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같이, 지옥에 떨어져 줄게.”
나는 포크를 입에 넣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체시어가 그 엄청난 대사를 친 이후 벌써 2주나 흘렀지만….
“리리스!”
“어어, 으응.”
떠올릴 때마다 여전히 멍해지곤 했다.
젬이 밥 먹다 말고 내 앞에 마구 손을 흔들었다.
“대체 무슨 생각 해?”
“암것두 아냐.”
“아무것도 아니긴? 눈이 흐리멍덩하게 풀렸는데?”
“흠흠.”
민망해져서 다시 포크를 드는데 저 멀리에 식사 중인 체시어가 보였다.
오늘도 여전히 빛이 나는 얼굴.
주변 애들은 강제 엑스트라행이었다.
‘로맨스…. 작가가 좀 이상한 건 확실한데, 그래도 로맨스는 안 빠트리고 넣은 게 아닐까…?’
그게 아니면 저런 미모로 그런 어마어마한 대사를 아무런 자각 없이 내뱉을 수 있을 리가….
“너어. 리리스.”
젬이 체시어에게 빤히 닿은 내 시선을 좇더니 이내 눈을 가늘게 뜨고 음흉하게 웃었다.
나는 젬이 이상한 말을 하기 전에 선수 쳤다.
“구구.”
“아, 팔십일!”
“잘했어. 칠팔에?”
“오십육!”
“어이구, 장하다.”
“으하핫!”
주고받는 우리를 맞은편에서 보고 있던 앨리샤가 입을 쑥 내밀었다.
“리리스, 너 진짜 얘랑 월말평가 볼 거야?”
“응.”
“왜? 너 빨리 졸업하고 싶댔잖아.”
“야! 내가 어디가 어때서!”
젬이 발끈하며 덧붙였다.
“나 이제 마법식 그릴 줄 알거든? 어제 이론 시험 팔십 점 맞았다?”
“흥!”
앨리샤가 귀엽게 뺨을 부풀리며 콧방귀 뀌었다.
티격태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간 우리 방 아이들은 꽤 친해졌다.
“어차피 흰색 명찰 꼭 한 명씩 넣어서 조 짜야 하잖아. 젬 이제 리리스한테 배워서 마법 쓸 줄 아니까 완전 최고지.”
“맞아. 젬이 그래도 실기는 맨날 1등이었으니까. 나는 리리스가 똑똑하게 조 잘 짰다구 생각해.”
다이앤이 말하고 미셸이 받자 젬의 코가 쑥 솟았다.
“그럼, 그럼!”
“히히! 이제 2주 남았으니까 더 열심히 하자, 젬. 든든하게 먹구 오늘도 저녁에 체시어랑 같이 연습하자구!”
“좋아!”
내가 격려하자, 젬은 신나서 입에 음식을 마구 욱여넣었다.
“어휴, 진짜 많이 먹네. 돼지도 너보다는 많이 안 먹겠다!”
앨리샤가 구시렁거리며 제 몫의 소시지를 젬의 식판에 옮겨 줬다.
“뭐야?”
“난 배불러. 너 먹든가 말든가.”
“고작 그거 먹고 배가 불러? 어유, 역시 귀족 아가씨들이란….”
투닥거리는 둘의 모습이 이렇게 정겹다.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쓱, 코를 훔쳤다.
‘그래, 이렇게만 하자. 이렇게만.’
얼른 졸업하고 아빠 옆에 꼭꼭 숨어서 원작을 떠올리며 조금씩 도움을 주면 될 거다.
이 적폐 제국에 혁명을!
최대한 빠르게!
승리가 보장된 주인공 둘이 내 편인데, 빌런 황제 따위한테 지레 겁먹을 필요 있나.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의지를 다지며 또 힐끗, 체시어를 쳐다봤다.
‘엇?’
체시어도 마침 나를 보고 있었는지 눈이 마주쳤다.
빤한 시선에 슬쩍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는데―
“리리스.”
아하, 나를 본 게 아니라 이쪽으로 온 제라드를 보고 있었던 모양.
