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7/261)

“저저저저, 단장님!”

필립이 에녹의 뒤에 급하게 따라붙었다.

“뭐.”

“지금 출정 이후로 1분도 안 쉬고 계십니다. 다음 지역으로 이동하기 전에 눈이라도 붙이시는 게 어떻습니까?”

“너.”

멈춰 선 에녹이 필립을 내려다보았다.

“피곤하냐?”

“예?”

“집에 가, 그럼.”

에녹이 필립의 손에 들린 지도를 휙 빼앗았다.

“아니요! 아닙니다!”

필립이 허둥지둥 다시 에녹의 손에서 지도를 받아갔다.

“제가 뭐가 피곤하겠습니까. 아직 검도 안 뽑아봤는데요. 토벌대가 아니라 단장님 수행 비서로 온 줄….”

“그럼 계속 가. 시간 없어. 한 달 안에 끝내야 해.”

“아, 그렇죠.”

에녹이 한 달을 말하는 이유는, 딸의 양성소 퇴소에 맞춰 토벌도 마칠 계획이어서였다.

“그런데 저 양성소 때 생각해 보면 말입니다. 저도 꽤 빨리 퇴소한 편이었는데 반년은 걸렸거든요?”

“너랑 같냐. 우리 딸 천재야. 진짜 한 달 만에 나와.”

“그렇죠, 그렇죠. 그렇긴 하죠. 리리스 천재죠. 마탑주가 눈독 들이고 있다는 소문이 제도에 파다하던걸요.”

필립이 충신처럼 힘차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나저나 계급 뜨면 난리 나겠네요. 몇 년 동안 도스가 안 나와서 분위기 완전 흉흉했는데 리리스가 딱…!”

신이 나서 말하던 필립의 입이 서서히 다물어졌다.

에녹의 표정이 갑자기 먹구름 가득 낀 듯 어두워져 있었다.

‘저 눈치 없는 놈.’

묵묵히 옆에서 걷고 있던 악시온이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안 그래도 딸에게 어마어마한 계급을 물려준 장본인인지라, 내내 속앓이 중인 에녹이거늘.

리리스는 검증할 필요도 없는 1급, 도스였다.

양성소를 졸업하면 바로 제국군 소속, 소년병으로 차출될 운명.

에녹은 딸의 병역을 면제받기 위해 그렇게 치를 떨던 침략 전쟁까지 각오한 상태였다.

“후우.”

멈춰 선 에녹이 고개를 젖히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밥은 먹었나….”

“아뇨, 아직 안 먹었습니다!”

“너 말고.”

“아?”

필립이 멋쩍게 웃었다.

“리리스요?”

“요새 양성소 식사 좀 괜찮게 나오나? 나 때는 더럽게 맛없었는데.”

한숨을 쉰 에녹이 다시 걸었다.

그러다 또 멈춰 서서 이마에 손을 짚고 인상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우리 딸 얼굴 까먹겠네….”

“야.”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난리를 피우는 에녹을 보다 못한 악시온이 이를 갈았다.

“입소한 지 하루 지났다. 하루.”

“뭐? 그것밖에 안 지났다고?”

“미친놈인가, 진짜?”

징그러울 정도다.

“너 이거 병이다. 분리불안증.”

“맞아.”

에녹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공주도 그렇겠지. 아빠 보고 싶다고 울면 어떡하지.”

“전혀 안 그럴 것 같군. 너 같은 아버지랑 떨어지게 됐으니 생애 처음으로 자유를 만끽하는 중일 거다.”

“네가 뭘 알아.”

에녹이 발끈했다.

둘의 모습을 킬킬거리며 지켜보고 있던 필립이 말했다.

“단장님, 딸 사랑이 이 정도신데 나중에 시집은 어떻게 보내시려고요?”

“뭐라고?”

에녹이 매섭게 휙 돌아보자 필립이 흠칫했다.

“제, 제가 뭔가 말실수를 했나요?”

