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은화 네 개는 체시어가 일주일에 한 번씩 받은 용돈을 차곡차곡 모은 것이었다.
이 집에 오고 나흘째였을까.
체시어는 처음 용돈 받았던 날을 떠올렸다.
* * *
“아빠, 용돈! 이제 체시어 우리 집에서 사니까 체시어도 줘야 해!”
리리스는 다른 귀족 아가씨들과 달리 아빠에게 용돈을 받아 썼다.
체시어는 처음에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예전에 시골 마을에서 지낼 때 용돈 받던 버릇이라고 했다.
“어어, 용돈. 용돈 줘야지. 그런데 공주야, 옛날엔 아빠가 가난해서 우리 공주 생일 선물도 못 사 주고 용돈도 일주일에 동화 한 개씩만 주고 그랬지만.”
에녹은 당연히 내켜하지 않았다.
“이제는 아빠 집에 돈 많으니까 용돈 받을 필요 없어.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고, 급히 돈 써야 할 일이 생기면 집사 아저씨한테 얘기하면 돼. 체시어, 너도.”
“안 돼. 용돈 줘. 나는 계속 아빠한테 용돈 받을래.”
“왜?”
“어휴, 아빠. 생각해 봐. 나 아직 어린데 벌써부터 가지고 싶은 거 다 갖구 돈도 팡팡 쓰구 그러면 버릇 나빠지겠지? 그래, 안 그래?”
“뭔 소리야. 너 그렇게 공주처럼 살고 싶다고 제도에 오자고 한 거 아니었어? 가지고 싶은 거 다 갖고 돈도 팡팡 써야지?”
“안 돼, 안 돼. 나 버릇 나빠져.”
“아니, 공주야? 울 공주 버릇은 아빠가 알아서 잘 챙길게….”
“하아아, 제임스 씨, 나 구냥 용돈 받고 싶다니까. 용돈 줘! 용돈!”
에녹은 떼쓰는 리리스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국 일주일에 은화 한 개를 용돈으로 주기로 합의를 봤다.
에녹의 방에서 리리스와 은화 한 개를 받아 나오며, 체시어는 깨달았다.
‘나 때문이구나.’
배시시 웃는 리리스의 속내는 항상 투명하게 보였다.
그저 이 집에 얹혀살게 되었을 뿐인 체시어였다. 어떻게 돈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물론 에녹은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하라 했지만….
당연히 눈치가 보이는 일이다. 정말 돈을 달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흐음, 일주일에 은화 하나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 뒤부터 리리스는 용돈 받는 날이면 꼭 체시어를 끌고 에녹의 방을 찾았다.
그렇게 모은 은화 네 개.
4만 테르였다.
* * *
은화 네 개를 다시 꾸러미에 넣은 체시어는 고민했다.
4만 테르.
잡화점에서 리리스가 좋아할 만한 인형 같은 것들은 충분히 구할 수 있는 돈이었다.
하지만.
‘인형 많던데.’
리리스의 방 침대며 테이블이며 화장대까지 종류별로 가득 메운 인형들을 떠올린 체시어는 고개를 저었다.
생일. 특별한 날을 기념하는 선물이니까 정말 가지고 싶어 하는 걸 주고 싶은데.
‘라라 공주….’
그놈의 라라 공주 컬렉션은 제국 전역에 대유행이라 가격이 좀 됐다.
드레스와 티아라는 쌍둥이가 준비했고 구두는 일전에 축제 때 에녹의 손에 들어와 이미 리리스가 가지고 있었다.
남은 것은.
‘…마법봉? 뭐, 그런 걸 들고 있지 않았나?’
미간을 찌푸린 채 동화책 속 라라 공주의 모습을 떠올리던 체시어가 한숨을 터뜨렸다.
이윽고 그가 몸을 일으켰다.
“일단 나가 보자.”
* * *
귀족들이 찾는 상업지구 가게는 당연히 엄두도 못 냈고.
평민 거주지역까지 나온 길.
잡화점을 무려 스무 군데 돌고 나온 체시어의 손에는.
“하아.”
토끼 머리가 달린 분홍색 동전 지갑이 들려 있었다.
이것도 1만 테르나 했다.
“뭐가 이렇게 비싸. 달린 보석도 다 가짜면서.”
라라 공주 마법봉은 제일 싸게 파는 잡화점에서도 은화 일곱 개는 내야 했다.
결국 타협하고 손에 넣은 토끼 동전 지갑은 초라해 보였다.
“의상실에 보석 왕창 박아 달라고 특별 주문했지.”
“다이아 200개랑 루비 5개 박아서.”
쌍둥이가 준비한 돈 덕지덕지 바른 선물을 떠올리니 마음이 착잡했다.
암만 봐도 은화 한 개짜리 동전 지갑은 부잣집 귀족 따님의 생일 선물로 내놓기에 부끄러웠다.
‘돈을 구해 볼까. 일당 쳐 주는 데가 어디 있을 텐데.’
