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7/261)

* * *

이튿날.

오늘은, 양성소 입소 하루 전날이었다.

‘자, 이제 시작이야! 최종 보스인 황제와의 만남! 양성소 가서 실수라도 하면 대참사니까 정신 바짝 차리자!’

나는 의지를 굳건히 다지며 바리바리 짐을 싸기 시작했다.

도와주던 제티가 불쑥 품 안에서 뭔가 꺼냈다.

라라 공주 편지지?

제티가 내 귀에 대고 속닥였다.

“요거 우리 사장님 선물이에요. 아가씨께 전해달라셨어요. 양성소에서 꽤 유용하게 쓰일 거래요.”

“오홍.”

나는 곰돌이 가방 앞주머니에 리코의 편지를 넣었다.

“으흑. 우리 아가씨 없이 어떻게 살아. 난 못 해, 못 해!”

“쥰, 진짜 울어어? 나, 나 죽으러 가는 거 아닌데….”

자식 군대 보내는 엄마의 마음인 걸까?

엉엉 우는 쥰을 보고 있으려니 나도 마음이 안 좋아졌다. 안고 토닥토닥 해 주니 쥰은 더 크게 울었다.

“와, 시끄러.”

그때 껄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의자에 삐딱하게 걸터앉은 오스카였다.

“공부 시간에 뭐 하냐?”

“크흡. 죄송합니다, 마탑주님. 이만 나가 볼게요.”

“수고하십, 큽, 수고하십쇼.”

제티와 쥰이 눈물을 뿌리며 방을 나갔다.

나는 오스카를 불만스럽게 째렸다.

“왜 쫓아내여! 오늘 치 문제 다 풀었는데!”

벌떡 일어난 오스카가 가방을 싸고 있는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거만하게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3, 4, 8인 직육면체의 부피는?”

“96.”

“두 변의 길이가 각각 2, 4인 직각삼각형 빗변의 길이는?”

“2 루트 5.”

“반지름이 12인 원의 넓이는?”

“144파이.”

오스카는 그제야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정말 한 달 만에 양성소 졸업하겠는데?”

“괜히 시비야….”

나는 꿍얼거리며 마저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자, 선물.”

“엥?”

오스카가 불쑥 뭔가 내밀었다.

팔찌였다.

진주알 체인에 가운데에 큼직한 하트 모양 수정이 달린.

“내가 직접 디자인했지.”

오스카가 뿌듯해했다.

나는 눈앞에서 달랑거리는 그걸 보다가 풉 웃음을 터뜨렸다.

“완전 유치하다!”

“혼날래?”

콩, 오스카가 내 정수리에 꿀밤을 놨다.

“아, 왜 때려여!”

“손 줘 봐.”

오스카가 내 손에 팔찌를 채웠다.

흠, 막상 차고 보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이거 마도구야.”

“정말요? 무슨 마도구인데요?”

“양성소 가 보면 알게 될 거야. 소중히 차고 다녀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뒤돈 오스카가 손을 휘휘 저었다.

40분이나 일찍 끝내주다니. 오스카는 의외로 착한 사람일지도.

“감사합니다, 선생님! 잘 가세요!”

나는 곰돌이 가방을 야무지게 메고 오스카를 지나쳐 후다닥 달려가다가―

“……?”

―덜렁, 가방끈이 붙잡혀 들렸다.

“머죠?”

“어딜 그렇게 기다렸다는 듯 뽈뽈뽈 기어나가는데?”

“친구랑 놀라구요.”

“친구 누구.”

“체시어요.”

“…….”

오스카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더니 다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방금 한 말 취소. 공부 더 하게 앉아.”

“그,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여기~”

“남자가 한 입 갖고 두말을 한다구요?”

“내 맘~”

말이 안 통한다. 꼭 얄미운 초등학생 남동생이랑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씩씩거리며 다시 가방을 내려놓고 책상 앞에 앉았다.

“야.”

“머요.”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오스카를 노려보았다.

“너 걔 좋아해?”

“누구요? 체시어요?”

“어.”

“…? 좋아하죠? 제일 친한 친구예요.”

“친구 말고.”

오스카가 빈 종이에 하트 모양을 그렸다.

…뭐래, 진짜.

“왜 그런 걸 궁금해하시져?”

“지금 열한 살이던가? 완전 어리잖아. 그런데도 좋아?”

“……?”

질문의 의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체시어가 저보다 네 살이나 오빤데요?”

“…….”

오스카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도 지지 않고 맞서서 노려보았다.

결국, 먼저 백기를 든 오스카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 몸을 젖히며 중얼거렸다.

“어이가 없네.”

“머가 불만이시죠.”

“불만 없어.”

“있는데에?”

“책 펴라. 공부하자.”

오스카는 책을 펼쳤다.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주먹을 꼭 쥐었다.

“어이쿠, 무서워라. 뭐, 그 솜방망이로 한 대 치시게요?”

오스카가 킬킬거렸다.

얄미워 죽겠네, 진짜….

* * *

이튿날.

리리스의 <제국 능력자 양성소> 입소 당일.

햇살 한 줄기가 창에 들자마자 에녹 루빈슈타인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아.”