“…….”

이윽고 에녹이 심각한 얼굴로 턱을 쓰다듬었다.

일곱 살 딸을 시집보낼 미래는 아직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걱정이군. 울 딸 나랑 조금도 떨어져 있기 싫어하는데, 결혼은 할 수 있을지….”

중얼거리던 에녹이 고개를 한번 가볍게 끄덕이며 결론 냈다.

“어쩔 수 없지. 결혼 안 한다고 하면 내가 평생 데리고 살아야지, 뭐.”

딸의 의사는 조금도 반영되지 않은 그저 아빠의 바람….

악시온과 필립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 * *

이튿날 아침.

내게는 산더미 같은 간식거리와 함께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보낸 사람은 쌍둥이 오빠들.

왜인지 편지를 열어보기도 전에 울컥한 나는, 새삼 군대 갔던 전생 대학 동기들을 떠올렸다.

‘어흑흑, 얘들아. 훈련소 들어가서 그렇게 편지, 편지 노래를 불러 대던 너희들 마음. 나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양성소에 갇힌 지 사흘밖에 안 됐는데, 편지며 선물이 너무나도 반가워서 눈물 날 것 같았다.

[사랑하는 내 동생 리리스!

나 테오야. 옆에 레온도 있어.

내가 글씨를 더 잘 쓰니까 펜을 잡았어.

우리는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야.

너 없으니까 집 분위기가 아주 우중충해. 사람들도 전부 말수가 없어졌어.

양성소는 어때?

친구들 많이 사귀었어?

레온이 꼭 전해 달라는데, 혹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누가 괴롭히면 이름 써 놓으래.

내가 다 찢어 버림

위에는 레온이 썼어. 무시해.

식사는 꼬박꼬박 하고 있지?

양성소 식사가 되게 맛이 없었던 기억이 나서 걱정이다.

네가 좋아하는 간식 보낼게. 친구들이랑 나눠 먹어.

체시어한테는 따로 보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맛없어도 식사 거르지 말고, 씩씩하게 교육 잘 받고 돌아와.

기다리고 있을게. 사랑해!

추신: 아! 아버지가 제도에 돌아오셨어. 널 못 봐서 너무 아쉬워하시더라.

그래서 퇴소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고 널 보러 가시겠대!]

“우와, 너무 부럽다, 리리스.”

“이거 정말 앙트라세 공자님들이 보낸 거야?”

“너 완전 사랑받는구나아.”

룸메이트들이 예쁘게 포장된 간식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다 같이 먹자!”

“정말?”

“응! 많잖아.”

나는 신나서 간식 포장을 푸는 친구들을 흐뭇하게 보다가 편지의 추신 부분을 다시 읽었다.

‘앙트라세 공작! 고모부가 돌아왔다니!’

테오의 병을 낫게 하려고 가문 일도 내팽개치고 밖으로 나다녔다던 고모부의 귀환 소식.

고모부는 원작에서 테오가 죽고 나서야 등장했는데, 존재감이 상당했다.

뭐, 혁명군의 간부였으니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런데 어떻게 날 보러 온다는 거지?’

양성소는 면회 불가였다.

1년 안에 졸업 못 하면 유급이고, 양성소에 들어온 지 1년이 지난 유급생들에게나 외박 기회가 주어졌다.

‘뭐, 고민해 봤자 잘 모르겠고.’

나는 편지를 곱게 접어 챙긴 다음, 간식 꾸러미에서 초콜릿 한 개를 꺼냈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붉은색 뒤통수만 내보인 채 침대에 누워있는 젬에게 다가갔다.

“젬, 너 자? 오전 수업 없어?”

젬은 맨날 혼자 다녔다. 식당에 같이 가자고 해도 무시하고.

방에 오면 곧바로 이렇게 벽을 보고 눕는 통에 말도 걸기 힘들었다.

“리리스, 너 걔한테 진짜 꾸준히 말 건다. 대답도 안 하는데.”

