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2/261)

* * *

“리리스 너, 제라드 마음에 들어?”

“엥. 아니.”

“그런데 주스 왜 줬어?”

밥을 먹고 통통해진 배를 두드리며 나오는데, 앨리샤가 흥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다이앤도, 미셸도 전부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으음. 그냥.”

“에이, 그냥이 어디 있어? 부끄러워 안 해도 돼. 여기 여자애들 절반은 다 제라드 좋아할걸?”

“왜? 인기 많아?”

“최고지. 잘생겼잖아.”

“맞아. 잘생겼잖아.”

“완전 왕자님 같잖아….”

귀여운 아홉 살 소녀들은 아기 천사처럼 손을 모으고 헤벌쭉 입을 벌렸다.

“체시어가 더 잘생겼는데.”

내 말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왜인지 우물쭈물하던 앨리샤가 내 어깨를 쿡 찔렀다.

“있잖아, 리리스. 너 체시어 걔랑 무슨 사이야? 엄청 친해 보이던데.”

“응, 체시어는….”

나는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제저녁에 체시어가 따로 나를 불러 당부한 말이 떠올라서였다.

“아저씨가 내 후견인인 거랑 네 집에서 사는 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왜? 동네방네 울 아빠 이름 팔자. 그래야 이 이상한 데서 지내기 편하지.”

“부탁이야, 리리스.”

“뭐, 뭐?”

“부탁이라고. 들어주면 안 될까.”

체시어가 왜 그 사실을 숨기려 하는지는 안다.

괜히 아빠를 입방아에 오르게 하기 싫은 거겠지.

처음에는 전혀 들어줄 생각이 없었지만, 그 체시어가 ‘부탁’이라고까지 하니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에휴.’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둘러댔다.

“응, 친해. 같이 입소했으니까.”

“그치만 평민….”

앨리샤가 고개를 갸웃하자, 다이앤이 발그레해진 얼굴로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잘생기긴 했잖아. 나두 걔랑 말해보고 싶어.”

“맞아, 맞아. 소올직히 말해서 난 제라드보다 그 애가 쪼끔 더 멋있는 거 같아. 키도 우리보다 훠얼씬 크구.”

미셸이 다이앤의 말에 동의했다.

체시어의 미모에 홀라당 빠진 아이들을 보며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이거. 벌써부터 아가씨들 관심을 한 몸에 받다니.

나중에 체시어 로맨스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어머, 리리스! 저기 봐! 너 기다리는 거 아냐? 응?”

갑자기 앨리샤가 방방 뛰었다.

뭔가 보니, 제라드가 산책로에 있는 나무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 웃으면서 다가왔다.

“안녕.”

“으응, 안녕.”

“받아.”

제라드가 내민 건 포도 맛 주스였다.

“네가 준 거, 잘 마실게.”

그는 내가 줬던 사과 맛 주스를 흔들어 보이며 사르르 웃었다.

“우, 우아.”

“흐이이.”

제라드의 청량한 웃음에 반했는지, 내 등 뒤에 숨은 룸메이트들이 기괴한 소리를 냈다.

나는 잘생긴 제라드의 얼굴을 빤히 뜯어보았다.

‘흠, 지금은 딱히 크게 인성 터진 건 모르겠는걸. 제발 아직은 갱생의 여지가 남아있으면 좋겠는데….’

나는 포도 맛 주스를 받아들고 빨대를 꽂았다.

그리고 방긋 웃으며 제라드에게 내밀었다.

“우리, 짠 하까!?”

“아하하. 그럴까?”

눈을 반달로 접으며 또 사르르 웃은 제라드가 짠, 하고 주스 팩을 맞댔다.

음, 좋아.

이대로만 가 보자고.

* * *

오전 9시.

나는 교육실에 왔다.

특별 입소자들은 기초 교육을 먼저 수료해야 다른 아이들과 함께 수업받을 수 있다고.

“체시어!”

냉큼 체시어의 옆자리를 차지한 나는 공책과 곰돌이 필통을 꺼내며 물었다.

“브루스 걔가 오늘은 너 안 괴롭혔어?”

“응.”

“롬은? 롬도 안 괴롭혔지?”

“응.”

“어제 잠자리는 어땠어? 생각보다 침대 폭신폭신하드라? 나 오늘 늦잠 잤잖아.”

“괜찮았어.”

“오늘은 간식 모 나올까? 솔직히 간식 차별은 좀 어이없어. 이따 간식 시간에 만날래? 내꺼 같이 먹자.”

“됐어.”

나는 입술을 쭈욱 내밀었다.

어째 체시어의 반응이 이상했다.

“너 모 기분 나쁜 일 있어?”

“아니.”

“있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말이 너무 짧잖아. 나랑 말하기 싫어 보여.”

“원래 짧았어.”

“아냐, 뭔가 달라. 뭔가… 아주 미묘하게 달라.”

“…….”

체시어는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앞만 봤다.

나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솔직히 말해. 너 누가 괴롭혔지?”

“아니.”

“그럼 뭔데!”

“너….”

체시어가 운을 띄웠다.

역시 뭔가 있군.

“응응.”

“…아니다.”

“아흑! 답답해!”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빨리 말해, 빨리!”

체시어의 어깨를 잡고 탈탈 흔들었다. 그러자 슬쩍 고개를 반대로 돌린 그가 조용히 물었다.

