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격의 순간.
눈시울이 아렸다.
입을 못 다문 채 있으려니 체시어가 내 표정을 보고 픽 웃었다.
“제피르으….”
체시어는 고삐를 걸고 안장에 붙은 등자까지 꼼꼼히 확인한 뒤에 천천히 제피르를 이끌었다.
“꽉 잡고. 천천히. 몸 수그리지 말고 반듯이 세워.”
“아, 안 떨어지겠지?”
“괜찮아. 내가 옆에 있을게.”
“으응.”
걱정과 달리 승마는 수월했다.
괜히 명마가 아닌지 제피르는 내 호흡에 맞춰 아주 천천히, 안정적으로 걸어 주었다.
“흐윽. 감동이야.”
울컥한 나는 시큰해진 코를 훌쩍 삼키며 제피르의 보드라운 갈기를 쓰다듬었다.
“제, 제피르…. 킁, 태워줘서 정말정말 고마워….”
울기까지 하는 나를 보고 함께 천천히 걸어 주던 체시어가 소리 내어 웃었다.
“…축하해.”
“응!”
* * *
제피르는 그날 리리스를 태우고 반나절 정도 승마장을 거닐었다.
리리스의 실력은 형편없었다.
몸도 작았고 조금만 속도를 내려 해도 중심을 잡기 어려워했다.
결국, 제피르는 리리스가 혹여나 떨어질까 봐 신경 쓰느라 힘차게 달릴 수 없었다.
[드디어 자존심 접었냐?]
발터가 옆에서 비아냥거렸다.
[내일 대회 나가게?]
[…….]
[인간적으로, 아니, 말적으로 대꾸 좀 해 줘라, 새끼야!]
제피르는 성을 내며 투레질하는 발터를 무시했다.
대회라….
“제피르, 혹시 내일 나랑 같이 가 줄 수 있어? 다른 말들이랑 경쟁하러 가잔 게 아니야. 우리… 가서 꽃구경도 하고 산책도 하고 그러자. 응?”
리리스는 수줍게 웃으며 그렇게 한참 마구간에 머물다가 돌아갔다.
제피르는 아닌 척해도 한참 들떠 있던 리리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슬쩍 웃었다.
[…뭐야, 너? 뭔 이상한 소리를 내? 설마 웃은 거야?]
[닥쳐.]
마구간의 밤이 저물어갔다.
* * *
이튿날, 승마 대회 당일.
경기가 펼쳐지는 제도 외곽의 자르트 언덕은 이른 아침부터 참가 인원들과 구경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참가자들은 나를 포함해 고작 일곱 명.
다들 입상에 혈안이 되어있기에, 우승자가 뻔한 종목은 참여율이 낮다고.
‘데이몬 마티니가 뭐가 무섭다고 애들이 이것밖에 안 나왔담.’
나는 대기장을 둘러보았다.
선생 기수(騎手)와 함께 말을 점검 중인 귀족 꼬맹이들, 기삿거리를 따기 위해 수첩을 들고 옹기종기 모인 기자들이 보였다.
“울 딸 불안한데….”
아빠는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승마모를 씌워주고 벨트까지 턱에 단단히 고정해 주면서 걱정했다.
슬쩍 주변 눈치를 본 내가 속삭였다.
“아니, 아빠. 대체 모가 불안해? 낙마 방지 마법 때문에 엉덩이도 딱 붙어가지구 안 떨어지는데.”
“그래도….”
“여기서는 뭐만 해두 다 신문에 난다며. 기자들 많은데 루빈슈타인 공작 극성이라구 욕하는 기사 나오겠어. 빨리 가, 쫌.”
이 뜨거운 시선들이 느껴지지 않는 걸까?
다른 애들 엄마, 아빠는 결승선 너머 시상식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아빠만 여기 와서 난리였다.
“너 어제 처음 제피르 탔잖아.”
“응, 그리고 다섯 시간 정도 연습했지.”
“그래. 고작 다섯 시간. 그러니까 아빠가 안 불안해?”
