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60/261)

“…그래. 가져올게.”

그러나, 기세와는 달리 의외로 순순한 대답.

‘곤란하네.’

체시어는 벌벌 떠는 롬을 힐끔 봤다.

그에게는 딱히 선택지가 없었다.

계속 버텼다간 화풀이를 롬에게 해댈 테니.

“풉!”

긴장했던 브루스가 푸하하 웃었다.

“새끼, 진작 그럴 것이지! 제라드 형님 거 헷갈리지 말고 똑바로 가져와!”

체시어가 방을 나섰다.

흰색 명찰을 단 아이들이 분주히 품에 빵을 안고 오가고 있었다.

‘대단하네. 여기.’

리리스와 같은 감상이었다.

“체, 체시어!”

그때 누군가가 불렀다.

따라 나온 롬이었다.

“가, 같이 가자. 시, 식당 어딘지 모르잖아.”

“그래.”

롬이 살짝 앞장서며 말했다.

“너, 너 위해서 말해주는 건데, 브, 브루스한테는 되도록 마, 말대꾸하지 마. 화, 화나면 자주 손이 오, 올라가서….”

“말은 왜 그렇게 더듬어?”

“헉! 미, 미안. 드, 듣기 불편하지. 워, 원래는 안 이랬는데…. 여, 여기 드, 들어오고 나서 갑자기, 어, 이렇게 돼서….”

시달리다 언어 장애까지 온 건가.

체시어가 긴 한숨을 터뜨렸다.

“여, 여기가 식당이야. 저, 저기 줄 서서 바, 받으면 돼.”

배식구가 세 개.

간식 종류도 세 가지였다.

퍽퍽한 호밀빵, 크림빵, 마카롱이 하나씩 포장되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줄을 서려던 체시어가 멈칫했다.

‘리리스?’

왜인지 리리스가 멀리서 혼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으앙, 체시어!”

이내 체시어를 발견한 리리스가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졌다.

“올 줄 알았어, 너!”

리리스가 다짜고짜 씩씩거렸다.

“지금 빵셔…, 아니, 룸메이트들 간식 대신 가지러 왔지?”

“아냐. 그냥 배고파서 내 몫 받으러 온 거야.”

“거짓말!”

리리스가 빽 소리쳤다.

그때 롬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마, 맞아.”

“응?”

“아, 안녕. 나, 나는 로, 롬이야. 체시어랑 같은 방이야. 그, 그리고 룸메이트들 가, 간식 대신 바, 받으러 온 거 맞아. 체시어한테 시, 시켜서….”

기다렸다는 듯 말하는 롬을 보며 체시어는 허, 웃었다.

마냥 소심한 평민인 줄 알았더니 눈치가 제법 있었다.

리리스가 구명줄이 되어주리란 걸 느낀 모양이지.

“알려 줘서 고마워, 롬.”

대답한 리리스가 체시어의 뒤에 졸졸 따라붙었다.

“너 여기 있는 내내 간식 배달부 할 거 아니지? 시키는 대로 하지 마. 절대 하지 마.”

“내 몫 받으러 온 거라니까.”

“으앙, 답답해!”

“리리스.”

주변의 눈치를 본 체시어가 리리스의 귀에 속삭였다.

“나랑 아는 척하지 마.”

“뭐어?”

“너한테 별로 좋을 거 없어.”

“내가 뭐라고 대답할 거 같은데?”

“싫다고 하겠지.”

“응, 맞아.”

“한 달이면 되잖아. 참아. 난 시끄럽게 굴기 싫어. 괜히 여기서 사고라도 치면 아저씨에게 민폐니까.”

“우와!”

리리스가 방긋 웃으며 손뼉을 짝 쳤다.

“울 아빠가 들으면 진짜진짜 좋아하겠다! 체시어가 나한테 민폐 안 주려구 간식 배달까지 하다니 정말 기분 좋구나~! 그르겠지? 그치?”

