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앞을 보고 고삐를 그러쥔 나는 이를 꽉 물고 제피르와 호흡을 맞추려고 애썼다.
“허억. 으아.”
하지만 쉽지 않았다. 자동차만큼이나 빠른 속도인데 승차감은 좋지 않다.
위아래로 마구 날뛰는 몸과 흔들리는 시야에 속이 울렁거렸다.
“제피, 제피르…. 나, 어억. 주, 죽겠….”
개미만 한 목소리로 말했을 뿐인데 어쩐지 제피르는 알아들은 것 같았다.
마치 제동 걸듯 급히 속도가 떨어졌다.
‘어라, 설마 이런 게 교감?’
또 눈물 날 뻔. 이제야 한숨을 돌린 나는 눈을 부릅떴다.
“미안해, 제피르. 네가 이렇게 빨리 달리고 싶어 하는지 몰랐어. 내가 연습을, 연습을 더 했어야 했는데….”
그냥 고삐를 잡고 버티는 것도 힘들어하는 꼴이라니.
명마인 제피르의 등에 타기에는 한없이 부끄러운 주인이 아닌가!
“미안….”
분명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으면서도 나 때문에 속도를 조절하는 게 느껴져서 미안했다.
그렇게 한참 직진 코스를 달리다 보니 옆으로 다른 말이 휙 스쳐 지나갔다.
발터와 체시어였다!
체시어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게 힐끔 시선을 한번 던진 뒤에 멀어져 갔다.
“잘한다, 발터! 이겨라, 체시어! 할 수 있어!”
팔자 좋게 응원이나 하자마자 B코스가 시작되었다.
두 명의 심판과 함께, 앞에 빨간 허들이 보였다.
“우악! 와앗!”
제피르는 깔끔하게 허들을 넘기 시작했다.
몇 개는 걸려 주고 넘어뜨려 주고 감점도 당하며 달리는 법인데.
‘하긴. 연습을 안 한 건 나지, 제피르는 지겨울 정도로 몸에 익은 코스일 테니까.’
만약 입상이라도 하면 매우 부끄러울 듯했다. 나는 정말 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달리는 건 제피르요, 그의 등에 안전하게 타고 있는 이유도 마법 걸린 안장 덕이었으니.
“너 진짜 잘한다아!”
일렬로 세워진 장애물을 좌우로 번갈아 통과하는 제피르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얼마나 혹독한 훈련을 받았으면 코스 하나하나가 몸에 배어 있을까.
‘뭔가 좀 슬프네….’
생각하자마자 장애물이 끝났다.
다음은 가장 긴 코스로, 언덕을 살짝 올라 다시 내려와야 하는 커브 코스였다.
고도가 높아지자 산등성이에 숨겨진 호수가 드러났다. 수면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우와아.”
나는 감탄했다.
하지만 마냥 한가로운 경관 감상도 잠시.
말발굽 소리가 겹치는 기척에 뒤를 보니, 바짝 붙어 따라오고 있는 데이몬이 보였다.
“빨리 달려! 속도를 더 내라고!”
데이몬은 말에게 마구 소리쳤다.
암만 봐도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달리고 있는 것 같은데, 나를 위해 설렁설렁 달리는 제피르보다도 느렸다.
“이 멍청아! 저 다리 병신한테도 질 셈이야? 장애물도 없는 코스에서 이딴 속도면 어떡하라고!”
“뭐라구?”
저 자식 말본새 보소.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완전범죄를 저지르기 좋은 순간이었다.
“꼴 조오타! 언젠 뭐, 귀족의 품위 어쩌고 하더니 후달리니까 입에서 쓰레기만 나오는구나?”
“……?”
나란히 달리고 있던 데이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내 그가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확! 멀 꼬라바, 이 인성 터진 놈아!”
“지, 지금 뭐라고…?”
