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미안….”
나는 개미만 한 목소리로 사과하고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체시어가 따라 일어났다.
“…다친 데는.”
“어, 없어…. 너는?”
“나도.”
순식간에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말았다.
뽀뽀를…. 그것도 입술 뽀뽀를… 아빠 아닌 다른 남자랑 했네, 내가….
슬쩍 보니, 체시어도 여간 민망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애써 내 눈을 피하며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억울했다.
이렇게 된 게 내 탓인가?
“네, 네가 자꾸 나 피하니까 그렇지! 이 꽃, 이거!”
나는 체시어가 참사의 현장 가운데에서도 손에 꼭 쥐고 있던 꽃을 가리켰다.
“나 주려고 사 온 거 아니야?”
“…맞아.”
“그럼 줘!”
입술을 훑으며 망설이던 체시어가 꽃을 건넸다.
보라색 작은 꽃잎이 꼭 요정 날개처럼 여러 개 붙어 핀 꽃 한 송이.
내 마음은 금세 사르르 녹았다.
“너무 이쁘다. 무슨 꽃이야?”
“…아리스타타.”
“뭐, 뭐라구? 이게 아리스타타야?”
나는 깜짝 놀랐다.
원작 내용이 번개같이 떠올랐다.
「5월의 어느 날이면, 에녹 루빈슈타인의 집무실 책상 화병에는 꼭 아리스타타 한 다발이 놓였다.
“저 꽃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어김없이 아리스타타가 놓인 것을 본 지 4년째 되던 날, 체시어는 문득 궁금함에 물었다.
“오늘은 내 딸의 생일이야.”
“…아.”
“아리스타타는 탄생화지.”」
딸을 그리워하는 주인공 에녹 루빈슈타인의 모습에 가슴 찢어지던 그 장면.
읽을 때는 5월의 어느 날이라고 해서 정확히는 몰랐지만….
‘아리스타타의 날이 5월 19일이었구나.’
내 탄생화.
새삼스럽게 가슴이 미어졌다.
체시어는 여자를 감동시킬 줄 아는 남자였다….
“정말 고마워…. 나, 지금까지 받아 본 선물 중에 이게 젤 맘에 들어.”
체시어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어느덧 민망함은 사라졌다. 나는 체시어가 또 도망칠까 얼른 그의 팔에 매달렸다.
“같이 가자. 응? 내 생일 노래도 불러 줘.”
* * *
식당에 마련한 조촐한 생일 파티.
나는 동그란 원탁 테이블에 둘러앉아 노래를 불러주는 가족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무슨 생일 파티를 이렇게 하냐며 내키지 않아 했지만 결국은 와 준 할아버지….
테오가 낫고 나서 근심이 사라져 전보다 100배는 예뻐진 고모….
자본의 힘으로 새롭게 제작한 라라 공주 드레스와 티아라를 선물해 준 쌍둥이 오빠들….
그리고 체시어와,
“공주야, 이제 촛불 끄자!”
사랑하는 우리 아빠.
“응!”
나는 체시어가 준 아리스타타를 손에 꼭 쥐고 케이크 위에 꽂힌 일곱 개의 초를 후, 하고 불었다.
“우와아아! 우리 공주, 생일 축하해!”
“생일 축하한다, 리리스.”
“축하해, 꼬맹아!”
“생일 축하해, 리리스! 울지 마, 왜 울어?”
“킁, 모두 감사함니….”
탁!
텅―!
그때, 할아버지와 고모가 동시에 테이블 위에 뭔가를 올렸다.
그리고는 서로를 비장하게 노려보았다.
‘뭐, 뭐지?’
할아버지의 큰 손 아래 깔린 건 돌돌 말린 종이 한 장.
고모가 올려놓은 것은 파란색 벨벳 보석함이었다.
“먼저 주거라.”
할아버지가 말하자, 고모가 보석함을 열었다.
동시에 쏟아져나오는 빛!
눈이 부셔서, 나는 팔을 들어 눈을 가려야 했다.
“아, 아니….”