“리리스는 천사인가 봐. 걔 그냥 내버려 둬. 괘씸하다구.”

앨리샤와 미셸이 꿍얼거렸다.

나는 뒤돌아 입 모양으로 그러지 말라고 말린 뒤, 젬의 머리맡에 초콜릿을 놓아두었다.

“간식 같이 먹자. 초콜릿 맛있어. 난 수업 가야 해서… 여기 두고 갈게?”

* * *

수업 시작을 10분 앞둔 어수선한 교육실.

나는 체시어의 책상 위에 앉아 짧은 다리를 구르며 고민에 잠겨 있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던데 대체 어디 숨어 있지?’

나는 사실, 입소하자마자 눈에 불을 켜고 원작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을 찾고 있었다.

엄청난 전력의 평민 용병!

이름은 ‘제미언 트라하’!

그는 체시어와 양성소에서 만나야만 하는 이벤트가 있었다.

“체시어, 너 혹시 다른 방 쓰는 친구 중에 친해진 남자애 없어?”

“친구 없어.”

“…자랑이네.”

“그런 건 왜 묻는데.”

“궁금한 애가 있어서. 이름은 제미언 트라하야. 너랑 같은 체술부에 하얀 명찰이고 머리는 빨간색. 아마 유급 중이라 너랑 동갑일걸? 덩치가 꽤 클 거고….”

“그리고 잘생겼어?”

“엥?”

갑자기?

“아닌가?”

“나 그 애 얼굴은 모르는데?”

“그럼 얼굴도 모르는 애를 왜 찾아.”

“아니, 잠깐. 너 말이 쫌 이상하다? 내가 모, 걔 잘생겨서 한번 찾아보려는 것처럼 말해, 왜?”

“…네가 잘생긴 걸 좋아하니까.”

“……?”

“제라드 슈미트도 그래서 친해지려고 했던 거 아냐?”

나는 황당해져서 입을 떡 벌렸다.

물론 예쁘고 잘생긴 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제라드 슈미트는 잘생겨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친해지려 했던 건데!

“완전 오해거든?”

“그래.”

“오해라구!”

“알겠어.”

“뭘 알아! 거짓말하지 마! 너 지금 흐린 눈이야! 눈에 안 믿는다고 다 쓰여 있다구!”

뜬금없이 얼빠 취급을 당해 버린 나는 억울했다.

“괜찮아. 이해해.”

“아니, 이봐요, 아저씨. 멀 이해하냐구요. 아니라니까.”

“그럼.”

체시어가 나를 빤히 보았다.

“…나 딱 두 번 보고 좋아한다고 했던 이유는 뭔데.”

어어, 그랬지.

내가 그랬다.

한 번 마주친 체시어를 후작가까지 가서 찾아내고 두 번 만남에 ‘네가 좋아’ 했었지.

‘아니, 그런데 주인공을 안 좋아할 수가 없잖아! 원작 8권 읽는 내내 너를 샅샅이 지켜봤는데!’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모를 체시어는 당연히 오해할 만했다.

우리 집에 오게 되고, 나랑 친구 하게 되고….

지금까지 쌓아온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전부, ‘내가 못생겼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안 돼!’

오해를 정정해야 했다.

다급해진 나는 체시어의 책상에서 폴짝 내려와 그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책상에 탕―! 소리 나게 두 손바닥을 붙였다.

“뭐야.”

“잘 들어!”

진심이 잘 전달되길 바라면서 나는 체시어와 눈을 맞췄다.

“난, 네 얼굴이 좋은 게 아니야. 너라는 사람, 그 자체를 좋아해. 만약 네 얼굴이 먹다 버린 곰보빵처럼 변해버린다고 해도!”

“…….”

“나는 계속 널 좋아할 거야!”

체시어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와, 와아아아.”

“우아아.”

짝짝짝―.

교육실을 가득 메운 박수 소리에 나는 흠칫하고 돌아보았다.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