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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을 사흘 앞둔 어느 날.
나는 수신인에 내 이름이 적힌 우편 한 통을 받게 되었다.
[파빌리온 제국 능력자 양성소 입소 통지서 - 리리스 루빈슈타인
귀하께서는 프리메라의 부름을 받은 위대한 제국 출신의 능력자로서, 양성소 입소 대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소집일인 제국력 1779년 5월 21일까지 입소 절차를 진행하시기 바랍니다.
입소 대상자가 통지서를 수령하고도 입소기일로부터 3일이 경과한 날까지 정당한 사유 없이 입소하지 아니할 시 군법 위반…….]
K-군대에 가야 하는 대한 건아들이 입영통지서를 받았을 때의 기분이 이랬을까?
아빠는 나를 안은 채 말없이 한참 통지서를 읽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웬 한숨. 얼른 갔다 오께.”
“체시어에게도 왔겠네. 후견인 등록하면서 입소 날짜 똑같이 잡아 달라고 했었는데.”
오, 동반 입대. 나쁘지 않지.
“리리스.”
“응.”
“2년 미룰까? 일곱 살부터 입소 통지서가 오기는 하는데, 의무 입소는 아홉 살부터거든.”
“으앙, 안 돼! 나 빨리 갈 거야!”
아빠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능력을 써서 생명력을 소모해야 하는 몸.
그러지 않으면 2년동안 거의 안 자라고 이 상태일 텐데….
‘대참사다, 대참사. 동네방네 내 정체가 탄로날 거야.’
나는 등골이 섬찟해져서 파르르 떨었다.
“그래…. 우리 딸, 똑똑하니까 한 달이면 될 거야.”
“글치. 나만 믿어. 걱정 마.”
“하아. 일주일 남았다니….”
아빠는 죽상이었다.
‘문제는 내 입대가 아니란 말이지.’
바로 아빠다.
내가 보낸 편지를 받은 지 며칠 되었는데 아빠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설마… 읽씹? 읽고 씹은 건 아니겠지? 그 에녹 루빈슈타인이?’
분명 주인공의 내면에서 들끓고 있는 혁명의 의지를 자극할 만한 편지라고 생각했는데.
딸도 원작과 달리 무사하겠다, 썩 내키진 않지만 딸을 위해 황제의 번견 노릇 좀 하고 말지― 하는 맘을 먹은 건 아닐까?
난 머리를 붙잡고 경악했다.
‘아, 아니야. 난 아빠 믿어.’
#선 #정의 #혁명가 따위의 키워드를 탑재한 정의로운 주인공, 에녹 루빈슈타인이니까!
“그보다 공주야.”
“응.”
“아빠 어디 좀 갔다 오려고.”
“응? 어디?”
“우리 공주 생일 선물 사러?”
“엥. 생일 선물 사러 어딜 가는데?”
“어어, 거리가 좀 돼. 신전에서 워프 게이트 타고 중부 쪽에 좀 다녀올까 하거든.”
“와아, 그렇구나!”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역시 읽씹 아니었어. 중부라면 시킨 대로 조제프 뤼트먼을 만나러 갈 생각이야.’
원작대로 착착 진행되는 이 맛!
“하루 만에 다녀오기는 좀 힘들 것 같아서. 그래도 공주 생일 전까지는 꼭 돌아올게.”
“모? 지금 가서 내 생일에 돌아온다고? 내 생일 겨우 3일 남았는데?”
“응.”
조제프 뤼트먼을 3일 만에 손에 넣으시겠다?
나는 멍해져서 눈만 깜빡였다.
조제프 뤼트먼.
그에 대해 설명을 좀 하자면….
1. 주인공 에녹 루빈슈타인의 책사.
2. 원작이 시작했을 때 이미 에녹 루빈슈타인이 손에 넣고 있던 인물.
3. 젊은 시절 탁월한 정계 수완으로 제도에서 이름을 날리다가 모종의 사건으로 잠적, 폐인처럼 지내던 과거가 있음.
4. 에녹 루빈슈타인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저를 데려가시겠다고 석 달이나 고생하셨던 일 기억하십니까, 각하?” 하는 대사가 있음.
아빠가 어디서 조제프를 만났고 어떻게 그를 회유했는지까지는 나와 있지 않아서….
나는 짧게나마 서술됐던 그의 사연 몇 줄과 대화로 둘의 만남을 유추해야만 했다.
‘확실한 건, 조제프가 처음부터 호락호락 아빠를 돕겠다고 하진 않았을 거란 말이지.’
석 달이나 고생 어쩌고 회상하니 에녹 루빈슈타인이 ‘하하, 그랬지.’ 하고 웃으며 받아치던 게 분명히 생각난다.
‘어휴, 잘도 3일 만에 조제프랑 편먹겠다.’
그리고 잘나가다가 모든 걸 버리고 잠적해 버린 조제프의 사연은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
‘분명 내가 도움이 될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나두 갈래.”
“응?”
“나두 갈래. 내가 받고 싶은 선물 직접 고를 거야.”
“에이, 그건 좀. 아빠 금방 다녀올게. 실은 아빠가 그… 뭐냐, 그쪽에 친구가 한 명 있거든. 그 친구 얼굴도 보려고 겸사겸사 가는 거라….”
“아빠가 친구가 어딨어?”
“아빠도 친구 있거든?”
“으아아앙, 싫어! 나도 데려가! 혼자 자기 싫어! 아빠 없이 혼자 있기 싫단 말이야!”
“아니, 공주야….”
“나 이제 곧 양성소 들어가면 아빠 계속 못 보는데! 그것도 너무너무 싫은데!”
“어휴, 아빠도 그래. 아빠도 우리 공주님이랑 떨어지기 싫지. 그런데….”