웬 실명 마법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라 왕방울만 한 다이아몬드가 빛을 내고 있었다.
정중앙에 100캐럿은 되어 보이는 다이아몬드. 그리고 중간중간 크고 작은 물방울 모양의 다이아몬드가 주렁주렁 매달린….
무려 3단 체인 목걸이!
박물관에 ‘중세 왕족의 해도 해도 너무한 사치품’ 따위의 설명을 달고 전시되어 있을 것만 같은 생김새였다.
“어휴. 공주가 지금 저걸 어떻게 찹니까, 누님. 목 떨어지겠네.”
아빠가 케이크를 자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100캐럿이란다, 리리스.”
“그, 그, 그래 보여요….”
“지금 네가 차고 다닐 수 있도록 주문하려 했는데, 그러면 보석도 적게 들어가고 디자인도 고르기가 영 힘들지 뭐니. 가지고 있다가 사교계 데뷔 무도회 때 차고 나가렴. 모두 널 부러워할 거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곱 살 꼬마가 받을 만한 선물은 아니었지만.
내 반응을 살피는 고모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어서, 흐린 눈으로 보석함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고모! 넘넘 이뻐요! 잘 간직하구 있다가 나중에 키 크면 쓸게요!”
“후후, 그래.”
이쯤 되니 나는 할아버지의 선물이 두려워졌다.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종이 한 장이었지만, 분명 그 내용은 절대 초라하지 않겠지….
‘제발 땅문서 같은 거만 아니면 좋겠다.’
“땅문서다.”
신이시여. 할아버지는 내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다.
“동부에 있는 파르만 강 유역을 매입했더니 100에이커쯤 나오더구나.”
“어후, 파르만 강변이면 땅값이 어마어마할 텐데.”
아빠는 가족들 접시에 케이크를 나눠주며 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건… 이건 좀 아니지.
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손을 저었다.
“할아부지, 이거는 쫌….”
“승마하기 딱 좋은 곳이다. 아무래도 제도는 좁으니까. 종종 체시어와 다니면 좋지 않겠느냐?”
뭐라고? 내 귀가 쫑긋 섰다.
체시어를 돌아보니, 나처럼 놀란 눈치였다. 이내 살짝 귀를 붉히며 푹 고개를 숙여 버렸다.
‘제, 제피르랑 체시어랑 발터랑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십만 평이 훌쩍 넘는 놀이터?’
꼴깍,
침이 넘어갔다.
눈앞이 흐려졌다.
나 이러다 정말 자본주의에 찌든 재벌 3세가 되는 건 아닐까?
“가, 감사합니다. 할아부지. 저, 내년에도 승마 나가서 1등 할 수 있어요!”
결국, 나는 탐욕과 타협하고 말았다….
“그런데 체시어 너는 리리스 선물 뭐 없냐?”
레온이 케이크 위에 있는 딸기를 입에 넣으며 물었다.
나는 재빨리 아리스타타 꽃을 들어 보였다.
“여기 꽃 받았어!”
“엥. 그게 다야?”
레온, 바보!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
“나는 이거면….”
“여기.”
“…응?”
내 앞에 불쑥, 상자 하나가 내밀어졌다.
체시어는 부끄러운지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얼른 열어 봐!”
테오가 재촉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거기에는.
“아….”
귀여운 토끼 모양의 동전 지갑.
그리고 ‘라라 공주 마법봉’이 들어 있었다!
“푸하하! 꼬맹이 너 머리부터 발끝까지 라라 공주 풀 세트 다 맞췄네!”
“와, 우리 공주 좋겠다.”
얘는 마법봉을 어떻게 샀지? 라라 공주 구두보다 더 비쌌을 텐데.
나는 떨리는 손으로 선물을 꺼내 보았다.
그러자 밑에 있던 작은 카드 한 장이 툭 떨어졌다.
[생일 축하해.]
짧은 축하 말.
별거 아닌데 코끝이 시큰해졌다.
“고마워, 체시어….”
그리고 훌쩍이며 무심코 카드를 뒤집었을 때.
작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고마워.
네 옆은 꼭 천국 같아.]
