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제복에 권갑을 끼고 다른 연구원들처럼 차트를 들고 있었다.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있었다.
‘적어도 비중 있는 조연이겠네.’
드물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외모로 비중을 판단하기는 우습지만, 지금까지 틀린 적이 없었으니….
“교육 시간에 소란 피운 것도 모자라 이곳의 오랜 질서를 어지럽히는 발언까지 서슴없군.”
“…….”
“피는 못 속이는 모양이지. 아버지를 쏙 빼닮은 걸 보니.”
남자는 피식 웃으며 차가운 눈으로 나를 깔아보았다.
“누구세요?”
나는 경계하며 물었다.
남자는 또 웃을 뿐이었다.
그때, 젬이 내 옆으로 와 귀에 속삭였다.
“이 사람, 권술부 교육관이야. 오늘 처음 왔어. 오늘부터 우리 담당이 바뀌었거든.”
“이름이 뭔데?”
“몰라. 아직 소개는 안 했어.”
나는 젬과 속닥거리다가 다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모르긴 몰라도, 굉장히 오만한 눈빛하며 몸짓에 고고하게 밴 기품이 고위 귀족이었다.
그리고 내 행동을 영 마뜩잖아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꽉 막힌 고위 능력자. 그럼 대충 악당인가?’
이 시점에 양성소에 등장할 조연급 악당이 누굴까.
도무지 안 떠올랐다. 답답해서 나는 한 번 더 물었다.
“누구세요….”
“아, 그렇지. 소개.”
남자는 내게서 눈을 떼고 아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부터 권술부 교육을 맡게 된 알렉세이 앙트라세라고 한다. 임시로 한 달 정도지만.”
뭐라고? 나는 남자의 이름을 듣고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고, 고, 고모부?!”
이내 경악했다.
남자, 아니, 고모부가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갑자기 고모부가 여기서 왜 나와?’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입을 떡 벌리고 놀라는 나를 한참 내려다보던 고모부가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꽉 다문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어쩐지 웃음을 참고 있는 듯했다.
“진짜 미치겠네….”
다시 눈을 가렸던 손을 떼고 나를 바라보는 고모부의 표정은 전과 달리 부드러웠다.
“리리스 루빈슈타인.”
“아, 안녕하세요….”
배꼽 인사를 하는 나를 보고 고모부는 입술을 꽉 물었다.
그리고 후, 하, 심호흡을 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더니 나를 향해 팔을 벌렸다.
“……?”
“…안 돼? 한 번만.”
안기라는 건가?
뭐 고모부야 아군이니 어려울 것도 없지만.
‘그런데 표정이랑 대사가 너무 악당 같았는데….’
경계하는 나를 알아봤는지 고모부가 팔을 내렸다.
“안 되나….”
“아, 아니요?!”
나는 일단 호다닥 고모부의 품에 안겨주었다.
그러자 고모부가 나를 가뿐히 안고 일어났다. 그의 팔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가벼우니까 무거워서 떠는 건 아니고, 역시….
‘날 엄청나게 귀여워하고 있군.’
악당일까 봐 걱정했던 마음을 잠시 접어 두고 나는 고모부의 목을 끌어안으며 매달렸다.
“만나서 반갑슴니다, 고모부!”
“후우.”
고모부는 나한테서 눈을 못 뗐다. 나도 고모부의 잘생긴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어쩐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살짝 익숙하다 했지. 쌍둥이 오빠들이랑 닮았어!’
알렉세이 앙트라세
1. 계급, 도스.
2. 앙트라세 공작.
3. ‘도스 마권사단’ 단장.
4. 에녹 루빈슈타인을 필두로 한 혁명군 간부.
5. 쌍둥이 오빠들의 아버지이자 내 고모부!←(New!)
원래였으면 한참 뒤에야 나올 주요인물이지만….
