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들바들 떨었다.
“자랐잖아! 네 정체 여기저기 다 까발릴 셈이야?”
“그, 그럼 어떡해요? 마탑주님 죽는 거 보고만 있어요?”
“설마 죽기까지야 했겠냐?”
“그건 모르죠…. 어뜨케 확신해요….”
“하아, 빌어먹을.”
털썩, 다리를 열고 주저앉은 오스카가 머리를 쓸어넘겼다.
“이리로 와 봐.”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앞에 가서 섰다.
오스카가 내 앞머리를 넘기더니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얼마 썼냐.”
“6개월 자랐을 거예요.”
“티는 별로 안 난다. 다행이네.”
“네에. 글구 어차피 얼른 일곱 살만큼 커야 하니까 괜찮아요.”
픽 웃은 그가 내 머리를 매만졌다. 그러자 은색 머리카락이 잘려 바닥으로 차르르 떨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앞머리로 살짝 가려졌던 시야가 이전처럼 트였다.
“우와…. 머리까지 잘라 주시고 감사합니다….”
“몸은 몰라도 머리카락이 제일 티 나니까, 큰 거 쓰면 머리 제때제때 잘라. 귀찮다고 능력 써서 자르지 말고. 가위 챙겨 다니면서 가위로 잘라. 알았어?”
“네, 그럴게요.”
나와 오스카는 말없이 서로 빤히 쳐다보았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조금 전 오스카의 말로 깨달은 게 있기 때문이었다.
“이거, ‘금제’라서.”
어떻게 내 정체를 알고 있는지, 그 사실을 말할 수 없단 뜻이다.
이미 ‘금제’라는 말을 함으로써 그는 내게 어느 정도 힌트를 줬다.
아마 그 반사 작용으로 조금 전 지옥 문턱을 보고 왔을 테고.
‘나머진 내가 유추해야겠지.’
생각하며, 나는 소매를 들어 오스카의 입가에 아직 안 마른 피를 닦아 줬다.
“쓸데없는 짓 하기는.”
오스카가 꿍얼거리며 내 손목을 잡더니, 마법으로 하얀 입소복에 묻은 피를 지워줬다.
“근데 왜 오셨어요?”
“아.”
오스카가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젖히고 한숨을 터뜨렸다.
“황제가 오늘 친히 나를 불렀거든. 널 마탑으로 데려갈 생각 말라더라고.”
“아, 그랬구나….”
별로 놀라운 얘기는 아니었다.
아마 오스카는, 아무리 황제라도 마탑주인 자신을 멋대로 휘두르진 못할 거라 생각했겠지만….
‘황제는 죽기 전에 자기 이름 앞에 정복왕 타이틀을 다는 게 꿈인 인간인걸?’
그걸 위해서라면, 사실 후대까지 생각하면서 마탑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보다는 아빠의 목줄을 쥐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마탑이랑 아빠 둘 중에 아빠를 고를 거야 진작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이미 예상한 바였다.
“근데 저 어차피 마탑 안 간다고 했었는데요?”
“야, 진심이었어? 너, 아빠 전쟁 나가도 상관없는 거야?”
오스카가 눈썹을 꿈틀댔다.
“뭐, 나야 네 아빠가 뭔 짓을 하고 다니든 상관은 없다만.”
나는 툴툴대는 오스카를 가만 쳐다보았다.
그는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내 정체를 다 알면서 숨겨주는 것도.
날 마탑에 데려가서, 아빠 목줄 쥐려는 황제를 막아주려던 것도.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다 생각이 있거든요.”
“뭔 생각.”
“…….”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냥 오스카를 빤히 쳐다봤다. 오스카도 한참 내 눈을 들여다봤다.
이윽고 그가 픽 웃었다.
“그래, 뭐. 바보가 아니니 너도 뭔가 방법이 있겠지. 믿는다.”
“그럼요.”
“아니, 그런데 말이야. 너 되게 웃긴다. 이상하게 다 기억하는 것 같은데 대체 왜 나….”
말하던 오스카가 입을 다물었다.
“…나아아아비. 봐라, 저기. 나비 날아간다.”
“…….”
뜬금없이 나비 찾는 걸 보니 또 뭔가 금제를 어길까 봐 제 입을 막은 모양이었다.