“아빠, 미안한데 나 어차피 이길 생각 없어. 장애물 코스는 연습도 안 했는걸. 그냥 제피르랑 경치 좋은 언덕 나들이나 천천히 하고 갈게.”
나는 도도하게 서 있는 제피르를 안으며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제피르는 아주 온순했다. 그게 또 좋아서 나는 뽀뽀하듯 입술까지 비비적거렸다.
“그렇게 좋아?”
“응, 넘무 좋아. 울 제피르처럼 이쁜 말 봤어, 아빠?”
“못 봤다, 못 봤어.”
아빠는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그때.
“엇, 체시…, 와아?”
승마복으로 갈아입은 체시어가 대기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이고, 녀석. 잘생겼네.”
“그, 그르게.”
검은 승마모 아래 특유의 무심한 표정이 멋진 얼굴하며, 비율 좋은 다리에 착 감긴 흑색 부츠까지.
위엄 넘치는 흑마 발터까지 옆에 끌고 등장한 소년 기수의 화려한 미모는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그만. 주인공인 거 알겠으니까 그만…. 엑스트라 그만 때려!’
나는 후광이 비치는 듯한 착각에 손을 들어 눈을 가려야만 했다.
아빠도 그렇고 체시어도 그렇고 이런 등장 타임이면 꼭, ‘자, 봐라! 이 미천한 엑스트라들아! 내가 바로 주인공이다!’ 하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 같았다.
“…너, 정말 괜찮겠어? 장애물 코스 연습이라도 해 보라니까.”
체시어는 오자마자 나를 걱정했다.
“아니야. 어제 다섯 시간 빨리 걷기 연습만 한 것도 너무 힘들었다구. 대회 안 나가겠다고 제피르랑 약속했는데 이만큼 나랑 연습해 준 것도 대단해. 장애물 나오면 안 넘고 돌아서 가지, 모. 우승은 네가 해.”
제피르의 등에 타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 셈이었던 내 계획은 그대로였다.
그때.
“엇, 왔네요.”
“드디어 유력한 우승 후보께서 오셨구먼.”
기자들이 웅성거리며 눈을 빛냈다.
데이몬 마티니였다.
그는 최고급 승마복을 차려입고 척 보기에도 관리가 잘 된 갈색 말을 끌고 왔다.
건방진 표정으로 들어오던 데이몬이 나를 발견하고 흠칫했다.
정확히는 내 옆에 선 제피르를 보고.
“제, 제, 제피르?”
그는 곧 엄청난 존재감을 뽐내는 체시어와 발터까지 발견하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응, 스포트라이트는 네 거 아냐.’
숨만 쉬어도 주목받는 주인공 앞에서 어디 악당 엑스트라 따위가 주름을 잡아.
나는 히죽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루빈슈타인 공작 각하. 처음 뵙습니다. 저는 마티니 백작 가문의 삼남, 데이몬 마티니입니다.”
데이몬은 표정 관리가 잘 안 되는 얼굴로도 가장 먼저 아빠에게 와 인사했다.
“반갑군, 마티니 영식. 좋은 경기 기대하지.”
“예, 예….”
침을 꼴깍 삼킨 데이몬이 이내 나와 제피르를 힐끔 보았다.
“참가자 명단에 공녀가 있어서 놀랐는데…. 예, 예쁜 말을 가지고 왔네요?”
“안녕하세요, 마티니 영식? 이 애 이름은 제피르예요.”
나는 일부러 크게 말했다.
동시에 기자들이 일제히 수첩을 들었다.
‘이 시간만을 기다렸다, 인성 터진 놈아.’
내가 처음 대기장에 들어왔을 때 제피르를 알아본 기자들은 전부 의아해했다.
유력한 우승 후보인 데이몬의 말이 왜 루빈슈타인 공녀 손에 있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제피르는 다친 말이었는데, 사연이 너무 딱해서 데려오구 싶었어요. 부상을 당했다고 전 주인이 마사에 도로 팔았다지 뭐예요?”
“히익!”
“와아, 그런 거였….”