‘테오 오빠가 나아서, 조금 빨리 제도로 돌아오게 됐지. 이대로면 혁명도 초고속으로 해 먹을 수 있는 거 아냐?’
나는 속으로 쿡쿡 웃었다.
“한데 무슨 소란이었지? 1 대 1 자유대련 시간이었을 텐데.”
고모부가 브루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브루스는 고모부의 품에 소중히 안긴 나를 보며 겁먹었는지 창백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런 브루스가 좀 불쌍해 보여서….
“브루스가 대련이라구 젬을 너무 심하게 때렸어요! 제가 말리려고 했는데 저한테도 공격해서 젬이 막아 줬다가 또 맞구 코피까지 났어요!”
바로 일러줬다.
“뭐?”
고모부는 젬을 살폈다.
흙투성이에 생채기도 많고 코피까지 흘리고 있었다.
연습 대련은 기본적으로 서로 다치지 않게 신경 써야 했다. 다들 귀한 몸이시니까.
하지만 상대가 흰색 명찰일 때는 사정이 달랐다.
‘평민들이라고 신나서 패 버리겠지.’
선생들은 딱히 제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고모부는 다르겠지? 제발!
“브루스 챔버….”
고모부는 나를 안은 채로, 들고 있던 차트를 파라락 펼쳤다.
“1년 유급했는데도 졸업 점수를 950점밖에 못 모았나? 예상 계급 2급인데도 실력이 형편없군.”
브루스의 성적이 만천하에 공개됐다.
“대련의 기본은 상대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다. 그리고 실력 차이가 나니 명찰 색이 동일한 능력자들끼리 짝지어 대련하라 분명 말했을 텐데.”
“…….”
“실력 향상을 위한 연습 대련이 아니라 사람을 샌드백 삼아 의미 없는 마나 낭비나 하고 있었군.”
고모부의 촌철살인에 브루스는 낯이 팔리는 모양인지 시뻘겋게 뺨을 붉혔다.
“안전수칙 위반에 담당 교육관인 내 가르침에도 불응. 브루스 챔버, 벌점 100점이다.”
“네, 네?!”
잠자코 듣고 있던 브루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1년 넘게 야금야금 모은 950점 중 100점이 한 방에 날아가는 순간.
브루스가 놀라건 말건, 고모부는 아이들을 향해 계속 말했다.
“실력 차이 나는 상대와 임의로 대련 중이었던 전부, 마찬가지로 벌점 50점씩이다.”
흰색 명찰들을 괴롭히고 있던 몇몇 아이들이 경악했다.
“그리고.”
고모부는 나를 바로 안으며 눈을 맞췄다.
“평민도 사람이 맞다.”
“아….”
그리고는 다시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그러니, 내 교육 시간에 두 번 다시 이와 같은 불미스러운 일을 벌이지 말도록.”
* * *
고모부는 내가 너무너무 보고 싶은 나머지 퇴소일까지 못 기다리고 양성소에 왔다고 했다.
권술부 임시 교육관으로 지원까지 하면서 말이지….
‘어쩐지. 테오 오빠 편지에 날 보러 올 거라고 쓰여 있더니.’
과연 가문도 내팽개치고 테오를 낫게 하려 세계 일주까지 하고 온 사람의 실행력다웠다.
“그런데 고모부.”
“응?”
“저, 저 좀 내려 주시면 안 될까요? 무거운데….”
고모부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를 안고 교정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마주치는 아이들마다 놀라면서 숙덕거리는데, 좀 눈치 보였다.
‘이거 괜찮은 걸까?’
황제에 마탑주, 앙트라세 공작까지.
어느새 양성소에서 내 위치는, 권력자들 사랑을 듬뿍 받는 공주님이 되어 있었다….
“뭘 무거워. 안겨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왜, 싫어?”
“아녀, 아녀! 싫은 건 절대 아니구요! 고모부가 힘들까 봐서….”
“후우.”