“어….”
“왜 그래, 우리 공주? 뭔가 감동받은 표정인데? 체시어가 편지에 뭘 썼어?”
“아냐!”
나는 카드를 꾹 감추고 후아, 후아 심호흡을 했다.
네 옆은 꼭 천국 같아.
고민했는지 꾹꾹 눌러쓴 그 한 줄을 본 순간, 나는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 마디 말보다 더 감동이었다.
“우우….”
“고, 공주야?”
“으허어엉.”
결국, 나는 엉엉 울어버렸다.
* * *
“킁.”
“아니, 뭐라 적혀 있었는지 진짜 아빠 안 가르쳐 줄 거야?”
“응. 안 가르쳐 줘. 나만 볼 거야.”
“칫.”
한참을 울고 퉁퉁 부은 눈이 된 나는, 해가 저물 즈음 아빠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아빠는 대단한 선물을 보여 주겠다며 나를 정원의 구석진 곳 어딘가로 데려갔다.
“우, 우와아…?”
나는 놀라고 말았다.
굵은 나뭇가지에 단단하게 매달려 있는 것은,
흔들 그네였다!
“아하하하! 공주 갖고 싶었던 것 맞지?”
“세, 세상에!”
체시어가 준 마법봉을 들고 발을 동동 구르던 나는 호다닥 그네로 달려가 앉았다.
“말도 안 돼!”
제논에서 살 때, 앞마당이 좁아서 그네를 매달 나무가 없었다.
옆집 지미네 마당에 있는 그네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빌려 타려고 맨날 놀러 갔는데, 욕심 많은 지미는 자기 거라며 딱 5분만 태워주곤 했다.
치사하고 서러워서 눈물이 다 났었는데….
“좋아?”
“응! 응! 너무 좋아, 너무!”
지미네 그네보다 두 배는 더 커서, 아빠랑 나란히 앉아도 자리가 한참 남았다.
“으헤헤. 고마워, 아빠. 정말정말 최고야.”
“그럼 뽀뽀.”
나는 아빠의 오른쪽 뺨과 왼쪽 뺨에 번갈아 가며 열 번쯤 뽀뽀를 한 뒤 말했다.
“굴려줘!”
“좋아.”
아직 땅에 발이 닿지 않는 나를 대신해 아빠가 그네를 굴려줬다.
“우와아아!”
해 질 녘의 선선한 봄바람이 머리칼을 살랑 흩뜨려 놓았다.
“공주야.”
“응!”
“행복해?”
나는 아빠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씩 웃는 아빠의 얼굴을 보고 힘차게 대답했다.
“너무 행복해!”
“아하하.”
아직 시작도 안 한 원작.
정말로 모두가 행복해지려면 한참 남았지만.
내가 살아남아 아빠 옆에 있게 되어서, 무시무시한 원작이 어떻게 바뀔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냥 행복했다.
“아빠도 공주가 행복해서 행복해. 우리 공주, 아빠가 앞으로도 맨날맨날 행복하게 해 줄게.”
“…으응, 히히. 나도.”
이씨. 툭하면 울 것 같다.
눈물 자판기인가.
“나도 아빠….”
문득, 나는 그네 팔걸이에 작게 새겨진 글씨를 발견했다.
“아빠….”
아…. 아빤 왜 이런 걸 써서. 정말 눈물 나.
킁, 코를 훌쩍인 나는 울음을 참고 아빠 품에 안겨들었다.
“…나도 아빠 꼭 행복하게 해 줄게. 나만 믿어.”
“푸하하, 아빠는 우리 공주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기만 해도 너무 행복한데?”
“응, 노력할게. 이제 졸리니까 가서 자자.”
“졸려? 갑자기?”
“응.”
아빠가 나를 안고 일어났다. 나는 아빠의 어깨에 찔끔 흘린 눈물을 몰래 닦아냈다.
오늘은 많이 울었으니까.
또 울지는 말아야지.
[내 전부, 나의 세계.
아무리 거친 바람이 몰아쳐도,
아빠가 널 지켜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