두리번거리던 체시어의 눈에 작은 가판 하나가 보였다.
잡화점에서 가게 밖에 따로 운영하는 노점이었다.
라라 공주 마법봉과 용사 루이(동화 <라라 공주의 모험>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이다)의 마검이 가판대에 걸려 있었다.
그 아래로는 달걀 모양 뽑기가 수북이 쌓여 있었는데, 척 봐도 코 묻은 아이들 짤짤이를 노리는 장삿속이었다.
저렇게 많은 뽑기 달걀 안에서 라라 공주 마법봉이 나올 확률은 희박했다.
당연히 절반은 꽝일 것이고 또 절반은 쓸데없는 싸구려 장난감일 것이나….
‘혹시 모르잖아.’
남은 돈은 은화 세 개.
3만 테르.
적어도 60번은 뽑아볼 수 있는 돈이었다.
“뽑기 하려고?”
잡화점 주인이 나와 물었다.
“아, 네.”
체시어는 비장한 표정으로 은화 한 개를 가판 위에 올렸다.
* * *
에녹의 복귀 후.
다시 기사단 부단장의 자리를 찾은 악시온 리브르는 평민 거주지역을 순찰 중이었다.
축제는 끝났고 제도를 떠들썩하게 했던 어린이 인신매매범들도 잡혔지만, 썩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였다.
악시온이 체시어를 발견한 곳은 어느 잡화점 앞이었다.
‘저 아이, 에녹이 데리고 왔다던 그 애 아닌가?’
체시어를 처음 본 건 축제 때.
나중에 에녹에게 들은 바로는, 무슨 사연이 있어 후견하기로 했다던데….
딸 하나 혼자 키우기도 벅찰 텐데 뭔 쓸데없는 짓인가 했다.
하지만 에녹의 이해 못 할 행동이야 어디 하루 이틀 일이던가.
악시온은 멀찍이 서서 체시어를 지켜봤다.
“아이고, 또 꽝이네?”
“…….”
“얘야, 이제 한 번 남았다.”
잡화점 주인이 안타깝게 웃었다.
체시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달걀 모양 뽑기를 우그러뜨렸다.
반으로 갈라진 달걀 안에서 나온 작은 종이 한 장을 읽고는 가판 위에 턱 내려놓는다.
“또 꽝이네. 어쩌니, 얘야.”
체시어는 미련 없이 걸음을 돌렸다.
그러다 멈칫.
뒤에 서 있던 악시온을 발견하고 눈이 커졌다.
“…안녕하세요.”
“헉, 성기사님! 이런 누추한 곳엔 어쩐 일로?! 프리메라의 드높은 영광과 은혜가 드리우시길!”
잡화점 주인은 허둥거렸다.
악시온이 물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어린애 혼자 돌아다니기에 아직 여기는 위험한데.”
“저는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깐.”
악시온이 가려는 체시어의 팔을 붙잡았다.
둘은 가만히 서로를 보았다.
‘내가 얘를 왜 잡았지?’
자기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악시온은 의아했다.
아니….
알 것도 같았다.
악시온은 가판대 위의 장난감을 턱짓했다.
“저걸 갖고 싶은 건가? 에녹이 안 사 줘?”
“아뇨.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다. 뭐, 갖고 싶어도 말하기 눈치 보일 수도 있겠지.”
악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센스 없는 에녹 같으니라고. 딸 장난감 사 주면서 같이 좀 챙겨 주면 어디가 덧나나.
“이리 와 봐.”
“예?”
악시온은 체시어를 질질 끌고 다시 가판대 앞으로 돌아갔다.
척 보기에도 남자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장난감 검이 보였다.
“이걸 갖고 싶은 거지. 용사 루이… 뭐야.”
“<용사 루이의 마검>입니다, 성기사님!”
“그래. 이거 맞나?”
묻자, 체시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뭔데. 뭘 가지고 싶어서 이걸… 이렇게나 많이 한 건데?”
악시온이 바닥에 수북이 버려진 달걀껍데기를 턱짓했다.
약간 민망한지 대답을 망설이던 체시어가 말했다.
“…라라 공주 마법봉이요.”
“……?”
악시온이 흠칫하며 <라라 공주 마법봉>이 무엇인가 보았다.
분홍색 막대기에 가짜 보석들이 주렁주렁 달린 화려한 장난감.
‘이 자식 취향이…?’
어째선지 보통의 남자아이들 같진 않았다.
“마, 마검 아니고 마법봉이었니? 정말 가지고 싶은 모양인지 벌써 여기에 3만 테르나 썼거든요.”
당황한 주인이 미안한 웃음을 지었다.
“자꾸 꽝만 나와서 나도 미안하더라, 얘야.”
“괜찮아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기다려.”
악시온이 체시어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리고는 품 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가판대 위에 척 올려놓았다.
“이, 이잉?”
주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체시어도 당황했다.
“나올 때까지.”
악시온이 달걀 뽑기 하나를 체시어에게 휙 던졌다.
“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