고모부는 웃음을 참다가 내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이래서 다들 딸 낳으려 하는군.”
“히히, 고모부! 이제 어디 안 가죠? 오라버니들이 맨날맨날 고모부 보고 싶다구 그랬단 말이에요…. 그니깐 어디 가지 마세요!”
“그래. 그 얘기도 하려 했는데. 고맙다. 네 덕에 테오가 말끔히 나았더군. 나도, 오르디아도 한시름 덜었다.”
“멀요. 테오 오라버니가 나아서 저도 너무너무 기뻐요.”
“녀석.”
고모부는 걸으면서도 연신 내 얼굴을 뜯어보기 바빴다.
“왜 이렇게 이쁘냐?”
“킁.”
민망해….
“처남이 왜 껌뻑 죽는지 알겠군. 딸한테는 영 딴사람이 된다길래 믿기 힘들었는데.”
“아! 글구 보니 고모부는 아빠 옛날 모습 아시죠?”
“잘 알지. 전쟁터도 수십 번은 더 같이 나갔는걸. 처남은 일단, 너무 말수가 없어서 친해지기 힘든 사람이었어.”
역시 상상도 안 된다. 말수 없는 아빠라니.
물론, 원작의 에녹 루빈슈타인은 딱 그랬지만.
“결혼은 할 수 있으려나, 오르디아가 걱정 많이 했는데.”
픽 웃은 고모부가 내 코끝을 톡 건드렸다.
“이렇게 천사 같은 딸까지 봤군.”
“헤헤.”
“말뿐이 아니라 진짜 천사지. 넌 테오만 살린 게 아니라 나도 살린 거나 마찬가지야.”
“네?”
“음. 나는 테오의 병을 알게 됐을 때부터, 쭉 그 애를 낫게 할 방법을 찾아 왔어.”
고모부가 눈썹을 쓱 올리며 덧붙였다.
“이번에 원정 나갈 때도, 별다른 수확이 없다면 마탑에 쳐들어가 불이라도 지를 생각이었다.”
“네에? 마탑에는 왜요?”
“마탑이 쓸 만한 마법을 알고 있으니까. 테오가 잘못되면 마법식을 내놓으라고 할 생각이었지.”
나는 곧바로 깨달았다.
고모부가 말하는 ‘마법’이 보통 능력자들이 써서는 안 되는 불용 마법이라는 걸.
“서, 설마 죽은 사람 살리구 막, 그러는 마법이요…?”
“아, 맞아.”
“마법식만 알면 쓸 수 있어요?”
“그렇게 쉬우면 죽은 사람들 다 살아나겠지.”
고모부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마탑주나 알고 있을 미공개 마법식이 한… 천 개쯤? 필요하고.”
“힉!”
“마나도 어마어마하게 들지. 1급 도스 중에서도 그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들은 얼마 안 될 거야. 마탑주나 처남 정도….”
“고모부는요?”
“그래, 나도 가능해.”
“우와! 그럼 마탑주님이 마법식만 알려 주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어요?”
“아니, 그렇게 쉬우면 죽은 사람 다 살아난다니까.”
고모부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내 코끝을 툭 건드리더니, 이내 머뭇거리며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대가가 필요하지.”
“무슨 대가요?”
“…….”
고모부는 대답하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눈치였다.
‘뭔가 엄청난 대가인가 본데?’
나는 긴장하면서 고모부를 재촉했다.
“아, 알려 주세여. 궁금….”
“음, 그래. 어차피 네 덕에 그 마법을 쓸 일은 없게 됐으니까.”
“네, 네!”
“절대 비밀이다. 쌍둥이들한테도, 네 고모한테도 말하면 안 돼. 내가 이 마법을 알아보고 있었다는 거.”
“네! 입 꾹! 다물게요!”
나는 손으로 입을 막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모부는 피식 웃고 말했다.
“시전자의 목숨….”
“…네?”
“부활에는 등가교환이 필요해.”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