“…왜, 준 거야?”

“응?”

갑자기 뭔 소리람.

고개를 갸웃하는데 체시어가 나를 돌아보며 다시 말했다.

“아침에. 우리 방 금색 명찰, 걔한테.”

“어?”

“…그거, 주스. 왜 준 거냐고.”

잠시 사고회로가 정지했다.

체시어 방 금색 명찰이라 함은 제라드 슈미트였다.

“그거!”

주인공의 앞길에 훼방 놓을 싹수 노란 캐릭터 갱생시키기 작전의 일환이지!

어차피 제라드와 친해져야 하는 건 체시어였기 때문에, 나는 마침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그 애, 슈미트 공작 가문 아들이거든. 친해져 놓으면 나쁘지 않을 것 같더라구?”

“아, 그래.”

“혹시 걔가 네 방에서 막 애들 괴롭히구 그래?”

“아니. 그렇진 않아.”

“와! 그럼 다행이다. 나중에 너랑 자주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거든? 너도 넘 무뚝뚝하게 굴지 말고, 걔가 말 걸고 그러면 받아주고…. 암튼 친하게 지내바! 알았지?”

체시어가 아주 한참,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말했다.

“내가 누구랑 친하게 지내야 하는지도 너한테 일일이 허락받아야 해?”

“응?”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데 네가 원하면 그렇게 해야 하냐고.”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걔랑 친해지고 싶은 건 너지, 나는 아니니까.”

“엥? 아니, 잠깐. 난 걔랑 친해지고 싶다기보다는….”

그때, 교육실 문이 열리고 하얀 가운의 연구원 두 명이 들어왔다.

나는 그래서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체시어의 눈치만 봤다.

‘얘 왜 이렇게 냉기 폴폴 날리지? 제라드 슈미트가 사실 시비 왕창 건 거 아냐?’

그랬다면, 친해지라고 하니 짜증 날 수도 있겠지.

체시어는 혹시나 괴롭힘을 당한대도 사실대로 말할 성격도 아니었다.

‘아이 씨. 이거 쉽지 않네?’

딱딱하게 굳은 체시어의 표정을 보며 막막해하는데.

“공녀님!”

상냥해 보이는 여자 연구원이 내게 다가왔다.

“공녀님은 이쪽으로 와 주시겠어요?”

그녀는 외따로 있는 책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뭔가 싶었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터덜터덜 자리를 옮겼다.

“저는 벨라 르모프라고 합니다. 공녀님의 기초 교육을 담당하게 됐어요. 양성소 수료 과정부터 가볍게 설명해 드릴게요.”

“먼저 양성소 수료 과정에 대해 설명하겠다.”

그때.

동시에 들리는 같은 내용, 전혀 다른 말투의 남자 연구원 목소리.

나는 놀라서 체시어가 있는 평민 아이들 쪽을 돌아보았다.

‘헐. 왜 선생이 두 명이나 들어왔나 했더니.’

태도부터 확연히 차이 나는 둘.

“자, 시작할게요. 궁금한 게 있으시면 바로바로 알려주세요.”

“질문은 받지 않겠다. 설명을 놓치지 않도록 집중해서 따라와라.”

극명한 차별 대우였다.

* * *

“초자연적인 힘의 관념을 우리는 ‘마나’라고 칭한다. 체내에 마나를 지닌 이들을 ‘능력자’라 한다.”

체시어는 선생의 설명을 흘려들었다.

“능력자마다 지니고 있는 마나의 총량이 다르고, 그 양에 따라 ‘계급’이 정해진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이니까.

“부모의 계급이 높을수록 일반적으로 자식의 계급도 높다. 다만 비능력자의 피가 섞이면 마나량이 급감하지. 너희 같은 비능력자 혼혈은 6급 디에즈가 99%다.”

체시어는 제 하얀색 명찰을 힐긋 내려다보았다.

“아주 드문 1%의 경우 다른 계급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래 봐야 5급 누베노다. 혼혈이 그 외의 계급을 받은 전례는 없었다.”

계급으로 부와 권력, 위치가 정해지는 나라.

자신은 리리스와 같은 나라에서 전혀 다른 세상을 살게 될 것이다.

리리스는 1급 도스를 가장 많이 배출한 루빈슈타인의 직계 핏줄이니까.

“그 애, 슈미트 공작 가문 아들이거든. 친해져 놓으면 나쁘지 않을 것 같더라구?”

그러니까 리리스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자랄수록 리리스의 주변에는 비슷한 급의 귀족들이 점점 늘어날 거고, 자연스럽게 그들과 어울리게 되겠지.

‘기분이 왜 이렇지.’

체시어는 왠지 모르게 불쾌해지는 감정을 꽉 내리눌렀다.

“운 좋게 능력자 배지를 달 수 있게 되었지만, 너희는 항상 너희의 위치를 깨닫고 있어야 한다.”

선생은 제 앞의 평민 아이들을 깔아보며 덧붙였다.

“너희는 고위급 귀족의 희생으로 살아가는 하층민이다. 그러니 항상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는 법을 배워라.”

기분이 저 밑바닥까지 처박혔다.

언젠가는 리리스와 멀어지게 될 것을 알았으면서도….

그 사실을 피부로 직접 느끼고 나니, 기분은 생각보다 훨씬 비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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