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50/261)

“방금 막 첫 번째 참가자가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우승, 리리스 루빈슈타인 공녀!”

심판이 목소리를 높여 내 우승을 알렸다. 예상 못 한 우승자의 등장에 시상식장은 술렁였다.

고삐를 당겨 제피르를 멈춘 나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뒤이어 체시어가 들어왔다.

‘와, 설마 쟤… 나 1등 하라고 일부러 결승선 안 넘고 기다린 거야?’

말이 되나. 질주 본능이 있는 말을 데리고 저렇게 조절하는 것이 더 어려울 텐데.

거의 말과 한 몸 수준의 교감이 아니고서야….

나는 혀를 내둘렀다. 역시 주인공이었다.

“우승을 축하드립니다. 낙마 방지 마법을 해제해 드릴게요.”

관계자는 내가 말에서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다가왔다.

그리고는 놀랐다.

“어어?”

마법은 이미 풀려 있었고 가까이에서 확인한 내 상태는….

처참할 테니까.

뺨이 쓰라렸고 온몸에 멍이 든 것처럼 욱신욱신 아팠다.

나는 등자에서 쑥 뺀 발을 덜렁덜렁 흔들었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본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뭐지? 왜 저렇게 다친 거람?”

“떠, 떨어졌나 본데?”

“미쳤어? 낙마 방지 마법 제대로 안 걸려 있었어?”

“그럴 리가요! 출발 전에 분명히 확인했는걸요!”

대회 관계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전부 사색이 된 얼굴로 벌벌 떨었다.

그들은 전부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럴 만도. 나는 평범한 참가자도 아니고….

첫 승마에 최연소 참가자.

심지어.

“리리스!”

그 루빈슈타인 공작의 딸이니까.

관계자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길을 터 주자 아빠가 놀란 눈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뒤에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이게 무슨….”

“아빠….”

나는 팔을 뻗었다. 아빠는 나를 안고 입을 못 다문 채 여기저기 확인했다.

“왜, 왜 이렇게 다쳤어? 떨어진 거야? 마법은 왜 풀려 있고?”

답할 새도 없이 아빠가 분노한 얼굴로 휙 돌아보았다. 할아버지는 이미 머리끝까지 화가 난 표정이었다.

둘의 기세에 관계자들은 일제히 목을 집어넣고 움츠러들었다.

“아니에요, 아빠. 마법은 잘 걸려 있었어요. 중간에 풀린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왜…!”

그때 데이몬이 결승선을 통과했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알아본 그의 얼굴은 새파랬다.

‘이제야 걱정이 되냐? 쯧쯧.’

나는 한숨을 쉬며 아빠의 품에서 내려왔다.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고요해진 시상식장.

전부 나를 주목하고 있었다.

와중에도 펜을 들고 눈을 빛내는 기자들이 보였다.

“C코스에서 마티니 영식이랑 같이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마티니 영식이 제 안장에 걸린 마법을 풀어 버렸어요.”

“헉! 그럴 수가….”

“맙소사!”

“그, 그럼 반칙이잖아?”

“반칙인 거 몰랐겠어? 질 거 같으니까 충동적으로 그랬겠지!”

기자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말에서 내린 데이몬은 우두커니 서서 안쓰러울 정도로 벌벌 떨고 있었다.

“마법 없이는 제가 아직 승마가 서툴러서…. 한 번 떨어졌어요. 그때 다친 거예요.”

아빠가 분노한 얼굴로 데이몬을 쳐다보았다.

아들이 사고를 친 걸 알았는지 마티니 백작 부부는 허둥거리며 달려와 어쩔 줄 몰라 했다.

“부끄러운 일이군.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소.”

할아버지가 백작 부부와 데이몬에게로 발을 돌렸다.

“잠깐만요!”

나는 허둥지둥 달려가 할아버지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이번에도 기자들이 좋은 기사를 쓸 수 있게 목소리 높여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할아버지.”

“뭐?”

“좀 아프긴 하지만, 엄청 크게 다치지는 않았는걸요. 그리고 저는 마티니 영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 모두 마티니 영식만 보고 있으니까, 꼭 우승하고 싶었을 거예요.”

“어머, 세상에.”

“뭐야? 이걸 용서한다고?”

기자들의 펜이 빠르게 움직였다.

“할아버지, 이건 그냥 마티니 영식이 자기도 모르게 한 거니까 혼내지 말아 주세요. 부탁이에요.”

할아버지가 가만히 나를 내려다봤다.

“이야, 괜히 루빈슈타인이 아니네.”

“저게 귀족의 미덕이긴 하지….”

“아무리 그래도 저게 용서가 돼?”

“대단하군요. 아직 어린데.”

웅성거리는 기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웃음을 삼켰다.

체시어의 배려로 기왕 우승까지 한 김에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얻어낼 것은 다 얻어낼 것이다.

우승 트로피.

가문의 명성.

관대하고 너그러운 귀족의 이미지까지…!

‘내가 생각해도 좀 약았지만.’

인생은 원래 이런 거다.

다리에는 별 이상이 없었지만, 나는 절뚝절뚝 걸어 데이몬에게로 다가갔다.

내가 불쌍하게 한 걸음 뗄 때마다 주변에서는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좋은 승부였어요, 마티니 영식.”

악수를 건네자 내 연기에 약이 오른 데이몬이 눈살을 구기며 벌벌 떨었다.

“악수 안 받아주는 것 봐.”

“아니, 공녀가 저렇게까지 하는데 왜 저래?”

“우승 트로피를 뺏겼으니 분하기도 하겠지.”

