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4/261)

저마다 당황한 얼굴들 사이에서 아빠는 여유만만하게 일어났다.

그리고는 조제프의 돈 꾸러미를 쭉 끌어와 그 위에 자기 것을 올렸다.

“이걸로 당신의 시간을 사고 싶습니다. 내어 주시죠.”

* * *

조제프는 도박장 근처의 여관에서 묵고 있었다.

우리를 자신의 숙소로 안내한 그는, 의자 하나를 내주고 아빠와 마주 앉았다.

“약속대로 날 도박장에서 끌어냈으니 얘기를 들어는 주지. 누가 보냈나?”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뭐, 그래. 용건 먼저 듣지. 하지만 시간 낭비일 거요. 난 제도로 돌아갈 생각도 없고 높으신 분들 사리사욕 채우는 싸움판에 다시 끼어들 마음도 없거든.”

조제프는 음울하지만 날카로운 시선으로 아빠를 보았다.

조제프 뤼트먼.

그는 귀족치고 보잘것없는 위치였으나 그럼에도 명성이 자자했다.

똑똑해서였다.

권력자들의 책사로 지내며 그는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남작을 찾는 이들이 저 말고도 많았던 모양이군요.”

“그랬지. 이 나라는 전쟁이 많고, 전공에 따라 권력의 판도가 쉴 새 없이 뒤바뀌니까. 소싯적엔 그 흐름을 읽는 알량한 재주로 먹고살았소. 권력자들에게 기생하면서.”

조제프는 자조했다.

알량한 재주라고 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조제프의 수완은 그보다 더 대단했다.

누구보다 빠르게 권력의 흐름을 읽는 눈.

여론전, 선동, 아빠에게 필요했던 인재들까지 착착 가려냈다.

“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란 걸 깨달았소. 옛날에는 뭐, 높으신 분들 옆에서 이런저런 훈수 두며 내 배 불리는 데 혈안이 됐었는데….”

그에게는 권력 싸움에 휘말려 딸과 아내를 잃은 과거가 있었다.

“…정말이지 다, 부질없는 짓이더라고.”

씁쓸하게 중얼거린 조제프의 눈이 아빠의 무릎에 앉아있는 내게 닿았다.

‘원작에서 아빠를 돕기로 결심한 이유도 아마, 비슷한 아픔이 있어서겠지. 아빠도 딸을 잃었으니까.’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웃는 조제프의 얼굴이 무척이나 슬퍼 보였다.

“남작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제가 온 이유는, 죄송하지만 짐작하시는 바와 다르지 않군요. 당신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그렇겠지, 뭐. 돌아가시오. 나는 이제 지쳤어.”

“어차피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이틀 머물 겁니다. 그동안.”

아빠는 또렷한 눈으로 조제프를 직시하며 덧붙였다.

“제 얘기를 들어 봐 주십시오.”

* * *

둘의 대화는 해가 길어질 때까지 오랫동안 이어졌다.

나는 여관 1층에서 나뭇가지로 땅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뭐 하니?”

“어?”

조제프였다. 아빠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반나절 만에 뺨이 홀쭉해져 있었다.

“그림 그리구 있었어요. 아빠랑 이야기 다 하셨어요?”

“아니. 끝날 기미가 안 보여서 잠깐 바람 좀 쐬겠다고 도망쳐 나온 거란다.”

“글쿠나. 울 아빠 착하죠?”

“음? 무슨 소리니?”

조제프가 허허 웃고 덧붙였다.

“정신이 나간 사람이던걸?”

나는 아하하 웃어버렸다.

조제프가 내 옆에 앉았다. 흙에 그린 세 명의 사람 그림을 보더니 물었다.

“가족이니? 가운데 작은 건 너고, 옆에는 아빠랑 엄마?”

“아니요. 가운데는 저구요, 왼쪽은 아빠고 오른쪽은 아저씨예요.”

“나?”

“네!”

조제프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얘야, 아버지가 이런 거 하라고 너한테 시키던? 아저씨가 너 보고 마음 약해지게?”

“아니에요.”

“아니긴 뭘. 포커 칠 때도 아빠가 시킨 대로 연기했잖아.”

“연기한 건 맞는데요…. 아빠가 시키진 않았어요. 아빠 오늘 포커 처음 쳐 봤거든요. 제가 이것저것 알려줬어요.”

“…뭐라고?”

나는 쿡쿡 웃었다.

“아저씨 패가 좋아 봐야 플러시길래 이겼다 싶드라구요. 첨부터 울 아빠 포 카드 떴었거든요.”