“승마 천재 다 거품이었죠? 실력 개미 똥만큼도 없는데 작년에도 제피르빨로 이긴 거였죠? 제피르 없으니까 완전 후달리죠? 1등 이미 물 건너갔죠?”
나는 얄밉게 턱을 흔들며 데이몬을 약 올렸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너, 너 죽을래?! 이 쬐끄만 게!”
“응, 못 죽이죠~? 승마 처음인 나한테도 밀리죠~?”
“닥쳐! 닥치라고!”
“응, 안 닥치죠~?”
잔뜩 약이 올라 시뻘게진 데이몬의 얼굴을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
나란히 달리던 것도 잠시 우리의 격차는 금세 벌어졌다.
“아아아악!”
뒤에서 분을 못 이긴 데이몬의 포효가 들렸다.
“달려! 이 멍청한 새끼야! 달려! 달리라고!”
히이이잉―!
퍽퍽 내려치는 소리와 함께 말 울음소리가 났다. 억지로 속도를 붙인 말이 다시 나를 따라붙었다.
“뒤졌어, 진짜!”
뭐지? 적잖이 화가 났는지 데이몬의 눈은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거리를 바짝 붙여 허공에서 허우적허우적 몇 번 손을 뻗더니 이내 내 허벅지를 꽉 움켜쥐었다.
그 순간.
파직, 뭔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헐.’
나는 곧바로 깨달았다.
데이몬이 내 안장에 걸린 낙마 방지 마법을 풀어버린 것이었다.
동시에 안장에 딱 붙어있던 내 엉덩이는 떨어져 들썩였고 발에 묶인 등자도 헐렁해졌다.
“꺄아아악!”
뭘 해도 떨어질 일 없어 안심하고 제피르에게 몸을 맡기고 있던 나는 놀라 소리쳤다.
제피르도 놀랐는지 급히 속도를 내렸다. 하지만 급제동이 더 역효과였다. 몸이 앞으로 쏠리며 등자에서 발이 홀랑 빠졌다.
“아, 으아악!”
고삐를 놓친 내 몸이 들썩이며 부웅,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이, 이거 실화냐….’
순간 시야가 슬로모션처럼 느려졌다.
눈부신 하늘.
빛나는 호수.
산등성이의 녹색 전경.
우당탕―!
“으윽.”
나는 오른쪽 팔부터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날카로운 돌 몇 개가 튀어 뺨이 살짝 아렸다.
“아흐흐.”
온몸이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댔지만, 정신까지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곧바로 팔다리를 움직여 봤다. 뼈가 부러지거나 하지는 않은 듯했다.
“와, 와. 진짜 인성 터진 놈….”
나는 제일 아픈 오른쪽 팔을 잡고 멀어지는 데이몬의 말과 제피르를 멍하니 쳐다봤다.
아무리 약이 올랐다지만, 대놓고 반칙까지 저지르다니.
아니다. 반칙이 다 뭔가.
명백한 실격 사유에 크게는 가문 간 다툼으로까지 번질 행동이었다.
“네 이놈…. 우승은 물 건너갔다, 이제….”
나는 주춤주춤 일어났다.
왔던 길을 돌아가 심판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푸르르르.
그때, 별안간 말발굽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제, 제피르?”
―제피르가 돌아왔다.
‘아니, 이럴 수 있어?’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가 주인 없다고 혼자 멈췄다가 왔던 길을 거슬러 돌아올 수도 있는 건가?
우당탕탕 어리둥절 승마의 세계….
“제피르, 대체 어뜨케 돌아왔어? 어휴, 기특해라.”
나는 제피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돌아가서 심판한테 데이몬이 반칙 썼다고 알리자. 쟤 완전 바보야. 뻔히 탄로 날 짓을 왜 하지?”
정말 이해가 안 됐다.
“C코스 동시에 들어온 건 나랑 걔뿐이고 내 안장에 마법이 풀렸는데 나는 아직 마법 못 쓰거든. 내 손으로 못 풀어. 그러니까 본 사람이 없어도….”
