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5/261)

* * *

“에휴, 조제프 아저씨가 안 오면 어떡하지?”

나는 제도로 오자마자 아빠 품에 안겨 걱정했다.

조제프의 완강한 반응을 보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걱정이 많은 나와 달리 아빠는 마냥 태평했다.

정말로 조제프가 오든 말든 상관없는지 콧노래까지 부르는 모습이 영….

“아빤 모가 그러케 태평해? 친구 데리러 멀리까지 가서 데려오지두 못했으면서!”

“리리스!”

아빠는 날아갈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휘적휘적 걷다가 우뚝 멈춰 서서 나를 빤히 보았다.

“궁금한데, 우리 딸은 뭐가 그렇게 걱정이지?”

“응?”

“꼭 조제프 아저씨가 안 오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말하잖아. 너, 아빠가 왜 조제프 아저씨랑 친구 하고 싶었는지는 알아?”

나는 흠칫 놀랐다.

아빠는 여느 때처럼 온화한 표정이었다. 정말 궁금하다는 듯 갸웃하는 고개까지.

하지만 나는 읽을 수 있었다.

저변에 의심이 깔린, 누구보다도 예리하고 날카로운….

‘주인공’의 눈빛을!

‘어이쿠, 내가 눈치 빠른 주인공 앞에서 너무 허술하게 굴었군.’

나는 재빨리 변명했다.

“내가 바보야? 다 알지. 조제프 아저씨가 대충 말도 해줬다구. 모, 아빠 일하는데 조제프 아저씨가 도와줘야 한다며?”

아빠는 멈춰 서서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정적이 흘렀다.

꼴깍,

긴장한 바람에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맞아.”

아빠는 싱긋 웃고 다시 걸었다.

“아빠가 우리 공주 맛있는 것도 먹고 예쁜 옷도 입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사업을 좀 해 보려고!”

“어엉, 글쿠나.”

사업: 어떤 일을 일정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짜임새 있게 지속적으로 경영함. 또는 그 일.

그래, 뭐. 아빠가 그렇다는데.

반란도 사업이라면 사업인 것.

나는 흐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는 걱정 안 했으면 좋겠네.”

“응?”

“조제프 아저씨가 여기에 안 와도 괜찮아. 없으면 없는 대로 아빠가 또 고민해 보면 되니까.”

쪽, 아빠가 내 뺨에 뽀뽀했다.

“그러니까 우리 공주는 걱정 안 해도 돼. 아빠 최고잖아. 알지? 아빠 못하는 거 없는 거?”

“으응. 그르키는 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그래, 원작이 조금 바뀌었어도 여기가 소설 속 세계란 건 변함이 없고, 아빠는 버프란 버프는 몽땅 때려 박은 주인공이다.

멍청한 악당이나 흑막이었으면 일이 어려웠을 테지만….

‘에휴, 아빠 말이 맞아. 난 할 만큼 했다. 이제 그냥 내 정체나 잘 숨기면서, 가끔 아빠가 쉬운 길로 갈 수 있게 몰래 도와주면 되지.’

나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아빠 목에 매달렸다.

“맞다!”

그러나 아빠는 몇 걸음 더 못 가고 또 멈춰 서서 경악했다.

“깜짝이야! 왜 그래?”

“우리 공주 생일 선물!”

“에잉, 괜찮아. 선물 없어도 돼. 생일은 내년에도 있는걸?”

“그런 게 어디 있어. 제도에 와서 처음 챙겨주는 생일인데. 아빠가 미안해. 생각이 없었다.”

“괜찮다니까.”

“얼른 공주 생일 선물 준비하러 가야쥐~!”

“됐어어. 나 드레스랑 구두랑 이~따만큼 있어. 옷장 완전 터질라 그래.”

“으으음.”

아빠가 검지를 까딱까딱 저었다.

“그런 거 말고. 우리 공주가 진~짜진짜 갖고 싶어 했던 거 줄 건데~?”

“오잉. 그게 먼데?”

아빠는 씩 웃었다. 어쩐지 음흉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 * *

루빈슈타인 공작의 하나뿐인 딸.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

리리스 루빈슈타인이 제도에 와 처음 맞는 생일 준비로 공작 저는 떠들썩했다.

화려하게 꾸며진 저택을 일일이 점검하던 노르딕과 오르디아 부녀는 정원에 나와 있었다.

“아버지가 준비하신 선물은 너무 과하지 않을까요?”

“전혀. 애가 말 타는 데 재미를 붙였으니 그만한 선물이 없지. 네 선물이야말로 쓸데없이 화려하고 실속이 없다.”

“어머, 아버지도 참?”

오르디아가 반박했다.

“루빈슈타인 공녀의 생일이라고요. 타운하우스에서 가족끼리 조촐하게 파티 한다고 하면 다 비웃어요. 선물이라도 리리스 기죽지 않게 챙겨야지요.”

귀족들의 연회는 각자의 권력과 입지를 자랑하는 수단이었다.

제도에 온 리리스가 처음 맞는 생일.

노르딕과 오르디아는 당연히 영지 별장에서 호화로운 연회를 열고 귀족들을 초대하려 했으나….

“애가 그런 게 싫다는데 어째?”

가족끼리만 보내고 싶다며 리리스가 한사코 거절하여 불발되었다.

“그러니까 선물이라도 큰 걸 챙겨 줘야 했다고요. 리리스는 아직 귀족이 되었다는 자각이 부족하니까요. 글쎄, 옷장에 드레스가 오십 벌도 안 되는데 하는 말이, 입을 옷이 넘쳐난다면서….”

말하던 오르디아가 뭔가 발견하고 우뚝 멈췄다.

