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양성소 수료 과정은 간단했다.
1. 이론 교육과 실기 교육
2. 월말평가
3. 계급 확인 및 능력자 배지 받기
기본적인 마법들을 숙지한 뒤 그것으로 시험을 봐 졸업 점수를 다 채우면 능력자 배지를 받을 수 있다.
시험, 그러니까 월말평가는 점수 누적제.
매달 시험을 봐서 차곡차곡 1000점을 모으면 졸업 자격이 주어졌다.
‘한 번에 천 점을 다 모을 수도 있으니까… 열심히 해서 집에 빨리 가자!’
나는 한 달 만에 졸업하고 여길 나갈 것이다!
“이번에는 공녀님이 지니신 힘의 속성을 파악해 볼게요. 능력자들은 성력과 마력을 함께 지니고 있다는 거 아시죠?”
“네!”
나는 학구열에 불타 씩씩하게 대답했다.
“기초 마법인 플레임(flame)을 시전하면 힘의 속성을 확인할 수가 있어요.”
선생님 벨라가 손끝에서 하얀색의 작은 불꽃을 피워 보였다.
“하얀색이죠? 저는 마력보다 성력 수치가 높은 성력계 능력자라 그래요.”
“우와아. 네.”
“코어가 개방되셨으니 공녀님도 하실 수 있어요. 자, 이 플레임을 시전하려면.”
벨라가 맞춤형 구몽 선생님처럼 책을 파라락 펼쳤다.
양성소 교재에는 마법식이 수백 가지는 담겨 있었다.
‘윽, 복잡해라.’
나는 넘어가는 책장을 보며 질겁했다.
마법식은 직선을 쭉 그은 간단한 모양부터 복잡한 그래프 모양까지 생김새가 다양했다.
능력자들이 마법을 부리려면 이걸 다 외워야 했다….
“이거 보이시죠?”
벨라는 맨 첫 페이지에 점 한 개가 콕 찍힌 마법식을 가리켰다.
“플레임 마법식이에요. 이걸 머릿속에 그린 다음, 마나를 운용해야 해요.”
벨라가 눈썹을 내리고 안타깝게 웃었다.
“플레임 식은 쉽지만, 식만 외워서는 시전할 수 없어요. 마나를 운용할 줄 아셔야 하는데, 이건 제가 도와드릴 수가 없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표정을 오해했는지 벨라가 허둥거렸다.
“솔직히 식을 외우는 건 시간만 있으면 어렵지 않아요. 능력자들 대부분이 마나 운용 단계에서 막히죠. 그러니까 오늘 한 번에 성공하지 못하셔도 괜찮아요.”
마나 운용이라….
‘전 그런 거 안 해도 되는걸요.’
나는 마나를 운용할 필요도, 마법식을 외울 필요도 없는 사람이다.
마나 대신 생명력을 쓰고, 마법식 따위 머릿속에 안 그려도 그냥 ‘생각하는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뭐, 그런 몸이니까.’
되겠지? 나는 정신을 집중하는 척하면서 머릿속으로 가볍게 생각했다.
‘나도 플레임 어쩌고를 써 봐야겠….’
생각을 다 마치기도 전.
손끝에 하얀 불꽃이 피어났다.
‘헐.’
벨라가 입을 막고 놀랐다.
“어머, 세상에! 대단하세요! 한 번에 성공하시다니요? 역시 루빈슈타인이세요!”
“서, 성공이에요?”
“네, 공녀님. 공녀님은 성력 계열 능력자세요.”
벨라는 가지고 온 차트를 파라락 넘겼다.
힐긋 보니 내 정보였다. 벨라는 속성 옆의 공란을 채웠다.
리리스 루빈슈타인
예상 계급: 1급
속성: 성력계
나는 손끝에 핀 불꽃을 다시 쳐다봤다.
‘와, 대단하다. 뭐든지 생각하는 대로 순식간에 이뤄지는 능력이라니, 역시….’
프리메라인 황제는 이런 초현실적인 힘을 쓸 때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는다.
생명력을 소모한다는 제약이 있긴 하지만, 그냥 머릿속에 떠올리는 대로 모든 걸 할 수 있다.
마법식으로 규정할 수 없는 마법 외의 능력을 쓰는 것도 가능하단 뜻.
이를테면.
‘사람들을 꼭두각시처럼 세뇌해서 부릴 수도 있지.’
그런 정신 계열의 능력 또한 말이다.
“어머나. 저쪽에도 벌써 한 명이 성공했네요?”
벨라의 말에 돌아보았다.
다들 애를 먹는 가운데, 체시어만 새카만 불꽃을 피우고 있었다.
‘뭐, 주인공한테 이런 거야 식은 죽 먹기지.’
프리메라의 지배를 받지 않는, 마력 100%의 능력자.
체시어는 황제가 코어를 열어주기 전에도 능력을 쓸 수 있었을 거다.
물론, 우리 아빠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체시어도 자기 힘을 몰랐겠지만.
“히히.”
마침 체시어와 눈이 마주친 나는 웃으며 그를 향해 엄지를 척 세워 줬다.
* * *
10분의 휴식시간.
체시어는 교육실 건물에 있는 화장실에서 제라드를 만났다.
‘이 자식 뭐지.’
소변기 앞에 서 있던 체시어는 당황했다.
일곱 개의 소변기가 전부 비어 있는데 굳이 제 옆자리에 서서 볼일을 보는 제라드의 저의를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여긴 왜 온 건지.’
