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시 눈을 감은 젬이 턱 아래로 뚝뚝 흐르는 주스를 쓱 닦아냈다.
“미, 미, 미안해!”
나는 놀라서 호다닥 티슈를 찾아 건넸다.
“난 괜찮아. 너는 괜찮아? 사레들렸어?”
“너 여자였어?”
흥분해서 대뜸 묻자, 젬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너랑 같은 방인데 여자지, 남자야? 긴 머리는 거추장스러워서 잘랐을 뿐이야.”
“와, 아니, 와.”
“너 바보야? 설마 지금까지 내가 남자인 줄 알았어?”
“너는 여자인지 알았지! 내가 남자라고 안 건…!”
제미언 트라하였다고!
하지만 놀랍게도 젬이 제미언 트라하였다….
‘이게 말이 돼요?’
「2m에 육박하는 키, 근육질의 몸, 태양 아래 붉게 빛나는 머리카락.
평민 용병단장, 붉은 들개 제미언 트라하가 권갑 하나로 선두에서 마수들을 제압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부하들은 사기가 충만해졌다.」
나는 양 뺨을 잡아당기며 입을 떡 벌렸다.
내가 편견 가득한 인간이어서가 아니다.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분명, 제미언 트라하를 묘사한 모습을 보고 여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2m의 키에 근육질의 몸 어쩌고 하는데 대체 어떻게….
‘작가, 문제 있다.’
나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얼굴도 모르는 작가 놈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아하하, 난 남자라고는 말한 적 없다?”
―하고 말이다.
‘작가 양반, 서술이 왜 이렇게 불친절해요…?’
이쯤 되면 일부러 책 속에 환생할 나를 엿 먹이려고 글을 썼다고밖에.
‘지금 내가 뒤통수 맞은 게 몇 번이지?’
주인공은 딸 때문에 반란까지 일으켰건만, 내내 딸딸거리기만 했지 ‘리리스’라는 이름 하나 안 써 줬다.
써 줬으면 ‘제임스 브라운=에녹 루빈슈타인’이라는 사실 정도는 진작 눈치챘겠지.
또, 자꾸 이런 식이면 마탑주 오스카도 계속 의심스럽다.
분명 원작의 나랑 뭔가 있는데 서술이 안 되어 있으니 알 수가 있나.
“어허엉, 작가 진짜 이상해….”
“뭐?”
나는 울고 싶어졌지만, 마음을 다잡고 젬을 다시 찬찬히 뜯어보았다.
언뜻 봐선 누구도 여자인지 모를, 남자처럼 짧게 친 붉은 머리.
거기에, 과연 될성부른 떡잎. 열한 살 나이에도 또래보다 훨씬 큰 키와 떡 벌어진 어깨.
체술이 천직일 피지컬이다.
“젬, 너 지금까지 2년 유급했지?”
“아, 응.”
젬은 유급한 사실이 부끄러운지 귀를 빨갛게 물들이고 푹 고개를 숙였다.
“이론 시험 맨날 빵점 맞지?”
“으응…. 아니, 그런 얘긴 갑자기 왜 하는데!”
“그래도 체술 실기는 잘하잖아.”
“맞아! 멍청한 귀족 도련님들 내가 다 이겨!”
젬은 뿌듯한지 가슴을 쭉 내밀었다. 나는 그런 젬을 가만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오해했는지, 젬이 귀를 붉히고 입술을 물었다.
“이론…, 누가 낙제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모르는 거 물어보면 선생들은 맨날 무시하고. 알려주는 사람이 없는데 나더러 혼자 어떻게 하라고.”
“그랬구나….”
“그래서 마법식 못 외워서 마법은 하나도 못 쓰니까, 아무도 나랑 월말평가 보려고 하지도 않고.”
“그랬구나, 그랬어….”
나는 위로하듯 젬의 어깨를 토닥였다.
월말평가는 매달 있지만, 네 명이 조를 짜야 해서 아무나 시험을 볼 순 없었다.
실기는 1등, 이론은 꼴등.
고로 마법은 조금도 못 쓰고 오직 몸만 쓸 줄 아는 젬.
그런 그녀를 같은 조에 끼워 줄 아이들은 없었겠지.
‘쯧쯧. 제미언 트라하가 얼마나 대단한지도 모르고.’
나와 체시어, 젬까지.
벌써 세 명이나 모은 어벤X스 뺨치는 월말평가 조원들을 상상하며, 나는 음흉하게 웃었다.
“걱정 마, 젬. 내가 도와줄게.”
“응?”
“나랑 월말평가 같이 보자.”
“뭐, 뭐? 정말? 나 그런데 이론 낙제….”
“그것도 걱정하지 마.”
나는 젬의 어깨에 짧은 팔을 착 둘렀다.
꼴깍, 침을 삼킨 젬이 내가 불편하지 않게 몸을 기울여 줬다.
“나만 믿어. 나 과외 9단이라구. 내가 가르친 애 소울대 수학교육과 갔어.”
“…그게 뭔데?”
“아냐. 몰라도 돼. 아무튼.”
나는 다정하게 젬과 뺨을 맞대고 말해줬다.
“오늘부터 특훈이야!”
* * *
오후에는 드디어 첫 실기 교육이 있었다.
나는 젬과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대강당으로 향했다.
실기는 전공이 달라도 교육장을 공유하는 경우가 많아서, 대강당은 아이들로 넘쳐났다.
“난 저쪽에서 교육받아야 하는데….”
[체술부-권술]
멀찍이 세워진 팻말을 가리키며 젬이 중얼거렸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풀려 하자, 왜인지 젬이 내 팔을 단단히 붙들었다.
“…수업 시작하면 가지, 뭐.”
“으항항! 그래! 나랑 더 놀자!”