술술 말하는 나를 보며 조제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나오기 힘든 패가 초반에 떴다고? 그런데 둘 다 표정에 티를 하나도 안 냈단 말이야?”

“에잉, 좋은 패 나왔다구 좋아했으면 아저씨가 눈치 채구 올인 안 했을 고 아녜요? 포커는 포커페이스가 쩰 중요하다구요.”

“허?”

황당해하던 조제프가 곧 씁쓸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 아주 똑똑한 아이구나.”

“…….”

“버젓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을. 평민이 똑똑해 봐야 뭐에 쓰겠니. 안타깝구나.”

“아저씨는 제도로 안 돌아가세요?”

“그래.”

“왜요? 아빠가 한 말이 맘에 안 드셨어요?”

“네 아빠가 아저씨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아니?”

“아니요. 저는 잘 몰라요. 그냥… 아빠가 아저씨랑 친구 하고 싶다구 한 것만 알아요.”

“음, 그랬구나. 이런 말 불쾌할 수도 있지만, 네 아빠는 정말 정신이 나갔단다.”

조제프는 혀를 내둘렀다.

“예상했던 말이 아니더구나. 날 데리고 한몫 챙겨보고 싶은 귀족 나리가 보낸 줄 알았더니.”

반란을 일으키자!

내게 힘을 보태 주시오!

뭐, 그런 말을 했을 텐데. 똑똑한 조제프라면 당연히 질겁했겠지.

정신 나간 불나방이랑 대화하는 기분이었을 거다.

“얘야.”

“네.”

“네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전혀 현실성 없는 얘기란다. 아빠에게 말하렴. 더는 그들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너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말이야.”

“아빠는 할 수 있어요. 전 아빠를 믿어요.”

“…….”

왜인지 조제프는 답이 없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다 말고 그를 돌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붉어진 조제프의 눈가에 눈물이 차 있었다.

“아, 아저씨? 우세요?”

“…….”

“왜요? 울지 마세요.”

조제프가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하구나. 갑자기 딸 생각이 나서. 내 딸도 꼭 너 같은 말을 했었거든.”

“…….”

“얘야, 나는. 아저씨는 말이다. 아저씨 잘못으로…. 가족을 다 잃어버렸어.”

“…….”

“권력자들의 세계는 무섭단다. 나는 그들을 도운 벌로 아내도, 딸도 잃었어.”

“…….”

“지금은 너무 후회가 된다. 대체 왜 그렇게 살았는지…. 불쌍한 내 딸…. 하루라도 더, 그 애 얼굴을 보고 있을걸. 같이 있어 줄걸…. 바보처럼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고….”

“아저씨….”

“흐으윽.”

조제프가 서럽게 흐느꼈다.

나는 어쩔 줄 몰랐다가, 그냥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힘 있는 아버지가 아니라서…. 보잘것없는 가문에서 태어나게 해서…. 그래서, 나중에라도 내 딸을 남부럽지 않게 해 주려면, 그러려면…. 내가 가는 길이 맞다고 생각했는데….”

“…….”

“아니었어. 아니었던 거야…. 내 딸이, 내 아내가 바라던 건 그런 게 아니었는데…. 항상 곁에 있는 남편, 다정한 아버지…. 그래, 그런 걸, 그런 걸 바랐을 텐데….”

조제프는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꺽꺽 한참을 울었다.

내게서 딸을 겹쳐 보는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잦아들던 울음이 더 커졌다.

겨우 진정했을 때, 나는 조심조심 그의 손을 잡고 위로했다.

“있잖아요…. 아저씨 가족은… 아마 하늘에서 아저씨가 행복하기를 기도하고 있을 거예요.”

조제프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맨날 카드 치구 담배 피우구…. 그럼 아저씨 딸이 싫어할 텐데.”

“그래, 그렇겠지.”

조제프가 픽 웃었다.

“제가 아저씨 딸이면요. 맨날맨날 기도할래요. 울 아빠 하고 싶은 거 하구, 안 아프구, 행복하라구.”

“…….”

“그리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다가 나중에 아빠 하늘나라 오면 마중 나가야지!”

나는 웃으며 번쩍 만세 했다.

“…그렇게요.”

조제프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일어나 한참 작아 보이는 그의 어깨를 가만 끌어안았다.

“저는 알 수 있어요. 저도 울 아빠가 항상 행복하길 바라니까요. 그러니까 아저씨 딸도 아저씨가 행복하길 바랄 거라고 생각해요.”

“…….”