“비꼬지 마.”

화도 안 내고. 기분 나쁜 티도 안 내고.

한결같은 체시어의 반응에 리리스는 이를 갈았다.

“너, 일루 와.”

리리스가 갑자기 체시어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향했다.

마카롱이 있는 배식구였다.

제일 인기 많은 간식일 듯한데, 왜인지 마카롱 배식구 앞에는 줄 선 아이들이 없었다.

‘아, 설마?’

의아해하던 체시어가 브루스의 말을 떠올렸다.

“…제라드 형님 거 헷갈리지 말고 똑바로 가져와!”

제라드. 금색 명찰.

배식받는 간식 종류에도 차이를 두는 모양이었다.

‘정말 대단하네.’

체시어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롬, 너희 방 애들 몇 명이야?”

“어, 어? 다, 다섯 명….”

롬이 대답하자 리리스가 마카롱 다섯 개를 챙겨주었다.

“이, 이거 우, 우리는 모, 못 먹는 건데….”

“괜찮아. 나는 이거 여러 개 가져가도 된댔어.”

“어어, 고, 고, 고마워….”

“롬, 가서 네 방 애들한테 이거 나눠주면서 말해.”

“뭐, 뭐라고?”

“리리스 루빈슈타인이 준 거라구. 꼬옥, 내 이름 말하고.”

리리스가 체시어를 가리켰다.

“앞으로 얘한테 빵 배달 시키는 거 보이면 내가 직접 그 방에 찾아간다구 말해. 그러면….”

제 딴에는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은 리리스가 주먹 꺾는 시늉을 하며 덧붙였다.

“…아주아주 큰 일이 일어날 거라구 말이야.”

“리리스.”

“그, 그럴게!”

말리려던 체시어가, 고민도 없이 대답하는 롬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리리스가 롬의 손을 붙잡고 위아래로 흔들며 활짝 웃었다.

“고마워, 롬! 우리 체시어한테 안 답답한 친구가 생겨서 다행이다!”

롬이 수줍은 듯 눈을 내리깔았다.

* * *

저녁 식사 시간.

나는 룸메이트들과 함께 식당에 도착했다.

같은 방을 쓰는 아이들끼리 모여 식사를 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이야.’

북적북적한 식당 풍경이 가관이었다.

‘대단하네.’

속으로 이 생각을 몇 번이나 한 건지.

명찰에 색이 들어간 아이들. 그러니까 귀족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얀 명찰들만 배식구에 줄을 서서 식판을 네다섯 개씩 받아 옮겨주고 있었다.

“힝, 짜증 나.”

내 옆에 줄을 서 있던 앨리샤가 우는 시늉을 했다.

“다른 방은 다 평민들이 가져다주는데 우리만 이게 뭐야!”

우리 방 흰색 명찰, 젬은 성깔 있는 평민이었다.

여태껏 아이들의 요구에 순순히 따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다른 방에 비해 유순한 우리 방 아이들은 툭하면 욱하는 젬에게 재차 요구하지 않았고 말이다.

‘우리 체시어 성격이 젬의 반만 닮았으면 좋으련만.’

먼저 배식을 받고 홀로 고고하게 식사 중인 젬이 보였다.

“야, 야! 너, 저 방 애들 것도 같이 받아다 줘!”

그때 근처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귀족 남자아이 한 명이 제 방 평민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평민 아이가 내게 쪼르르 달려왔다.

“앉아 있어! 너희들 것도 가져다줄게!”

나는 그쪽을 쳐다보았다.

대신 식판 받기를 시킨 귀족 아이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찡긋 윙크를 해 보였다.

저쪽 테이블의 신사분이 보내셨습니다― 같은 건가.

‘어이가 없네.’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괜찮아. 나는 내가 직접 받을게.”

“으응?”

평민 아이가 당황했다.

“리리스, 우리도 그냥 가서 앉아 있자아. 이게 뭐야아.”