딸에 대한 걱정으로 새벽 내내 잠 못 들고 뒤척인 탓에 눈 밑이 검었다.

옆을 보니, 딸은 아직 꿈나라.

밀가루 반죽 같은 오동통한 뺨이 베개에 눌려 있었다.

귀여운 얼굴을 보며 숨죽여 웃은 에녹이 일어나 채비했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의 시작인데도 마음은 무거웠다.

“공주님, 일어나야지.”

개미만 한 목소리.

사실 깨우고 싶지가 않다. 아니, 정확히는 딸을 보내기 싫었다.

“으아아.”

두어 번 마른세수를 한 에녹이 리리스의 옆에 조심스럽게 몸을 뉘었다.

색색, 작은 숨소리를 내며 잠든 딸에게서는 여전히 아기 냄새가 났다.

‘이 조그만 걸 어떻게 보내냐….’

에녹은 입술을 물며 리리스의 작은 손바닥에 제 검지를 살며시 올렸다.

짧고 통통한 아기 손가락이 아빠 검지를 잠결에 꼬옥 쥐었다.

“큭큭.”

쪽, 뺨에 입을 맞추니 리리스의 감긴 눈꺼풀이 포르르 떨렸다.

몽롱한 눈을 천천히 뜨는 딸을 보고, 에녹이 재빨리 리리스의 애착 인형 토순이를 집었다.

그리고는 흠흠, 목을 가다듬고 구연동화 하듯 말했다.

“리리스, 햇님이 인사하고 있어! 토순이는 벌써 일어났는데, 리리스는 아직도 꿈나라야?”

“…으히히.”

부빗부빗, 눈을 비빈 리리스가 일어나 토순이를 끌어안았다.

에녹이 씩 웃었다.

“잘 잤어, 공주?”

“응!”

인형을 안은 리리스가 부스스한 머리로 웃으면서 에녹에게 안겨 왔다.

“읏차.”

딸은 항상 귀엽지만, 아침에 막 일어났을 때가 제일 귀여웠다.

어느 때부턴가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워진 딸이었지만.

“나 유령 꿍꺼써….”

“헉. 유령?”

아침에는 몽롱해서 그런 걸까?

딱 제 나이다웠다.

“유령이 뭐 했어. 리리스 잡아먹으려고 했어?”

“우응….”

“그래서? 도망쳤어?”

리리스를 무릎에 앉힌 에녹이 빗을 들고 물었다.

여전히 무거운 눈을 비비적대며 리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잡혔어…. 그치만 아빠가 와서 부지깽이로 다 잡았찌….”

“아하하! 그랬어?”

리리스의 머리를 빗겨주며 에녹이 큭큭 웃었다.

“오늘은 토끼….”

“토끼 머리 해 줘?”

“우응. 시무룩한 토끼….”

“시무룩한 토끼! 좋아쓰.”

귀가 처진 시무룩한 토끼.

밑으로 내려 묶는 양 갈래다.

능숙하게 머리를 완성한 에녹이 딸의 몸을 돌려 마주 앉혔다.

“어이구, 이쁘다. 울 딸 천사네, 천사.”

“오늘 간다!”

리리스가 방긋 웃으며 양손을 허공으로 번쩍 뻗었다.

“…….”

에녹이 웃는 채로 굳었다.

아빠랑 떨어져야 하는데 뭐가 그리 좋을까?

어제부터 바리바리 짐을 싸며 기대하던 딸은 입소 당일이 되니 더 들떠 있었다.

“공주야, 아빠 없어도 정말 괜찮은 거야? 혼자 씻고, 밥 먹고, 잘 수 있어?”

“응!”

“…….”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구 그냥 씩씩하게 가따 오께.”

“하아아아.”

아빠가 땅이 꺼져라 한숨 쉬고 나서야, 딸은 슬그머니 눈치 보기 시작했다.

‘돌겠네, 진짜.’

정작 딸은 씩씩한데 아빠가 돼서.

처음 품에 안았던 갓난아기 때부터, 에녹은 리리스와 오랜 시간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었다.

최소한 한 달.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성적이 나쁘면 그보다도 오래 양성소에 있을지 모른다.

면회도 안 되는데.

한 달 넘게 리리스와 떨어져서, 정말 괜찮을까….

“아빠아.”

“으응.”

리리스가 침울해 보이는 에녹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빵이 모게~?”

“갑자기? 울 공주, 빵 먹고 싶어?”

“아니아니, 맞혀바! 내가 젤루 조아하는 빵이 모게!”

“빵이라.”

초콜릿이랑 마카롱을 제일 좋아하고, 빵은….

“케이크? 우리 공주, 딸기 케이크를 좋아하지.”

“땡! 틀렸어!”

“아니야? 그럼 뭔데?”

리리스가 씨익 웃더니 에녹의 목을 끌어안고 말했다.

“아빵~!♥”

“…아.”

정말, 기어이.

“으항항! 나 얼른 가따 오께. 쫌만 기다려, 아빠.”

눈물 나게 한다.

이 작은 천사는.

“그래, 우리 공주….”

시큰해진 눈가를 한 손으로 덮은 채, 울컥한 에녹은 딸을 꽉 끌어안았다.

“아빠가 기다리고 있을게….”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