주변의 웅성거림에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데이몬이 이내 억지로 악수를 받았다.

“다음에 만나면 꼭 정정당당하게 겨뤄요, 우리.”

“…네, 공, 녀. 미, 미안하게 돼, 으, 읐습니다.”

다 쳐다보고 있으니 사과는 해야겠고 내키지는 않은지 데이몬은 이를 으득 물고 말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포옹하자는 의미로 양팔을 벌렸다.

“정말 대단하네요. 실력도 실력이고 배포도 엄청나요.”

“루빈슈타인의 후계자라면 저 정도는 하셔야 한다는 거지!”

몸을 낮춘 데이몬의 어깨를 끌어안자 주변에서는 나를 찬양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아…! 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나는 웃으며 데이몬의 귀에 아주아주 조용히,

“빡치죠~? 완전 열 받죠~?”

속삭여주었다.

* * *

5월의 봄 축제는 화려하게 막을 내렸다.

축제 기간 최고의 이슈는 단연 승마 대회.

신문 기사는 착실하게 쏟아졌다.

<최연소 승마 대회 우승자 탄생!>

<루빈슈타인의 금지옥엽, 승마 대회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다!>

<루빈슈타인 공녀, “대회 전날 다섯 시간 연습했을 뿐이에요.”>

<루빈슈타인 공작, 복귀식 이후 첫 공식 석상에 나타나>

<2등도 루빈슈타인? 공작이 후견하는 소년, 그는 누구인가>

<마티니 백작 영식, 우승에 눈이 먼 반칙 소동>

<루빈슈타인 공녀, “마티니 영식의 마음 이해해.” 귀족의 미덕을 보이다>

<제국 승마 협회, 마티니 백작 영식의 향후 승마 대회 출전 권한 영구 박탈!>

<마티니 백작 영식, 전년도 파트너인 명마 ‘제피르’ 파양 논란>

<루빈슈타인 공녀, ‘제피르’의 사연이 딱해…. 부상당한 말 입양, 파도 파도 나오는 미담>

헤드라인 잘 뽑힌 신문들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제피르, 웃어! 이거 평생 남는 거야!”

좋은 일은 또 있었다.

나는 제피르를 쓰다듬다 멀리서 다가오는 체시어와 발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체시어, 빨리 와!”

우리는 아름다운 공작저 정원을 배경으로 나란히 포즈를 취했다.

그러자 이젤과 붓, 팔레트를 늘어놓은 중년의 사내가 나비 모양의 콧수염을 씰룩였다.

“오른손으로 고삐를 잡으시고, 음. 왼손은 가볍게 내리시고요.”

“이렇게요?”

“네, 지금 그 자세가 딱 좋군요.”

그는 궁정 화가였다.

내 우승 소식을 들은 황제가 친히 기념 초상화를 그리라고 명하며 보냈다고.

지체 높은 궁정 화가가 직접 귀족 가문에 방문해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체시어, 우리 손잡을까?”

“…….”

체시어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먼저 손을 잡아 왔다.

“히힛.”

따뜻한 봄날.

날씨도 좋고 벅찬 가슴도 두근거렸다.

나는 활짝 웃었다.

* * *

다정히 손을 잡은 승마복 차림의 소년, 소녀.

그 옆에 선 아름다운 백마와 흑마.

꼭 시간을 박제한 듯 고스란히 담아낸 궁정 화가의 초상화는 공작저 거실 정중앙에 걸렸다.

체시어는 그것을 한참 보았다.

“와, 죽인다. 부럽다. 나도 사냥 대회 우승했는데 왜 안 그려줘?”

“리리스는 최연소 우승자였는걸. 엄청난 일이지. 둘이 같겠어?”

그때, 다가온 쌍둥이가 초상화를 보며 감탄했다.

체시어가 돌아보니, 둘은 각자 상자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그건 뭐야?”

“아아, 이거?”

레온이 씨익 웃더니 체시어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라라 공주 드레스.”

“이건 라라 공주 티아라.”

테오도 웃으며 말했다.

아아, 생일 선물이구나. 체시어는 깨달았다.

지금 공작저는 무척 분주했는데, 사흘 뒤로 다가온 리리스의 생일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에 제작이 끝났다길래 눈 뜨자마자 받으러 갔다 왔다는 거 아니냐.”

레온이 으스대며 상자를 살짝 열어 보였다.

붉은 실크 드레스에 눈이 아플 정도로 휘황찬란한 보석 장식이 달려있었다.

“원래 라라 공주 드레스에는 보석 안 달려있거든. 그래서 의상실에 보석 왕창 박아 달라고 특별 주문했지.”

“티아라도 따로 만들었어. 기성품 사려고 보니까 전부 가짜 보석에 흉내만 냈더라고. 그래서 아예 새로 주문했어. 다이아 200개랑 루비 5개 박아서.”

“…그렇구나.”

촘촘히 빛나는 작은 것들은 다이아였고 중심에 박힌 붉은 보석은 최고급으로 세공된 루비였다.

“생일까지 숨겨야지. 아무것도 준비 안 했다고 거짓말할까?”

“그러다가 리리스 삐진다.”

“큭큭. 일단 숨겨, 숨겨.”

주고받던 레온과 테오가 상자를 들고 잔뜩 신이 나서 사라졌다.

남겨진 체시어는 둘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제 방으로 돌아갔다.

‘생일….’

침대 옆에 있는 탁상 서랍을 열어 보니 작은 꾸러미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꾸러미를 뒤집어 손바닥 위에 탈탈 털자 은화 네 개가 굴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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