노르딕도 따라 섰다가 경악했다.

“저, 저놈이 지금 뭐 하는 게야?”

정원 한쪽에 산더미처럼 쌓인 굵은 목재들.

탕, 탕―!

한낮의 햇살이 시원하게 웃통을 깐 남자의 위로 드리웠다.

오르디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오, 세상에. 에녹. 미쳤구나.”

그래, 에녹이었다.

그는 이따금씩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즐거운 표정으로―

“저, 저놈이, 억.”

―망치질 중이었다!

“어머, 아버지! 이를 어째!”

뒷목을 잡고 휘청이는 노르딕을 부축하며 오르디아가 멀리 보이는 에녹을 흘겼다.

그의 바로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렘이 둘을 발견하고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크, 큰 주인님. 오르디아 님.”

“집사! 대체 저게 무슨 꼴인가?”

“저, 그것이…. 작은 주인님께서 아가씨의 생일 선물을 만드시는 중입니다.”

“뭘 만들기에! 아니, 그보다 목수들을 시키면 될 게 아닌가!”

“제가 그 말씀을 왜 안 드렸겠습니까….”

렘이 노르딕을 함께 부축하며 울상 지었다.

“아가씨가 남부에 계실 때 정말정말 갖고 싶어 하셨던 거라며 꼭, 자기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시기에….”

“어억.”

“아버지!”

“주인님!”

또 혈압이 오른 노르딕이 휘청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공작이 웃통 까고 망치질을 하는 저 모습이 과연 맞는가….

바쁘게 주변을 지나던 사용인들이 에녹의 모습을 보고 놀라 한 번씩 멈추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혈압은 더 올랐다.

“네 이노오오옴!!!”

노르딕의 노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 * *

“체시어! 너 거기 서라아아~?!”

“따라오지 마!”

쌍둥이에게 선물 받은 라라 공주 풀 세트로 착장을 마친 리리스가 체시어를 쫓고 있었다.

‘선물이랑 꽃은 이따 저녁에 주면 되겠지.’

조금 전 나가서 사 온 아리스타타 꽃 한 송이를 보며 체시어가 한숨을 삼켰다.

잘 숨어 있었는데, 이 꽃을 사 오는 통에 동선이 마주쳐 하마터면 걸릴 뻔했다.

‘생일 파티…. 내가 낄 데가 아니니까.’

가족끼리 조촐하게 모여 케이크에 촛불을 켜기로 했다지만, 체시어에게는 결코 조촐한 자리가 아니었다.

에녹과 오르디아, 쌍둥이는 그렇다고 쳐도….

노르딕.

리리스의 조부이자 이 집의 가장 큰 어르신도 오신다지 않는가.

“이름은 체시어입니다. 애가 똘똘하니 잘생겼죠?”

체시어는 이 집에 온 지 이틀째 되던 날, 에녹의 손에 이끌려 노르딕에게 인사하러 갔었다.

“…한번 거두기로 하였으니 네 발로 나갈 때까지는 너도 우리 가문 사람이다. 최선을 다해서 수학(修學)하거라.”

대화는 그것으로 끝.

그 뒤로 체시어는 노르딕과 따로 얘기를 나눠 본 적 없었다.

아마도 노르딕이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이유는 내심 체시어가 못마땅해서일 것이다.

근본도 모를 남의 집 반쪽짜리 사생아를 가문에 들이게 되었으니 당연히 내킬 리 없겠지.

하지만 리리스는, 노르딕이 체시어를 보면서 느낄 불편함까지는 헤아리지 못할 테니….

‘미안.’

체시어는 담벼락이 있는 마구간 뒤편으로 달려갔다. 비어 있는 여물 상자가 계단처럼 쌓여 있었다.

재빨리 그것을 밟고 올라간 체시어가 담벼락 너머로 훌쩍 뛰어내렸다.

“으앙악! 이 바보야아아!”

여긴 따라올 수 없겠지. 리리스의 애절한 비명이 들렸다.

“…미안. 이따 저녁에 네 방으로 갈게.”

“끙.”

“……?”

담벼락 너머에서 들리는 신음에 체시어가 놀랐다.

설마 따라서 넘으려는 건 아니겠지?

“너 미쳤어?”

설마가 사람 잡았다. 그 작은 몸으로 낑낑대며 상자를 밟고 오른 리리스가 아슬아슬하게 담벼락 위에 몸을 걸치고 있었다.

“위험하다고!”

“왜, 왜… 흐익!”

“야!”

좁은 담벼락 위에 위태롭게 앉은 리리스가 소리쳤다.

“왜 피하는데! 내 생일 축하해 주기 싫어? 같이 케이크 먹자구!”

“알았어. 알았으니까 거기 그대로 있어. 안 떨어지게 잘 잡고 있어. 내가 다시 들어갈게.”

그 순간.

“어라라…?”

리리스의 작은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놀란 체시어가 재빨리 다가가 팔을 열었다.

“나, 나 떨어지… 으앙악!”

“리리스!”

풀썩,

다행히 리리스는 체시어의 품 위로 안착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

“……!”

절묘하게 맞닿아 버린 두 아이의 입술만 빼고.

* * *

…이게 뭐야?

담 넘다가 남주랑 입술 비빈 이 상황….

대체 뭐냐고…?

원작에 로맨스가 없던 이유는 설마 작가가 쌍팔년도 인소 감성이라서가 아니었을까?

자신 없는 로맨스 어설프게 넣었다가 이렇게 유치해질 걸 알고?

놀라서 짧은 순간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던 나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꼴깍,

침이 넘어갔다.

딱딱하게 굳은 체시어의 얼굴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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