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전부 우리를 보며 손뼉 치고 있었다….
아니, 다들 서로 떠드느라 바쁘더니 언제 우릴 이렇게 주목하고 있었담.
“흠흠.”
나는 민망해져서 뺨을 긁적이며 슬그머니 내 의자에 앉았다.
체시어도 민망한지 손으로 이마를 괸 채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내 진심이 잘 전달되었어…?”
“그래, 알았어.”
“그렇다면 다행이야.”
“하아.”
한숨을 쉰 체시어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까 걔, 이름이 뭐라고?”
“응? 아아, 제미언 트라하!”
“그래. 이따 실기 교육 때 한번 찾아볼게.”
“우헤헤. 진짜?”
금세 좋아 죽는 내 표정에 체시어가 못마땅하단 듯 쳐다봤다.
“오해하지 마라? 난 그냥, 걔가 이론 교육에 쪼끔 어려움을 겪고 있단 소문을 들어서, 똑똑한 네가 도와주면 어떨까? 생각했을 뿐이라구.”
“이론? 마법식을 못 외우는 거야?”
“응. 걔 수학 완전 못할걸.”
평민인 제미언 트라하는, 체시어가 양성소에서부터 만난 친구였다.
원작에서 체시어는 13살에 양성소에 입소.
제미언은….
‘13살이 될 때까지 유급했었지. 그러다 체시어 만나서 과외받고 겨우 졸업했고.’
지루한 양성소 교육 과정은 소설 연출을 위해서인지 뭔지 통째로 스킵해 버렸다.
그래서 내가 아는 거라곤….
지금 제미언이 체시어와 같은 11살의 나이로 양성소에 있다는 것.
붉은 머리에 잿빛 눈을 가졌다는 것.
이론 시험은 번번이 낙제하지만, 체술 실기에서는 두각을 나타낸다는 것 정도?
‘제미언 트라하는 완전 괴물이라구. 꼭 찾아서 양성소 무사히 졸업시켜 줘야 해.’
주먹 하나만으로 엄청난 전공을 세우는 그는, 하위 계급의 저력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존재가 될 예정이니까 말이다!
* * *
공격반 이론 교육을 마치고 혼자 방으로 돌아가던 길.
‘저게 뭐야…?’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건방진 평민 새끼가!”
“미쳤어? 죽고 싶냐고!”
“더 때려, 더!”
귀족 남자아이 다섯 명이 누군가를 엎어뜨리고 흠씬 두들겨 패고 있었다.
몸을 웅크리고 쏟아지는 발길질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는 건 익숙한 얼굴이었다.
“제, 젬?”
…우리 방 하얀 명찰.
젬이었다.
“야아아!”
내가 소리치며 한달음에 달려가자 아이들이 발길질을 멈췄다.
“너네 미쳤어?!”
대단하신 얼굴들 틈에는 또.
“와, 또 너야?”
양성소 대표 양아치, 브루스 녀석이 있었다.
“괜찮아, 젬? 일어날 수 있어?”
나는 당황하는 브루스들을 제쳐놓고 젬을 일으켜 앉혔다.
다행히도 내가 빨리 발견했는지 아직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이이이!”
나는 휙 몸을 틀었다.
흠칫 놀란 아이들이 일제히 목을 집어넣었다.
“젬 왜 때렸어!”
“마, 맞을 만해서 맞은 거야!”
“그니까 그 맞을 만한 이유가 모냐고오.”
나는 브루스에게 내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험악하게 중얼거렸다.
“저 평민이 내 뺨을 쳤다고!”
“뭐?”
과연. 브루스의 왼쪽 뺨이 땡땡 부어있었다. 입술이 터져 피까지 비쳤다.
젬은 여자애이긴 해도 유급생이라 나이가 11살이고 키도 덩치도 또래보다 컸다.
더군다나 체술부, 그것도 주먹 쓰는 권술 전공이어서….
‘음, 좀 아팠겠는걸?’
나는 젬을 돌아보았다.
“젬, 브루스 왜 때렸어?”
“네가 먼저 때렸잖아, 새끼야.”
젬은 브루스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나는 다시 브루스를 돌아봤다.
“아이 씨! 네가 먼저 어깨 치고 지나갔잖아! 쳤으면 죄송합니다, 하고 머리나 조아릴 것이지 대뜸 눈 부라리고! 건방지게!”
“내가 왜 그래야 해? 일부러 잘 가던 사람 가까이 와서 어깨 치고 시비 건 쪽은 너 아니냐? 빌어먹을, 내가 너희 장난감이야?”
“뭐? 하등한 평민 주제에 정신이 나갔나? 진짜 죽고 싶냐?”
“그만, 그만.”
나는 둘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상황이 뻔히 보였다.
“브루스 너, 하얀 명찰 보니까 그냥 시비 걸고 싶어서 어깨 치고 지나갔지?”
“…….”
“대답.”
“그, 그게 뭐 문제야? 평민한테 시비를 걸든 말든!”
“응, 누가 문제라구 했어? 문제 아냐. 여기선 명찰 색이 곧 법이니까.”
“그렇지! 너도 이제 적응했구나?”
“그래서 젬이 사과 안 하니까 괘씸해서 먼저 때려줬어?”
“어! 내가 얼마나 멋졌는지 너도 봐야 했는데. 뺨 한 대 시원하게 갈겨 줬지!”
“그럼 젬은 정당방위였구나.”
평민에게 뺨을 얻어맞은 브루스는 황당했을 테다.
옆에 있던 브루스의 친구들은 건수 잡았다는 생각에 무자비하게 젬을 때리기 시작한 거고.
“너희, 일렬로 서.”
“으응?”
“서라고, 이씨. 확!”
