!”

나는 흥분해서 벌떡 일어났다.

체시어는 가만히 앉아 조금 더 생각에 잠겨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살 수 있다면. 뭐.”

“할 수 있어!”

나는 체시어의 앞에 쪼그려 앉아 그의 손을 딱 맞잡았다.

작가는 보고 있을까? 자기가 미처 넣지 못한 로맨스를 주인공들에게 열심히 수혈 중인, 이 나의 눈물겨운 노력을?

“체시어.”

“어.”

“우리, 사랑을 하자.”

체시어의 눈이 커졌다.

나는 멍해진 그를 두고 조금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당근 바구니를 뒤적이며 말했다.

“물론 말도 열심히 타구 공부도 열심히 하구 검도 열심히 휘두르구 다 좋지만.”

“…….”

“난, 인간의 삶을 완성하는 건 바로 사랑이라구 생각해.”

나는 제피르를 향해 관성적으로 당근을 들이밀며 덧붙였다.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사람들은 불쌍하다구. 그러니까 우리 꼭, 사랑을 하자. 체시어.”

우리는 서로를 가만히 바라봤다.

체시어는 이내 대답했다.

“…그래.”

“으하항, 좋아.”

와삭―

그때.

체시어의 눈이 커졌다.

나도 놀라서, 체시어를 바라보고 있던 고개를 뻣뻣하게 뒤로 돌렸다.

“으, 으응?”

제피르가… 제피르가… 내가 준 당근을 먹고 있었다!

당근 하나를 금세 해치운 제피르를 멍하니 보다가 나는 다시 체시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체, 체, 체시어. 봤어? 봤어?”

“어, 봤어.”

체시어는 재빨리 다가와 제피르의 우리를 열었다.

“뭐 해?”

“쓰다듬어 봐.”

“뭐, 뭘? 제피르를?”

“어.”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체시어가 시키는 대로 제피르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세, 세상에.”

손만 뻗으면 날카롭게 굴던 제피르가 맞나? 세상에서 제일 평온해 보였다.

감동해서 멍하니 서 있는데 체시어가 벽에 걸려 있던 안장을 집어 제피르에게 다가갔다.

“타, 탈라구? 아직 그건 좀….”

체시어는 조심조심 제피르의 등에 안장을 씌웠다. 다행히도 얌전했다.

드물게 흥분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던 체시어가 갑자기 한쪽 무릎만 세운 자세로 꿇어앉았다.

“여기 밟고, 한번 올라가 봐.”

“으응?”

“빨리. 조심해. 내 어깨 잡고.”

이거 괜찮나. 나는 쭈뼛쭈뼛 체시어의 어깨를 짚고 그의 허벅지 위에 발을 올렸다.

쑥 몸이 솟자 체시어가 나를 밀어 올려 제피르의 등 뒤에 태워주었다.

“우아. 와? 어. 세상에?”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성공이었다. 제피르는 여전히 얌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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