조잘거리며 돌아가는데, 내 뒷덜미가 턱 잡혔다.
“으응?”
제피르가 내 목깃을 물고 있었다.
그는 꼭 눈으로 말하는 듯했다.
[계속 달리자.]
―그렇게.
“지, 진심이야? 나 못 해….”
낙마 방지 마법을 다시 걸 수도 없는 상황.
계속 달리기 위해서는 오로지 내 힘으로만 버텨야 했다.
“안 돼. 무서워. 나 못….”
고개를 젓는데 제피르의 푸른 눈이 나와 딱 마주쳤다.
짧은 순간, 눈빛이 읽혔다.
달리고 싶은 욕망.
이기고 싶은 의지.
힘든 훈련과 학대에 지쳐서 더는 달리고 싶지 않은 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너 달리고 싶구나.’
승부욕 따위 없는 나와 달랐다.
“…그, 그래.”
해 보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는 심호흡을 하고 몸까지 낮춰 주는 제피르의 등에 다시 올랐다.
“절대 안 놓칠게. 너도… 나 떨어지지 않게 조심히 달려 줘야 해?”
푸르르르,
[날 믿어.]
우는 소리가 꼭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보자구!”
제피르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마법이 풀린 안장은 위태로웠고 나는 전과 달리 허벅지에 분유 먹던 힘까지 줘야 했지만.
‘와, 이게 진짜 승마구나?’
오히려 확실히 깨달았다.
각성한 느낌.
마치 처음 자전거 타는 데 성공했던 그 느낌이었다.
‘계속 마법 걸고 탔으면 실력은 하나도 안 늘었겠어!’
그렇게 나는 달리면서 배웠다.
말과 함께 호흡하는 법.
최대한 무리가 가지 않게 몸을 자연스럽게 맡기는 법.
“…대체 왜 이러는 거야아악!”
다시 장애물이 시작되는 D코스에 들어서는데 데이몬이 보였다.
왜인지 데이몬의 말은 허들 앞에 멈춰 흥분한 듯 씩씩대고 있었다.
‘응, 주인이 저 모양인데 나 같아도 파업하고 싶겠다.’
나는 쯧쯧 혀를 찼다.
“어라?”
그때 잘 가던 제피르가 장애물을 넘지 않고 데이몬의 옆에 우아한 포즈로 멈춰 섰다.
‘왜 멈추지?’
생각하던 나는 깨달았다.
‘아하, 혹시 한 번 더 약 올리란 뜻인가?’
나는 히죽 웃고는 데이몬을 향해 턱을 쭉 내밀며 말했다.
“승마 천재 다 죽었죠~? 반칙 써도 못 이기죠~?”
“이, 이이이익!”
그러자 제피르는 기다렸다는 듯 다시 장애물을 넘기 시작했다.
아, 이런 것이 교감이구나.
감동이었다.
“꺄하하하! 제피르, 넌 최고야!”
우리는 장애물 코스를 무난히 지나 마지막 직진 코스로 접어들었다.
쌩쌩 달리는 이 순간.
폐부 깊숙이 들어차는 시원한 공기.
‘나 혹시 승마 천재?!’
굴러떨어졌던 몸이 아픈 건 느껴지지도 않았다.
저 멀리 시상식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과 함께 결승선이 보였다.
결승선….
‘오잉? 결승선?’
분명 체시어가 압도적인 차이로 앞서갔건만 왜인지 빨간색 결승선 라인이 아직 끊기지 않은 채였다.
‘체시어는 어디 있지? 아, 저기!’
곧 그들이 보였다.
발터는 왜인지 멈춰서 주변을 돌고 있었고 체시어는 스치듯 나와 눈이 마주치자 피식 웃어 보였다.
어리둥절한 와중.
제피르는 계속 힘차게 달렸고,
“와아아아!”
우리는 그대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