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1/261)

브루스가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이제부터 네가 직접 가져다 먹어. 식사도, 간식도.”

“뭐, 뭐?”

“팔 뿌러졌으면 친구들한테 부탁하는 거 봐줄게. 그니까 정 움직이기 싫으면 내 방으로 찾아와! 손목….”

나는 허공에 두 손을 들고 뭔가 와그작 부러뜨리는 시늉을 한 뒤 덧붙였다.

“…뿌러뜨려줄 테니까!”

그 말에, 웅성거리던 주변이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브루스의 얼굴이 점차 새파래졌다.

“여, 여기 애들도 많은데 너무하잖아…. 이건 당연한 일이야. 다들 그렇게 한다고….”

“응, 그래서 어쩌라구? 내 명찰 색깔 안 보여?”

나는 얄밉게 고개를 갸웃하며 덧붙였다.

“설마~? 내 말 듣기 싫다는 거야?”

“아, 아니….”

“풉.”

그때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적막한 분위기를 깼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남자아이.

‘금색이네.’

명찰 색깔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다음에는 이름이 보였다.

‘제, 제라드 슈미트?’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슈미트 공작 가문의 막내아들.

후에 성기사가 되어 울 아빠 밑에 들어가는 인물이었다.

참고로 내 기준 악당이다.

체시어를 죽어라 싫어할 예정이거든.

“푸하하하!”

제라드는 뭐가 그리 웃긴지 눈꼬리에 눈물까지 매달고 웃었다.

그러다 나를 쳐다봤다.

빙긋, 웃는데 연보랏빛 머리칼에 짙은 자색 눈, 투명한 피부가 무척 수려한 외모였다.

역시 비중대로 미모가 업그레이드되는 세계관.

“재밌다.”

“혀, 형님. 어떡해?”

“뭘 어떡해.”

우는소리를 하는 브루스를 향해 제라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말 들어야지.”

“어, 어?”

“말 들으라고, 브루스.”

“…….”

“가서 식판 직접 받아 와.”

말하면서도, 제라드는 내게 빤히 꽂힌 눈을 떼지 않았다.

묘한 웃음을 띤 얼굴이 그 나이 또래 애들 같아 보이지 않았다.

“하, 허어….”

결국, 브루스가 터덜터덜 배식구로 걸음을 옮겼다.

제라드는 계속 나를 쳐다보았고 나도 지지 않고 그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 * *

그날 저녁.

취침을 앞둔 시간.

침대 2층에 꼬물꼬물 올라간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리코가 준 ‘선물’을 펼쳐보았다.

리코의 선물은 매우 유용했다.

현재 양성소에 있는, 유념해야 할 귀족 아이들 몇몇의 정보.

제라드 슈미트는 그중에서도 1번이었다.

‘리코 편지를 미리 읽어서, 얘가 지금 양성소에 있는 건 알고 있었는데….’

설마 체시어의 룸메이트일 줄이야.

‘체시어는 원작보다 2년이나 빨리 입소했잖아!’

그러니까 원작대로라면 제라드와 체시어는 기수도 달라 지금 만날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관련이 있는 인물들은 원작이 조금 바뀌어도 어떻게든 엮이고 있어. 울 아빠가 제도에 오자마자 귀신같이 체시어 발견했던 것처럼.’

원작의 개연성이란, 참으로 무시무시했다.

[제라드 슈미트

슈미트 공작이 애지중지하는 가문의 막내입니다.

올해 3월에 입소했으니 아가씨와 같은 1026기겠군요.

하지만 대부분 9살인 1026기들과 달리 11살입니다.

슈미트 공작이 황실에 선처를 구해 입소를 2년이나 미뤘거든요.

양성소를 졸업하고 나면 소년병으로 차출될 테니, 최대한 품에 끼고 있고 싶어 했죠.

참고로 제라드 슈미트의 위로 있던 장남과 차남은 전사했습니다.]

원작에서 성기사가 된 제라드는 우리 아빠를 무척 동경했다.

그래서일까? 아빠의 양자이고, 자기보다 뭐든 잘하는 체시어에게 열등감과 질투를 느꼈다.

