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9/261)

* * *

주신, ‘프리메라’.

그 프리메라의 권능을 고스란히 부여받았다는 역대 파빌리온 제국 황제들.

모든 능력자는 마나를 가지고 태어났어도 프리메라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마법을 쓸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조금 전, 심장에 있는 코어를 황제가 열어줌으로써 진정한 능력자로 거듭났다.

이제 아무것도 못 하는 한없이 약한 일곱 살 애기 리리스가 아니란 말씀.

“으히힛.”

나는 입을 막고 쿡쿡 웃었다.

황제는 모르겠지만, 훗날 내게 힘을 허락한 이날을 두고두고 후회하겠지.

“아자아자!”

나는 우렁찬 기합을 넣은 뒤 관리자를 따라 앞으로 지낼 방에 도착했다.

양성소는 기숙사제.

곧바로 문에 달린 명패부터 확인했다.

같은 방을 쓰게 될 여자아이들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앨리샤 마이어   

    다이앤 베커     

      미셸 콜먼       

            젬            

리리스 루빈슈타인

기숙사 문에 걸린 명패까지 명찰 색이다.

‘정신 나간 양성소 같으니라고.’

속으로 이를 갈며 들어갔다.

방은 무척 넓었다.

두 명은 족히 눕고도 남을 듯한 2층 침대가 네 대나 되었다.

나를 발견한 여자아이 셋이 후다닥 달려왔다.

“안녕, 안녕! 반가워. 난 앨리샤 마이어야. 여기 예쁜 애는 다이앤이구, 여기 귀여운 애는 미셸! 우리 다 아홉 살인데, 말 편하게 해!”

분홍색 단발의 앨리샤가 노란 눈을 빛내며 수줍게 친구들을 소개했다.

허리까지 오는 긴 남색 머리칼의 청초한 스타일이 다이앤이고.

연갈색 머리를 양쪽으로 땋은 작고 귀여운 친구가 미셸.

나는 룸메이트들의 특징을 머리에 입력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응응, 반가워! 앨리샤, 네 언니 샬롯 마이어 맞지? 전에 우리 집에 놀러 왔었어!”

“맞아! 우리 언니랑 만났었구나!”

앨리샤가 환하게 웃으며 내 팔짱을 꼈다.

“다이앤, 미셸. 너희들도 반가워. 잘 지내보자! 근데 한 명 더 있지 않아?”

내가 묻자, 아이들의 표정이 굳었다.

미셸이 어색하게 웃으며 뒤돌아보았다.

“응. 우리랑 같은 방이긴 한데, 인사는 안 해도 돼.”

아이들의 시선이 닿은 곳에 누군가가 있었다.

침대 1층에 벽을 보고 누워있는 뒷모습.

붉은 머리카락은 남자애들처럼 짧게 잘려 있어서, 여자 방이 아니었다면 오해할 뻔했다.

‘쟤가 젬이라는 아이겠네. 평민이겠구나.’

이 약육강식 피라미드 세계에서 최하층 피식자일 터.

룸메이트들은 다들 그럭저럭 성격 좋아 보였지만, 그렇다고 평민과 어울리지는 않겠지.

‘그런데 왜 굳이 평민을 한 방에 넣었을까? 양성소 돌아가는 꼴을 보면 비슷한 급의 가문끼리만 묶어 둘 것 같은데.’

의문은 곧 해소되었다.

“리리스, 배 안 고파? 지금 딱 오후 간식 시간이거든.”

다이앤이 상냥하게 물어왔다.

“여기 간식도 줘?”

“응응. 식당에서 받아오면 돼.”

아이들의 눈이 일제히 침대 위에 누운 젬에게 향했다.

미셸이 소리쳤다.

“야! 너, 너… 빨리 가서 간식 가져와!”

“싫어. 난 안 먹을 거야.”

“저, 저게 또? 네가 안 먹으면 어쩔 건데! 우리 거 가져오란 말야!”

“…….”

젬은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앨리샤가 내 눈치를 힐끗 보더니 질끈 눈 감고 소리 질렀다.

“이이…, 처, 천한 평민 기지배! 너 얘가 누군지 알아? 루빈슈타인 공녀님이란 말이야! 우리가 맨날 봐줬지만, 너 이젠 말 들어야 해!”

젬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눈꼬리가 올라간 매서운 인상의 젬은 얼핏 봐서는 소년 같았다.

우리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이기도 했고.

“싫다고 했지. 쟤가 누구든 무슨 상관이야. 배고프면 너희가 너희 손으로 직접 가져다 먹어.”

키도 덩치도 크고 얼굴도 사나워 보이는 젬이었다.

매서운 일갈에 겁먹었는지, 아이들은 일제히 목을 집어넣고 입만 삐죽거렸다.

‘음, 평민들을 한 명씩 끼워서 방 배정하는 이유를 알겠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 방 말고도 모든 방에 흰색 명찰을 단 아이들이 섞여 있을 거다.

그 아이들의 위치는?

시종이나 다름없겠지.

이런 식으로 서로의 계급 차이를 알려주고 위계를 공고히 하란 뜻이었다.

‘와, 무조건이야. 진짜 무조건. 이 양성소부터 가장 먼저 없애야 해.’

여긴 적폐의 씨앗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경계하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젬에게 웃어줬다.