“아프지 말고 행복하세요, 아저씨. 담배도 좀 쭐이시구요.”

조제프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내 꾸역꾸역 눈물을 참은 그가 웃으며 나를 마주 안았다.

“…그래, 고맙구나.”

* * *

이틀이 지났다.

부녀가 제도로 돌아가는 날.

워프 게이트가 있는 발테락 신전까지 둘을 배웅해주던 조제프에게 제임스가 물었다.

“마음 안 바뀌었습니까.”

“응, 안 바뀌었소.”

반란을 일으키자는 개소리를 내내 듣고 있으려니 조제프는 정신이 나가는 기분이었다.

몇 걸음 걷고 난 제임스가 다시 물었다.

“지금은 안 바뀌었습니까.”

“이 사람아, 물어본 지 1분도 안 지났어!”

이틀이나 이 미친 사내의 말을 들어준 건 그의 딸, 리리스 때문이었다.

리리스와 시답잖은 얘기를 하고, 같이 식사하고, 놀아주는 시간은 꽤 즐거웠으니까.

“아저씨, 이거 줄게요.”

“뭐니?”

리리스가 준 건 작은 토끼 인형이었다.

“제가 아끼는 건데요…. 아저씨가 갖구 있다가 나중에 엘라 만나면 주세요!”

“허, 참.”

또 울컥할 뻔했다.

조제프는 인형을 받고 리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 귀여운 딸을 보고도 마음이 안 바뀝니까.”

“시끄럽소, 좀.”

조제프가 짜증스럽게 제임스를 흘겨보았다.

“그나저나 워프 게이트는 웬만한 가문이 아니면 이용할 수 없을 텐데. 댁 주인의 위치가 제법 되는 모양이지?”

제임스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멍청한 자는 아닌데 왜 이리 세상 편하게 살 줄 모르나. 모난 돌이 정 맞는 법이거늘.’

조제프는 마냥 해맑은 그를 보며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일단 반란을 준비한다면 지방의 영주들부터 포섭해야지. 중앙과 달리 황실에 반감을 가진 이가 많아 회유는 어렵지 않다. 시간과 돈만 있으면.’

또 생각했다.

‘문제는 고고하신 중앙 놈들인데. 최상층 계급은 거르고 중간층 핵심 인사들을 잡아야 한다. 중립인 마탑과도 접선해야지. 또….’

생각하던 조제프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직업병인가.

아니면 제임스의 개소리를 계속 듣다 보니 정신이 나가 버렸나.

이 말도 안 되는 그림을 대체 왜 그리고 있는지.

‘황실을 견제할 만한 가문이 힘을 보태지 않는다면, 애초에 시도해 볼 여지도 없는 그림이거늘.’

그러면서도 역시 직업병인지 계속 생각했다.

‘하지만 뭐, 혹시 꿈이라도 꿔 본다면….’

누가 있을까.

‘얼른 생각나는 곳은 루빈슈타인 정도? 하지만 그 늙은이가 미쳤다고 그 나이에 개싸움을 해? 씨알도 안 먹힐 말이지. 그럼 그 집 아들은? …맞다, 탈영했었지? 정신 나간 놈.’

조제프는 활짝 웃으며 머릿속에 엑스 표시를 했다.

반란 성공 확률 0%

절대 없음 XX

“정말 마음 안 바뀌….”

“잘 가시게.”

단호한 대답에, 워프 게이트 앞에 선 제임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이 어쩐지 불쌍해 보여서 조제프는 한숨과 함께 말했다.

“가능성은 없지만, 뭐, 내가 살짝 미쳐서 언젠가 마음이 바뀐다면 찾아가겠소.”

“그거 고마운 말이군요.”

“어디로 가야 할지나 알려주고 가시오. 뭣도 없이 바람만 잔뜩 든 댁 주인이 대체 누구야?”

멋쩍게 웃은 제임스가 리리스를 번쩍 안아 들었다.

동시에 그의 모습이 변했다.

“……?”

화려한 은발.

청명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

조제프의 입이 떡 벌어졌다.

‘뭐야, 능력자였어? 아니, 그러면 하수인이 아니라 바람만 든 정신 나간 귀족 본인?’

놀란 조제프에게 에녹이 말했다.

“부디 당신 마음이 바뀌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루빈슈타인 공작 가문으로 찾아오십시오.”

“아저씨, 빠빠!”

그리고는 잡을 새도 없이 워프 게이트를 훌쩍 넘어갔다.

“아, 아니….”

뭐지, 이게.

상황을 파악하던 조제프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뭔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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