체시어와 함께 출정할 때마다 사사건건 어깃장을 놔서 몇 번이나 위험을 겪었는지.

참고로….

물도 없이 퍽퍽한 고구마 꾸역꾸역 삼켰던 원작 2권의 대규모 마수 토벌전.

거기서 우리 레온 오라버니가 죽었던 이유가 뭔지 아는가?

‘이 자식 때문이지!’

「……마수들을 상대하는 것은 체시어에게 항상 버거웠다. 힘의 상성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수들은 체시어의 공격을 절반 이상 상쇄했고, 그들의 힘이 팽배한 공간에서는 시간의 밀도를 조절할 수도 없었다.

“토벌은 여기서 마친다. 지금 우리 쪽 피해도 심하고, 더 안쪽은 험지라 지형도 불리해.”

“무서우면 마검사단은 퇴군해.”

체시어의 결정에, 제라드 슈미트가 비아냥거렸다. 토벌 기간 동안 벌써 수십 번은 있어 온 의견 충돌이었다.

“전부 토벌하지 못하면 모든 게 허사인 거 모르나? 지금까지 한 고생이 다 헛수고가 된다고. 전공은 내가 챙길 테니 겁쟁이는 꺼져.”

“부하들의 목숨보다 전공이 더 중요한가? 성공할 확률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말리지 않겠다. 하지만, 이대로는 개죽음이야.”

“그럼 지켜나 보라고. 개죽음을 당하는지, 영웅이 탄생하는지.”

“제라드 경!”

제라드는 성기사단을 이끌어 먼저 떠나갔다. 그들을 지켜보며 이를 악문 체시어에게 레온 앙트라세가 다가왔다.

“이야, 저 새끼는 진짜 말 더럽게 안 듣네. 무서운 게 없나? 그보다는 네가 뭔 말을 하든 반대로 하려는 것 같지? 청개구리야, 뭐야?”

“…….”

“어쩔래? 가야겠지?”

저들만으로는 절대 토벌에 성공할 수 없다. 그나마 피해를 줄이려면 마검사단을 움직여야 했다.

결국, 체시어는 토벌을 강행했고 그날의 선택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

전멸에 가까운 참패.

살아 나갈 수 있을까. 생존마저 불확실한 아비규환.

“체시어! 젠장, 위험해!”

뒤에서 벼락처럼 떨어진 레온의 목소리에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형?”

“아, 아….”

“형!!!”

흉측한 마수의 팔이 체시어를 막아선 레온의 몸을 관통해 있었다.

하얗게 질린 레온이 체시어를 돌아보며 입을 벌린 순간―

“체시…, 커헉!”」

‘으아아앙!’

나는 속으로 비명을 삼키며 애꿎은 베개만 팡팡 내리쳤다.

그 뒤에는 들어갔던 마수의 팔이 쑥 다시 나오고 피를 토하고 어쩌고….

전체연령가와는 어울리지 않는 묘사가 이어지니 내 정신 건강을 위해서 여기까지만 떠올리자.

“오빠아아…. 어흐흑.”

나는 이를 꽉 물고 이불을 한껏 말아 쥐었다.

우리 레온 살려.

원작 2권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다지만, 이미 이것저것 손을 대 놨으니 뭐가 어찌 바뀔지 모를 일이다.

또, 가장 큰 문제는.

제라드 슈미트 이 녀석.

‘이딴 놈이 우리 편이라니….’

무슨 말이냐면, 체시어 입장에서는 악당일지 몰라도 혁명군 입장에서는 아군이란 뜻이다.

‘얄미워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놈인걸.’

제국의 5개 공작가 중, 울 아빠의 반란에 동참한 가문은 세 곳.

쌍둥이 오빠들의 앙트라세, 악시온 삼촌의 리브르, 그리고 이 슈미트였다.

‘귀한 아들 고생하는 꼴 못 보고 2년이나 입소를 미뤘던 걸 보면 뻔해. 제라드 아버지도 강제 징병제에 치를 떨겠지.’