“으아아앙!”
나는 아빠의 목에 매달려 고개를 젖히고 눈물은 하나도 안 나오는데 앙앙 울어대며 떼썼다.
“안 되는데…. 진짜 안 되는데.”
“으아아앙!”
“하아, 우리 공주.”
아빠는 마구 몸부림치는 나를 안고 달래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아빠랑 떨어지기 싫어해서 어뜩하냐. 아빠가 공주 평생 데리고 살아야지, 안 되겠네.”
“나도 데려가! 나도 간다구!”
아빠는 난처한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 * *
항상 그랬듯 나의 승리였다.
아빠는 내 생일 선물 사러 다녀오겠다고 집안사람들에게 알린 다음, 나를 데리고 신전으로 향했다.
신전에서 워프 게이트를 타고 중부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딱 1시간.
‘역시 마법 최고.’
반나절 만에 제도에 왔던 날이 떠오르며 나는 새삼 마법의 위대함을 느꼈다.
“좋은데? 옛날 생각 난다, 그치?”
“그르게.”
중부 발테락은 내 고향 제논보다는 크지만 닮은 구석이 있었다.
친근해 보이는 건물 사이로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평민들. 한가로운 웃음소리. 고즈넉한 풍경.
영주 빼곤 귀족이 없을 동네라 다들 마음 편히 지내고 있었다.
“진짜 좋네….”
“그르게….”
변장한 제임스 씨와 평민 복장의 나를 알아보는 이들은 없었다.
간만에 만끽하는 이 자유란.
아빠는 물어물어 시가지 뒷골목으로 향했다.
발테락에서 가장 큰 도박장은 거기 있었다.
“와, 여긴 진짜 애 데리고 올 곳이 아닌데.”
합법으로 운영되는 도박장이었지만, 도박장들이 다 그렇듯 주변 분위기는 험상궂었다.
담배를 뻑뻑 태우고 있는 눈 밑이 퀭한 사람들.
도박장 가드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엉엉 울며 소리치는 사람들….
“내가 미쳤지.”
아빠는 멀찍이 서서 그 모습을 살피다가, 옆에 있는 날 물끄러미 보고 한숨 쉬었다.
“진짜 미쳤어. 진짜.”
중얼거리던 아빠가 내 이마를 한번 톡 건드렸다.
‘오잉?’
그러자 꼭 박하사탕을 먹은 듯 화-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마법 같긴 했는데.
“모야?”
“울 딸 담배 연기 안 좋으니까. 아빠가 냄새도 안 나고 연기도 못 맡게 해 놨지요.”
“아항, 고마워.”
아빠는 내 손을 잡고 도박장으로 향했다.
입구에는 덩치 큰 가드 둘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그때 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흠, 아빠는 못하는 게 없는 똑똑하고 눈치 빠르고 센스 있는 주인공이었는데 왜 조제프를 꼬실 때는 석 달씩이나 걸렸을까?’
조제프가 엄청난 철벽이었나?
……나는 곧 그 의문의 답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는 못 본 얼굴인데. 처음 왔나? 입장료는 금화 하나요. 안에 들어가면 입장권 채워줄 거요.”
가드가 하는 말에, 아빠가 고개를 저었다.
“게임하려고 온 게 아닙니다. 찾는 사람이 있어서. 손님 중에 혹시 조제프 뤼트먼이라는 이가 있는지 알아봐 주겠습니까?”
나는 당당한 아빠의 질문에 입을 떡 벌렸다.
가드 두 명은 눈을 껌뻑거리다가 이내 서로 쳐다보았다. ‘이 새끼 뭐래냐?’ 싶은 표정이었다.
* * *
당연히 쫓겨났다.
아빠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앉아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그런 아빠 옆에 쪼그려 앉아서 한심하게 지켜보았다.
‘왜 조제프 꼬시는 데 그렇게 오래 걸렸는지 알겠다.’
이런 데는 한 번도 안 다녀본 착한 울 아빠….
사행성 게임 같은 건 손도 안 대본 울 아빠….
아마 원작에서는, 365일 24시간 도박장에서 산다는 조제프의 얼굴 한번 보는 것도 어려웠을 테다.
“안 되겠다. 그냥….”
“잠깐, 잠깐.”
나는 아빠를 붙잡았다.
“변장 풀게? 나 공작이니깐 문 열어, 하구 친구 만나게?”
“그래야지. 그냥은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니까.”
“에휴, 아빠가 첨에 제임스 씨로 변장하구 친구 만나려 했던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내 질문에 아빠는 다시 털썩 몸을 앉혔다.
“그치. 음, 그 친구가 좀. 아빠가 생각하기에는…. 아빠가 누군지 알면, 아빠를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아. 편하게 대화하기도 힘들고.”
“언젠 또 친구라며?”
“거짓말이야. 사실 친구 아니야. 친구 하고 싶은 사람이지.”
“글쿤.”
“아무튼, 그래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접근하려구?”
“그렇지.”
“그러면 공작님인 거 밝히면 안 되지. 아빠 바부.”
“그런데 다른 방법이 없잖아.”
“아빠, 도박장은 말야…. 도박하려는 사람한테는 항상 열려있어.”
나는 쪼그려 앉은 채로 아빠에게 검지를 까딱까딱했다.
“돈 얼마 갖구 와써? 봐바.”
“돈?”
아빠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돈 꾸러미를 열어 보였다.
금화 스무 개쯤.
도박할 생각은 없었으니 당연히 큰 액수는 아니었다.
“아빠.”
나는 고개를 갸웃하는 아빠를 향해 쓱 눈썹을 들어 올렸다.
“포커 좀 칠 줄 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