양성소의 모든 건물에는 귀족 전용 화장실과 평민 전용 화장실이 따로 있었다.
대체 왜 화려하고 깔끔한 귀족 화장실을 두고 이 누추한 곳을 찾았을까.
“수업 잘 받고 있어?”
제라드가 무해한 웃음과 함께 말을 걸었다.
체시어는 슬쩍 미간을 좁혔다.
“…어.”
“너 말고, 리리스.”
“…….”
“어때? 어려워하진 않아?”
둘이 드디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시비 걸러 왔군.’
체시어는 제라드의 속내를 금세 깨닫고 대답했다.
“어. 잘해.”
“너 평민이랬나? 부모 중에 어느 쪽이 능력자였는지는 알아?”
“몰라.”
“흐음. 그래?”
둘의 고개는 다시 정면을 향했다.
“꽤 힘들게 살았겠네. 난 평민들이랑은 말 안 섞어봤지만, 가끔 보면 참… 마음이 불편하더라고.”
“…….”
“되게 악착같다고 해야 할까? 시궁창 인생이긴 한데, 또 삶의 의지는 참 강한 게 말이야. 뭐, 그래도 가끔 그게 멋져 보일 때가 있어.”
아하하, 웃은 제라드가 체시어 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덧붙였다.
“끈질긴 거, 말이야? 너도 잘할 것 같아.”
제라드가 다시 고개를 바로 했다.
“나 리리스랑 친구 하기로 했는데.”
“그래.”
“질투 안 나?”
“뭐?”
먼저 앞섶을 추스른 제라드가 또 하하, 웃었다.
딱히 피해 준 게 없는데도 체시어는 왜인지 처음부터 제라드의 웃는 얼굴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냥 흘려듣고 말면 될 것을, 굳이 받아친 이유도 그래서였다.
“친구 사귀는 건 걔 마음인데 내가 왜 질투를 해야 하지.”
“어어, 정말? 그렇다기에는 너 지금 표정 굉장한데. 알아?”
“뭐?”
“아침에 식당에서부터 잔뜩 화난 얼굴이잖아. 지금도 봐, 눈이.”
제라드가 손으로 제 눈꼬리를 쓱 올렸다.
“…이런데?”
“…….”
“아하하, 진짜 웃기다니까.”
제라드가 체시어의 어깨 위에 턱, 손을 올리고 귓가에 말했다.
“혹시,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았어?”
“…….”
“걔가 잘해 주니까, 막 하나뿐인 친구라도 되는 것 같았지? 귀족들 노리개 하는 평민들이 많이들 그런 착각, 하더라.”
픽 웃은 제라드가 세면대로 가 수전을 열며 계속 말했다.
“리리스는, 음, 모든 여자애들이 다 그렇겠지만…. 예쁜 걸 좋아하는 것 같더라. 그래서야. 너랑 말 섞는 이유.”
무시하자. 체시어는 옷을 추스르며 생각했다.
브루스 녀석도 틈만 나면 하는 얘기 아닌가.
반반한 얼굴 때문에 리리스가 관심 갖는 거라고.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뭐, 그래. 그렇겠지….’
맨 처음, 제도 골목길에서 딱 한 번 마주쳤다.
대화도 안 해봤고, 먼저 내민 리리스의 손을 쳐내며 밉게 굴기도 했다.
그런데도 리리스는 자신을 찾아냈고, 구해줬고, 얼굴 딱 두 번 본 사이에 ‘네가 좋다’고까지 말했다.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텐데 그렇게 필사적이었던 이유를 설명하려면 답이야 하나뿐 아니겠는가.
“근데 너 정말 잘생겼다아….”
“안뇽! 히야, 오늘도 얼굴에서 빛이 나네. 눈부셔라.”
“왜? 계속 쳐다보니까 부담스러? 그치만 멋진 데 눈이 가는 건 인간의 본능이라구….”
와중에 새삼스레 떠오르기까지 했다. 거의 매일 달고 사는 리리스의 입버릇이.
“괜히 나중에 상처받지 말고, 먼저 거리를 두는 게 좋아.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충고랍시고 던지며, 제라드는 환하게 웃었다.
겉으로는 천사처럼 보였다.
드물게 잘생긴 얼굴이니, 아마 리리스도 저 웃는 얼굴을 마음에 들어 했겠지.
“그럼, 먼저 갈게.”
제라드가 체시어를 지나쳐갔다.
“싫은데.”
“…응?”
체시어가 툭, 한마디 던지자 제라드가 돌아봤다.
“네가 뭔데 거리를 두라 마라 참견질이야.”
체시어의 마음속은 항상 잔잔한 바다처럼 평화로웠다.
누가 무시하거나 심한 말을 해도 크게 거슬린 적 없었다.
왜냐면 너무 익숙하니까.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내가 너보다 먼저였는데.”
“뭐라고?”
체시어는 뇌의 통제를 벗어난 입이 혼자 움직이는 사실에 무척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놀란 마음과 별개로, 입은 계속 움직였다.
“내가 너보다 먼저 친구 했다고.”
체시어는 제라드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
“난, 걔가 날 싫다고 할 때까지 악착같이 옆에 있을 거야.”
제라드의 웃음이 걷혔다. 체시어는 비웃듯 그에게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네 말대로 나, 시궁창에서 살다 보니 끈질긴 것만 배웠거든.”
“…….”
“한번 손에 잡으면.”
체시어가 제 손가락을 차례대로 접어 꽉 주먹 쥐어 보였다.
“죽을 때까지 안 놓칠 자신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