위로 있던 아들을 둘이나 전쟁터에서 잃었으니.

슈미트 공작이 막내 제라드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길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근데 우리 편이면 뭐 어쩌라고! 내가 제일 안 좋아하는 놈이었는데!’

제라드는 진짜… 웬만한 악당 엑스트라보다 더 재수 없었다.

이 자식 때문에 굳이 안 먹어도 될 고구마를 꾸역꾸역 몇 번이나 삼켰는지.

나는 한참 고민했다.

‘하아, 어쩔 수 없어. 싫어도 슈미트는 엄청난 전력이고 아군이니까.’

그리고 결정한 뒤, 리코의 편지를 접었다.

제라드는 지금 열한 살.

그래도 아직은 어린 나이다.

싹수가 노래지기 전이 아닐까?

그러니까….

‘지금부터 정신교육 바짝 시켜서 착하게 키워 보자.’

* * *

이튿날, 오전 7시.

아침 식사 시간.

아이들은 각자 룸메이트들과 두런두런 얘기하며 식사 중이었다.

체시어도 그곳에 있었다.

물론 말이 룸메이트지, 평민들은 대화에 끼워주지도 않았지만.

“형, 형! 형은 당연히 도스겠지? 부럽다.”

“글쎄. 확인해 봐야 알지.”

브루스가 연신 제라드에게 말을 걸면, 제라드는 미미한 웃음을 띤 특유의 표정과 함께 건성으로 답할 뿐이었다.

“몇 년 동안 도스가 계속 안 나왔다던데 이번에는 둘이나 나오겠다! 진짜 대단해.”

1026기 중 금색 명찰은 둘.

명찰 색은 부모의 계급에 따라 예상되는 자식의 계급을 미리 매겨 놓은 것이었다.

브루스가 말하는 도스 둘은 제라드와 리리스였다.

“엇, 왔네.”

“왔다….”

브루스와 그의 졸개 사이먼이 식당 입구를 힐끔거렸다.

체시어가 살짝 눈을 들었다.

리리스와 리리스의 룸메이트들.

리리스는 그냥 돌아다니기만 해도 주목받았다. 지금도 식당 안의 모두가 그녀를 주시했다.

“쟤는 근데 왜 자기 손으로 식판 받는 거야?”

배식구에 줄을 선 리리스를 보고 브루스가 구시렁거렸다.

“체시어 저 자식 반반한 얼굴이 마음에 들어서 싸고도는 건 알겠는데…. 다른 건 진짜 모르겠다. 왜 저러지?”

의아해하던 브루스가 갑자기 흠칫 놀랐다. 배식을 받은 리리스가 가까이 오고 있었다.

“뭐, 뭐야? 여기로 오는데?”

정말이었다. 리리스가 테이블 옆에 와서 섰다.

브루스가 당황했다.

“나, 나 오늘은 체시어 안 시켰어!”

“그래? 잘했어.”

브루스에게 용건이 있는 건 아니었는지 리리스는 대충 대꾸했다.

그리고 가만히 서서 제라드를 빤히 쳐다보다가 그의 식판 옆에 턱, 뭔가를 내려놓았다.

아침 식사로 나온 주스였다.

“……?”

제라드가 고개를 들었다.

리리스가 방긋 웃었다.

“마셔.”

“…….”

뭐지? 주변 아이들이 전부 둘을 흥미롭게 훔쳐보았다.

가만히 리리스를 쳐다보던 제라드가 이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응. 식사 맛있게 해!”

그리고 리리스는 더 용건이 없는 듯 휙 몸을 틀었다.

리리스가 떠나간 자리.

모두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뭐야! 혀, 형 좋겠다?”

“형이랑 친해지고 싶은가 본데?”

브루스와 사이먼이 조잘거렸다.

그때, 갑자기 제라드가 체시어를 쳐다보았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뭐야.’

픽 웃은 제라드가 주스를 들고 약 올리듯 체시어를 향해 흔들어 보였다.

‘뭐 어쩌라는 건지.’

이상한 녀석.

체시어는 곧바로 눈을 떼고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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