“에이 씨!”
오스카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다가 벌떡 일어났다.
“또 피 토하기 싫다. 난 이만 가련다.”
“스, 스승님!”
오스카가 돌아보았다.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뭔가, 뭔가 저도 말하고 싶은데… 근데, 뭐 잘못 말했다가 아까처럼 스승님 피 토할까 봐 못 하겠구….”
“…….”
“대신, 혼자 많이 생각해 볼게요….”
나는 팔찌를 들어 보였다.
“이거 정말 감사합니다. 하나도 안 유치하구 완전 이뻐요.”
오스카가 픽 웃었다.
“그래.”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바라보았다.
* * *
금제.
원작에서 본 기억이 있는 단어다.
하면 안 될 말을 하려다가 피를 왕창 쏟은 오스카를 보면….
아마 금제라는 말을 꺼낸 자체가 금제를 어긴 것이 된 모양이다.
‘진짜 뭘까.’
나는 원작에 나온 오스카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체시어가 오스카를 찾아갔을 때.
‘테오를 낫게 하려고 미친 듯이 방법을 찾을 때였지.’
「다짜고짜 찾아와 테오 앙트라세의 병을 낫게 할 방도를 내놓으라는 어린 녀석의 패기에 오스카는 코웃음 쳤다.
“내가 뭘 어떻게 도와? 그놈의 병은 아무도 못 고쳐. 프리메라 말고는. 황제가 자기 수명 깎아 네 형을 살려줄 일도 없겠지만.”
“마탑에서 오랫동안 불용 마법을 연구해 왔다는 걸 압니다.”
“뭐, 이 미친놈아?”
불용(不用) 마법.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마법으로 보통의 능력자들은 써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오직 황제, 이 세계에서 신과도 같은 프리메라에게만 허락된 권능이기 때문이었다.
“정신 나간 놈이네. 그래, 뭐가 필요하냐? 부활? 회귀? 창조?”
“…….”
“다 쓸모없어. 뒈진 뒤에 되살려 봤자 타고난 병은 그대로일 거고, 시간을 돌려 봤자 지금까지 아팠던 거 똑같이 한 번 더 아플 뿐이다.”
“…….”
“그리고 불용 마법이 뚝딱, 하면 쓸 수 있는 줄 알아? 그러면 다 신이게?”
“…….”
“어마어마한 대가도 필요하지만, 그걸 쓰면 내게 금제가 생긴다. 까딱 잘못 금제를 어기기라도 하면 골로 가지. 내가 그런 짓을 왜 해야 하는데?”
오스카는 혀를 차며, 낡아빠진 고대서 한 권을 체시어의 앞에 툭 던져놓았다.
“네 말마따나 위험하게 불용 마법 연구하던 내 조상님들이 남긴 책이다. 그 병에 대해 한 줄인가 나와 있으니, 찾아보든가 말든가.”」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머리에 딱 힘을 줬다.
원작의 그 내용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은 세 가지.
1. 불용 마법에는 부활, 회귀, 창조가 있음.
2. 불용 마법을 쓰려면 어마어마한 대가가 필요함.
3. 불용 마법을 쓴 사람에게는 뭔지 모르겠지만 금제가 걸림(이걸 어기면 골로 감).
‘그리고 지금 오스카에게는 금제가 걸려 있지. 뭔가 불용 마법을 쓴 거야.’
오스카는 나의 정체를 안다.
그렇다면 그는 혹시, 원작의 끝을 보고 온 걸까?
‘회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저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닐까?”
“놔둬, 그냥…. 평민이잖아….”
“죽으면 어떡해?”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어째 위험천만한 아이들의 대화가 들려,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체술부-권술]
오늘 야외 실기 교육장을 같이 쓰는 권술부.
한참 1 대 1 대련 중인 아이들이 보였고, 그 사이에서 나는 브루스와 젬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으하하!”
“크윽…!”
브루스는 신나게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그의 권갑에서 풍압이 쉴 새 없이 터져나갔다.
아직 마법을 못 쓰는 젬은 속수무책으로 맞고만 있었다.
“야!!!”
나는 소리치며 젬의 앞을 막고 섰다. 브루스가 흠칫했다.
“미쳤어?”