그렇게 젬과 조잘거리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내 어깨를 건드렸다.
체시어였다.
“앗! 체시어, 왔어?”
고개를 끄덕인 체시어가 젬을 힐끔 쳐다보고는 내게 말했다.
“네가 찾던 제미언 트라하라는 애, 없던데. 체술부 확실해?”
“응? 날 찾았다고?”
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체시어가 그녀를 쳐다봤다.
나는 둘 사이에서 머리를 긁적였다.
“으응. 체시어, 내가 찾았어. 내가 착각했더라구. 젬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어. 심지어 내 룸메이트였지.”
등잔 밑이 어둡다….
“날 왜 찾았는데?”
나는 놀란 젬의 팔을 토닥이며 둘러댔다.
“그냥 소문이 들려서. 실기는 1등인데 이론은 꼴등인 불쌍한 친구가 있다구….”
“뭐? 내가 그렇게 소문까지 났단 말이야?”
“괜찮아, 젬. 속상해하지 마. 어차피 나한테 특훈 받기로 했잖아.”
나는 젬의 손과 체시어의 손을 잡고 가운데로 끌어왔다.
“둘이 인사해. 다 같이 친하게 지내자.”
양성소에서부터 시작된 인연!
최고의 전우, 체시어와 제미언!
“제미언 트라하야.”
“…체시어.”
“응? 그게 다야?”
“어.”
“어어, 그래.”
나는 아직은 어색한 둘이 악수하는 광경을 보며 뿌듯해졌다.
둘은 나중에 같이 마수도 때려잡고 토벌 중에 야영하며 멧돼지 뒷다리도 나눠 먹는 사이가 될 거다.
퍼즐 맞추듯 차근차근 원작을 진행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감동인가!
“얘들아, 우리 다 같이 월말평가 보자. 넷이 필요하니까 한 명은 더 생각해 보구.”
“어어?”
젬이 놀랐다.
“왜?”
“아니, 그…. 너 괜찮겠어?”
“뭐가?”
젬은 미안한 표정이었다.
“보통 명찰 색 높은 애들은 높은 애들끼리 조를 짜. 다들 흰색을 피하니까, 무조건 흰색 한 명 넣어서 짜야 하는 규칙이 있긴 한데….”
젬이 체시어의 흰색 명찰을 힐끗 봤다.
“원래 끼워주려던 친구가 있는 줄은 몰랐어. 나는 뭐, 괜찮아. 그냥 쟤랑 하고 나머지는 명찰 색 높은 애들로 찾아봐.”
가상의 필드에서 환상 마수들을 사냥하는 월말평가.
당연히 조원 선택이 매우 중요했다.
조원들의 능력치가 좋을수록 고득점을 받을 수 있고, 그럼 졸업이 빨라지니까.
다들 명찰 색이 높은 아이들과 조를 짜고 싶어 했다.
“아니야, 젬.”
“응?”
나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한 명은 아직 자기 힘을 모르는 1급 능력자에, 한 명은 계급도 씹어 먹는 능력자!’
선심 쓰듯 조원으로 받아주는 게 아니라, 내가 조별과제 버스 탈 생각이란다.
그 말은 삼키며, 나는 젬의 손을 꼭 잡았다.
“상관없어. 나머지 한 명도 흰색 명찰 친구로 구해보자. 그래야 흰색 친구들도 빨리 졸업하지.”
“너, 너 진심이야? 무슨 금색이 흰색을 세 명이나 데리고….”
“응, 그럼. 진심이지.”
나의 음흉한 속셈을 모르는 젬은, 내가 버스를 태워주는 줄 알고 감동한 표정이었다.
“리리스! 나, 열심히 할게. 너만 고생 안 하게!”
“어휴, 고생은 무슨.”
허허, 너랑 체시어가 캐리할 건데.
“체시어, 너도 젬이랑 같이 시험 봐도 괜찮지?”
“난 상관없어.”
젬이 들뜬 얼굴로 끼어들었다.
“자, 잘해 보자! 체시어!”
“그래.”
훈훈하구먼.
“리리스, 나 진짜 자신 있어! 월말평가 필드는 아직 한 번도 안 가봤지만, 절대 너한테 피해 안 가게 할게!”
젬이 의지를 불태우며 어깨에 메고 있던 천 가방을 열어 뭔가 꺼냈다.
권갑이었다.
손등부터 팔꿈치까지 감싸 주는 그녀의 주무기.
착착, 양쪽 팔에 권갑을 차는 젬을 보며 나는 입을 헤 벌렸다.
“히야, 멋지다아….”
“아하핫!”
내가 감탄하자 젬이 뿌듯해하며 웃었다.
젬뿐만 아니라 체시어도 여기서 지급받은 멋진 목검을 들고 있었다.
“둘 다 멋있네….”
마법부 아이들과 달리 체술부 아이들은 다 무기가 있었다.
체술 전공의 능력자들은 검이나 권갑, 창, 활 같은 무기에 마나를 싣는 법을 교육받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울 아빠가 부지깽이로 검기 날리듯이.
“무기도 있구….”
부러워하는 내 표정을 봤는지 젬이 또 하하 웃었다.
“너는 마법부잖아. 무기 필요 없지.”
“아냐. 나도 있어.”
“응?”
나는 흐흐 웃으며 뒤에 메고 있던 곰돌이 가방을 앞으로 돌려 멨다.
그리고 준비해 온 내 무기를 꺼내 허공으로 번쩍 쳐들었다.
“짜잔! 이것 보시라!”
없어도 상관없지만, 웅장한 이펙트를 위해 챙겨 온―
“라라 공주다!”
―체시어의 선물, 라라 공주 마법봉!
“아, 그건 대체 왜 가져온 건데.”
체시어가 부끄러운지 손으로 눈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