“앨리샤 말이 맞아. 힝, 우린 몰라도 네가 직접 식판을 받는다니 말도 안 돼.”

앨리샤와 미셸이 차례대로 말했다.

“싫어.”

나는 단호하게 대꾸했다.

“손발 멀쩡한데 왜 내 식사를 남한테 받아 달라구 해야 해? 난 내가 직접 할래.”

“응?”

“너희들은 그냥 앉아 있으려구?”

“아, 아니!”

“어어, 나두 아니!”

“나, 나도 내가 받을게….”

분명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룸메이트들은 하는 수 없이 따랐다.

‘진짜 여기 숨 막히네.’

나를 따라 직접 배식받는 룸메이트들도 전부 내 명찰이 금색이기 때문에 따르는 것일 뿐.

이게 잘못됐다고 생각해서 직접 받는 게 아니었다.

“……?”

막 배식을 끝마친 순간.

바로 옆 배식구에 마침 배식을 마친 체시어가 보였다.

그의 손에는 식판 세 개가 아슬아슬하게 들려 있었다.

뒤에 선 롬의 손에는 식판 두 개.

“아, 혈압….”

나는 배식구에 내 식판을 텅, 소리 나게 내려놨다.

“하지 마.”

체시어가 조용히 말렸다.

“왜. 내가 멀 할 것 같은데?”

“소란 피우지 말라고. 지금은 귀족 애들도 다 보고 있어.”

“그래? 알겠어. 근데 너, 식판 너무 무거워 보인다. 내가 도와줄게!”

“됐어.”

“한 개 정도는 내가 들어줄 수 있어.”

“리리스!”

나는 체시어의 왼손에 겹쳐 올라 있던 식판 하나를 들고 뒤돌았다.

“하아.”

뒤에서 체시어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나는 롬에게 물었다.

“너희들 자리 어디야?”

“저, 저, 저쪽 끝.”

“가자.”

“으, 응!”

롬은 살짝 앞장서며 말했다.

“이, 있잖아. 아, 아까 네가 시, 시킨 대로 브, 브루스한테 말하려고 해, 했는데 체, 체시어가 말려서 마, 말을 못 했어.”

“그랬을 거 같아.”

“미, 미안해.”

“에이,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닌걸?”

“고, 고, 고마워. 너, 너 진짜 차, 착하구나….”

“여기야?”

“어, 으, 으응.”

나는 체시어의 룸메이트들이 모인 테이블 앞에 섰다.

‘브루스 챔버.’

나는 빨간색 명찰을 읽었다.

“안녕, 브루스.”

“어, 어?”

브루스가 허둥거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얼굴을 붉히며 실실거리더니 악수하려는지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 리리스. 난 브루스 챔버라고 해.”

“응. 네 식판 내가 가져왔어.”

나는 내민 손을 무시하고 텅, 소리 나게 브루스의 앞에 식판을 놓았다.

“응? 이걸 네가 왜….”

나는 브루스의 손목을 덥석 잡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혹시 손목 아퍼? 뿌러졌어?”

“아니?”

“그럼 왜 네 손으로 식사를 안 받아?”

“응?”

“손목 아픈 거 아니면 앞으로 네가 직접 받아. 간식도 마찬가지야. 얘들한테 시키지 마.”

나는 뒤에 있는 체시어와 롬을 가리켰다.

멍하니 나를 쳐다보던 브루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 리리스? 네가 입소 첫날이라 잘 모르나 본데…. 원래 흰색 명찰이 이런 거 다 하는 거야.”

“그런 규칙이 있어?”

“아니, 규칙은 아니고. 으음, 다들 그냥 그렇게 해.”

“아하! 명찰 색깔이 더 좋은 애들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구나?”

“맞아!”

“글쿠나. 그럼.”

나는 웃다가 얼굴을 싹 굳혔다.

그리고 내 가슴팍의 옷깃을 들어 금색 명찰을 내보였다.

“너는 내 말 들어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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