“저 애가 시종도 아닌데 왜 우리 간식을 가져다줘? 직접 가져다 먹자. 다 같이 갈래?”

“어머, 리리스.”

“너 되게 착하다.”

“쟤 이상해. 다른 방 평민들은 다 시키는 대로 하는데 쟤만 저렇게….”

“젬, 너도 같이 갈래?”

내가 물었지만, 젬은 무시하고 휙 등을 돌리며 다시 누웠다.

“우와, 저 나쁜 기지배 봐!”

“리리스, 그냥 우리끼리 가자.”

나는 한숨을 쉬고 룸메이트들과 밖으로 나왔다.

과연….

흰색 명찰을 단 아이들이 품 안 가득 빵과 우유를 안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빵셔틀 실화냐….’

어디서부터 이 환경을 개선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그러다 문득 경악했다.

“맞다!”

“왜 그래, 리리스?”

우리 체시어도 명찰 흰색인데!

* * *

체시어는 작은 계급 사회와도 같은 양성소의 실태를 누구보다 빠르게 인지했다.

룸메이트는 네 명.

그들 각자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야, 평민.”

껄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침대에 앉아 있던 체시어가 눈을 들었다.

“너 루빈슈타인 공녀랑 무슨 사이야? 아까 입소식 끝나고 엄청 친하게 얘기하던데?”

브루스 챔버.

빨간색 명찰을 달고 있다.

최상위 포식자인 금색 명찰을 제외하면 제일 높은 등급.

부모의 계급이 높단 뜻이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야.”

“아무 사이도 아니긴? 똑바로 말해. 너 뭐 돼? 평민 아니야?”

“평민 맞아.”

“맞다고? 뭐 없어? 근데 어떻게 공녀랑 아는 사인데?”

브루스가 험악하게 재차 물었다.

그러자 옆에 졸병처럼 붙어 있던 아이가 브루스를 쿡쿡 찔렀다.

“형, 형. 내 생각엔, 이거 이거.”

아이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아래위로 훑는 시늉을 해 보였다.

“뭐? 얼굴?”

브루스가 체시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하, 그래…. 얼굴 좀 반반해서 공녀 눈에 띄었나 보네.”

“그치.”

부하처럼 브루스의 말에 장단을 맞추는 아이의 이름은 사이먼.

파란색 명찰.

빨간색 다음 급으로 보인다.

이 방의 행동대장은 브루스.

그리고 사이먼은 브루스의 비위를 맞추는 졸개.

체시어가 파악을 끝냈다.

“괜히 쫄았네. 그럼 반반한 얼굴 빼곤 뭐 없다 이거지?”

“형, 마침 간식 시간인데?”

“그러게.”

사이먼이 말하자, 브루스가 실실거렸다.

“야, 평민! 너 식당 가서 우리 간식 가져와. 물도 새로 떠놓고.”

브루스가 방에 있는 물 주전자를 가리켰다.

그걸 본 체시어가 물었다.

“간식이나 물 가져오는 당번이 따로 있어?”

“뭐래?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럼 왜 내가 해야 하지?”

브루스와 사이먼이 비웃었다.

이내 브루스가 제 가슴팍에 달린 명찰과 체시어의 명찰을 번갈아 툭툭 쳤다.

“설명 끝?”

“아.”

어쩐지.

같은 색의 명찰끼리 방 배정을 받을 줄 알았는데, 귀족들과 함께 방을 쓰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싫어.”

체시어는 짧게 대답하고 침대에 앉아 짐을 풀기 시작했다.

“뭐?”

“싫다고. 직접 가져다 먹어.”

“얘 뭐래냐, 지금?”

브루스가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뒤를 돌아봤다.

“형! 이 새끼 어떻게 할까?”

험악한 방의 분위기와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침대 2층에서 책을 읽는 아이가 있었다.

그를 힐긋 본 체시어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왜 그런 걸 나한테 물어, 브루스. 형 지금 책 읽느라 바쁘잖아.”

“어, 어. 그래. 미안….”

연보랏빛 결 좋은 머리카락과 그보다 조금 짙은 제비꽃 색 눈동자.

꼭 여자아이처럼 미려한 얼굴을 한 그의 이름은 제라드 슈미트.

행동대장 브루스가 절절매는 것을 보면, 이 방의 실세는 제라드다.

…금색 명찰이었다.

“저, 얘들아. 싸, 싸우지 마. 워, 원래 하던 대로 내가 가져올게.”

그때 소심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마지막 룸메이트가 끼어들었다.

아이의 이름은 롬.

흰색 명찰의 평민.

이 방의 최하층 피식자였다.

“야, 야. 일로 와 봐.”

브루스가 손짓하자 롬이 다가왔다.

퍽―!

체시어의 눈이 커졌다.

다짜고짜 롬의 머리를 때린 브루스가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맞을라고 끼어들어? 너 쥐 죽은 듯이 있으라고 했지. 내가 말 걸기 전에는 입 열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해, 했어. 미안….”

“어휴, 넌 왜 이렇게 맨날 까먹냐?”

사이먼이 롬의 머리를 툭툭 쳤다.

그때, 보다 못한 체시어가 벌떡 일어났다.

아이들보다 한참은 큰 키.

“흡.”

순간 흠칫한 브루스와 사이먼이 목을 쑥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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