내가 쬐만한 손을 휙 들며 겁주자 브루스가 흠칫 놀랐다.
“안 서?”
한 번 더 경고하자 다섯 명의 아이들이 주르륵 일렬로 섰다.
나는 뒷짐을 지고 그들의 앞에서 수련회 교관처럼 왔다 갔다 했다.
“잘 들어라. 이 시간 이후로 흰색 명찰에게 이유 없이 시비 걸지 않는다.”
“뭐?”
“내가 언제 너한테 말하라구 했냐?”
“아, 아니.”
브루스가 목을 집어넣었다.
“또, 함부로 폭력을 쓰지 않는다.”
“…….”
“다들 이번엔 대답.”
“아, 알았어.”
“넵!”
“으응!”
나는 폭력을 좋아하지 않는다.
계급으로 사람을 찍어 누르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슬프게도 권력으로 찍어 눌러주고 폭력을 행사해야만 할 때가 있다.
바로 이렇게… 말로는 절대 갱생 안 될 놈들에게는.
퍽―!
“악!”
나는 맨 왼쪽에 서 있던 브루스의 정강이를 깠다.
“아퍼?”
“아, 왜…. 왜 때리, 때리는데.”
“너는 왜 젬한테 시비 걸고 뺨 때리고 모여서 때렸는데?”
“…….”
“이유 없잖아? 명찰 색깔이 너보다 못하니까― 그거 빼고.”
“…….”
“나도야. 그니깐 억울한 표정 짓지 말자?”
나는 다음 놈들도 차례차례 정강이를 까 주었다.
퍽, 퍽, 퍽, 퍽―!
“으윽.”
“아우….”
“아야야.”
“윽.”
그리고―
“잘 들어라.”
위엄 있어 보이도록, 허리에 두 손을 착 얹고 배를 쭉 내민 다음 말했다.
“여러 명이 한 명에게 폭력을 쓰는 것은 매우 비겁한 일이다. 또, 남들의 귀감이 되어야 할 귀족으로서도 부끄러운 짓이다.”
“어어, 그건 맞지…?”
“으응.”
“근데 귀감이 뭐야?”
“나도 몰라. 조용해.”
“너희들은 오늘 나한테 한 대씩 맞았지만, 비겁하게 한 명한테 폭력을 쓴 벌로는 아주 가볍다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은 저마다 내 눈치를 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정강이로 끝내지 않겠다.”
다들 답이 없었다.
“알아들었나!”
“예, 옙!”
“알겠습니다!”
“아니, 뭔 존대…, 예옙!”
나는 만족하고 젬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나는 젬의 손을 잡았다.
“일루 와. 같이 치료실에 가자.”
* * *
나는 치료실에서 구급 키트를 받아 젬과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자세히 보니 팔이며 다리며 제법 생채기가 많았다.
“어휴, 세상이 말세다, 말세야….”
침대에 앉은 젬의 앞에 쪼그려 앉아 다리에 약을 발라 주던 나는, 시선이 느껴져 눈을 들었다.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젬이 휙 고개를 틀었다.
“내, 내가 할게.”
“아냐. 내가 해 주께.”
나는 마저 젬의 상처를 살폈다.
“…고마워.”
“엥. 고맙단 말도 할 줄 아네?”
“나, 나도 할 땐 해! 귀족들이랑 말 섞기 싫어서 그렇지.”
“브루스 같은 애들만 있는 거는 아냐. 귀족이라구 너무 경계부터 하고 그러지 마.”
“쳇.”
젬이 퉁명스럽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다 슬쩍 눈을 내려―
“…너 같은?”
―하고 물었다.
웃음이 나왔다.
“응, 나 같은!”
까칠한 아기 고양이 같은 게 꼭 누굴 닮았는걸.
“우리 같이 간식 먹자. 너, 내가 아침에 준 초콜릿 먹었어?”
“…응.”
나는 벌려놓은 약 뚜껑을 착착 닫고 간식 상자에서 쿠키와 마카롱을 잔뜩 꺼내 왔다.
식당에서 받아 둔 주스까지 침대 위에 차려놓고 보니 제법 근사한 간식 테이블이 마련되었다.
“히히.”
나는 젬과 마주 앉아 주스에 빨대를 꽂아 건넸다.
“마셔. 쿠키도 먹구.”
젬은 어색해하면서도 내가 주는 것들을 받아들었다.
젬이 맞은 건 속상하지만, 나는 그래도 이 기회에 그녀와 친해질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젬, 우리 앞으로 식당에 같이 가자.”
“…….”
“싫어?”
“…생각해 볼게.”
“칫.”
나는 입을 삐죽이며 주스를 쪽쪽 빨아 마셨다.
젬은 섭섭해하는 내 표정을 힐긋 보더니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알겠어….”
“진짜? 진짜지?”
“응.”
“으히히. 우리 그럼, 인사 다시 할까? 내 이름은 리리스 루빈슈타인이야.”
평민들도 성이 있지만, 양성소에서는 명찰에 그들의 성을 써 주지 않는다.
아예 신상 관리란 걸 해 주지를 않는달까.
입소서에 적힌 대로 철자 틀린 이름이나 애칭 따위를 그대로 쓰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전부터 젬의 풀네임을 알고 싶었는데, 말만 걸면 무시당했던지라….
‘이제는 이름을 알려 줄까?’
나는 젬의 빤한 시선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괜히 주스를 쪽 빨아 마셨다.
이윽고 젬이 나를 향해 악수하려는지 손을 건넸다.
나는 너무 좋아서, 호다닥 그 손을 잡으려다―
“…제미언 트라하야.”
“푸우우웁!”
―입에 담고 있던 주스를 그녀의 얼굴에 뿜어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