“어머나.”
특종을 잡은 기자들의 끼적이는 손놀림이 빨라졌다.
나는 웅변대회라도 나온 것처럼 목소리를 높여 계속 말했다.
“전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정말 나쁜 사람 아니에요? 다리를 다친 말은 도살장으로 보낸다던데 그걸 알면서 버렸나 보더라구요? 어떻게 자기 친구를….”
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입을 삐죽이며 제피르를 끌어안았다.
기자들이 입을 틀어막으며 수첩 위로 마구 펜을 끼적였다.
“저, 저, 저것들은 뭘 쓰는 거야?”
그 모습에 데이몬이 사색이 됐다.
‘에휴.’
반쯤은 연기로 시작했지만, 막상 제피르를 안고 있으려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주인을 알아보는 모양인지 제피르는 데이몬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 그럼 조, 좋은 경기 하도록 하죠!”
이내 데이몬은 도망치듯 우리 앞을 떠나갔다.
* * *
“울 딸 진짜 조심해야 해? 제피르, 우리 공주 안 다치게. 알지? 조심조심?”
제발 그만 좀 하라는데도 아빠는 경기 시작 30분 전까지 걱정하다 겨우 시상식장으로 향했다.
대회가 끝나고 나면 아마 <루빈슈타인 공작, 딸 바보를 넘어선 딸 등신?!> 따위의 헤드라인을 단 기사들이 쏟아져 나올 게 틀림없었다.
“제피르, 우린 천천히 산책하자. 주변 경치나 좀 보구…. 아! C코스 들어가면 호수 있다는데 목마르면 가서 물이나 좀 마실까?”
나는 A부터 E코스까지 그려진 지도를 마지막으로 훑어보고 제피르의 등에 올라탔다.
물론 우리 집 승마장에서 가볍게 달리는 수준만 연습한 내가 경기 코스를 숙지할 필요는 없었다.
데이몬의 터진 인성을 널리 널리 알렸고 우승은 체시어가 할 테니 내 할 일은 이미 끝난 셈.
“참가자분들은 출발선 앞에 서 주십시오. 각 코스의 시작점에는 심판이 배치되어 있으니 기권 등의 이슈가 있을 시에는 도움 요청하시면 됩니다. 예포가 터지면 출발해 주십시오.”
일곱 마리의 말들이 출발선에 나란히 섰다.
나는 체시어와 데이몬의 얼굴을 힐끔 살폈다. 독기 어린 데이몬의 표정과 달리 체시어는 마냥 무심해 보였다.
‘후후, 볼만하겠군.’
악당 엑스트라가 ‘으윽, 분하다!’ 외치는 단골 멘트를 곧 들을 수 있겠지.
파앙―!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예포가 빵 울렸고,
“……?”
나는.
“끼, 꺄아아아악!”
기다렸다는 듯 총알처럼 뛰쳐나가는 제피르의 속도에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우악! 와아악!”
얼마나 놀랐던지 고삐를 놓치고 말았다.
낙마 방지 마법이 걸린 안장이 아니었더라면 진작 데굴데굴 굴러떨어졌을 속도였다.
“와, 아아, 으아아아!”
바람 때문에 잘 뜨기도 힘든 눈이 팽글팽글 돌았다.
나는 분유 먹던 힘까지 짜내 더듬더듬, 놓쳤던 고삐를 간신히 잡았다.
‘이, 이게 뭐야! 뭐냐고! 뭔 일이야!’
내가 대회를 잘못 나왔나?
말과 교감하며 차근차근 코스를 밟아 가는 승마 대회가 아니었던가?
여기 경마장인가?
누구 제피르와 루빈슈타인 공녀에게 돈 거신 분?
‘이게 진짜 무슨 일이야? 우리 산책하기로 한 거 아니었니, 제피르?’
나만의 생각이었나 보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피르는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슉슉 시야에 풍경이 빠르게 스쳐 갔다.
울렁이는 속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체감상 출발한 지 3분도 안 된 것 같은데.
다른 말들은 보이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