찰나에, 아무래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듯한 브루스의 표정이 보였다.
그러니까.
‘또 너야?’ 하는 표정.
쉬이이익―!
브루스의 권갑에서 파란 마나가 주먹처럼 뻗어왔다.
“위, 위험해, 리리스!”
동시에 젬이 나를 밀치고 대신 맞았다. 그녀의 몸이 데굴데굴, 굴러 2m쯤 날아갔다.
“제, 젬! 괜찮아?”
“어! 난 괜찮아. 너, 너는? 넌 다친 데 없지?”
젬은 이리저리 터진 얼굴로도 나를 걱정하기 바빴다. 놀란 그녀의 코에서 코피가 주륵, 흘렀다.
“아.”
울컥, 화가 치밀어서 나는 브루스에게로 달려갔다.
“야! 너는 대체 뭐가 문제야?”
“으응, 미안. 나는 쟤를 때리려고 했는데, 네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못 봤어.”
거짓말. 브루스는 분명히 나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 공격했다.
기회 삼아 얄미운 나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던 거겠지.
“친구를 죽일 셈이야?”
“응? 친구라니, 누가? 쟤가?”
브루스가 코웃음 쳤다.
“나는 쟤랑 친구 아닌데?”
“아, 그래. 다시 말할게. 사람을 죽일 셈이야?”
“응?”
브루스가 또 비웃었다.
“쟤는 사람도 아닌데….”
“뭐?”
“평민이 어떻게 사람이야?”
“…….”
당당한 브루스의 발언에 나는 말문을 잃었다.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는 내게 한마디 더 하려는지, 브루스가 가까이 다가왔다.
“야, 내가 지금까지 당하고만 있었는데 이제 말할래.”
브루스가 주변에 있는 아이들을 가리켰다. 아이들 전부 우리를 보고 있었다.
“너 싫어하는 애들 엄청 많아. 몰랐지?”
“…….”
“너 온 뒤로 흰색 명찰들이 말을 안 들으려 한대. 시키는 대로 안 하고, 뭐라 하면 반항하고.”
“너희가 평민 애들을 시종으로 고용했어? 그런 게 아니면 흰색 명찰 애들은 너희 말 안 들어도 돼.”
“아니야, 넌 틀렸어.”
브루스가 고개를 저었다.
“평민은 사람이 아니야. 집에서 기르는 소나 말, 돼지 같은 거야. 그냥 말할 줄 아는 가축이라고.”
“뭐?”
와, 얘 진짜 가정교육 한번 판타스틱하게 받았네.
“아니야. 평민도 사람이야. 계급이 낮고 마법을 못 쓴다고 해서 소나 말, 돼지라고 생각하면 안 돼.”
나는 우리를 구경하는 아이들을 돌아보며 계속 말했다.
“너희들도 마찬가지야. 정신 차려. 너희랑 똑같이 생겼고 말도 하는 사람이야. 욕하고, 때리고, 노예처럼 부리면 안 된다구! 이게 어려워?”
아이들은 내 눈을 피하며 구시렁거렸다. 대놓고 반박은 못 해도 전부 불만 가득해 보였다.
귀족. 그리고 능력자.
이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보고 배운 것이 계급이었다.
내가 갑자기 이런 소리를 해 봐야 혼란스럽기만 하겠지.
‘진짜 막막하다….’
원작과 같다면 앞으로 십 년은 더 걸릴 혁명.
당장 황제를 죽이고 계급제를 뿌리 뽑지 않는 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모순적이게도, 그 계급의 힘을 빌려 협박하는 것밖에는.
“됐구, 내 말 들어야겠지? 앞으로 흰색 명찰 친구들한테 시비 걸지 마. 대련하는 척하면서 이렇게 때리지도 마. 나한테 한 번만 더 걸리면, 머리카락 싹 태워 버릴 테니까! 알았어?”
“…….”
브루스는 대답하지 않고 눈을 내리깔며 무섭게 이를 갈았다.
그때였다.
“평민도 사람이라….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나와 브루스에게 다가온 누군가.
큰 그림자가 드리워 올려다보니, 흰색 제복 차림의 남자였다.
‘뭐지? 누구지?’
화려한 금발과 푸른 눈.
나를 비웃듯,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