“응, 제라드. 왜?”
옆에는 재수 없는 브루스와 처음 보는 얼굴의 평민 아이 한 명이 있었다.
“나랑 월말평가 같이 보자.”
“응?”
제라드의 말에, 정적.
식당 안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에게 향했다.
“어, 음.”
제라드는 우리 편, 우리 편…. 아직 덜 노래진 싹수, 갱생시켜서 함께 가야 할 친구….
나는 그렇게 속으로 되뇌면서, 가장 기분 안 나쁘게 거절할 말을 골랐다.
“어쩌지? 미안해. 나는 이미 같이 시험 볼 친구들 구했어.”
“누구?”
“여기, 젬이랑.”
젬의 어깨를 짚고 일어난 내가 체시어를 가리켰다.
“체시어!”
“…….”
제라드가 눈을 깜빡거렸다.
“흰색을 둘이나?”
“응!”
“아니야. 한 명만 넣으면 돼. 여기, 브루스도 2급이고.”
제라드는 함께 데려온 흰색 명찰 친구를 가리켰다.
“얘는 버틀러라고 해. 흰색 중엔 제일 성적 좋아.”
“으응, 근데 나는 친구들 구했다니까?”
“조 그렇게 짜면 안 돼. 흰색은 능력치가 떨어져.”
나는 슬슬 언짢아졌다. 무슨 게임 아이템 고르듯 말하는데, 이미 싹수가 노래진 건지 아직은 갱생의 여지가 있는지 헷갈렸다.
“있지, 제라드. 아직 나 조원 한 명 더 필요해. 근데 그 한 명도 흰색 명찰 친구로 구하려구.”
“뭐?”
제라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주변 아이들도 다 입을 떡 벌렸다.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졸업 안 할 생각이야?”
“아니? 해야지.”
제라드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나랑 해. 난 천 점 거의 다 모았으니까, 이번 시험에 너한테 점수 다 몰아줄게.”
“허억.”
“우와….”
“조, 좋겠다.”
금색 명찰이 대놓고 버스 태워주겠다는 발언에 아이들은 부러움의 탄성을 흘렸다.
“흰색을 세 명이나 끼면, 계속 F급 마수나 잡고 있어야 해. 백날 잡아도 졸업 못 해. C급 잡아야 점수 빨리 모을 수 있어.”
“그러면 내가 친구들 몫까지 C급 잡아 주면 되지.”
“뭐라고?”
“제라드.”
나는 부디 내 말이 먹히길 바라면서 입을 열었다.
“우리는 금색이잖아.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 그런데 굳이 왜 잘하는 친구들만 모아?”
“…….”
“흰색 친구들은 점수 모으기가 힘드니까 우리가 도와주면 같이 빨리 졸업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멍하니 선 제라드의 손을 잡고 계속 말했다.
“울 아빠가 그랬어, 제라드. 강한 능력자는, 강한 힘을 좋은 데 쓸 줄 알아야 한대. 넌 강하니까 약한 친구들을 도와주면 훨씬 좋지 않을까?”
금금빨 조합은 진짜 양심도 없이 비효율적이잖아….
제라드는 침묵하며 한참 나를 응시하다,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리리스. 네 말 잘 알겠어. 이번 시험 잘 보길 바랄게.”
* * *
취침을 앞둔 저녁 시간.
젬의 기합이 우렁찼다.
“이얍! 합!”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교정에 나와 수련 중이었다.
“흐음.”
나는 특훈하는 체시어와 젬을 구경하며 고민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우리 싹 다 공격 계열 능력자네. 아무래도 효율 떨어지는 조 편성이야.’
마수를 잡아 점수를 모아야 하는 월말평가.
물론 환상 마법으로 만들어진 가짜 마수지만, 시험장 안에서는 실제로 공격도 당하고 상처도 입는다.
그래서 방어나 치유 계열 능력자들이 한 명은 꼭 필요했다.
어차피 체시어와 젬의 실력이 좋고 내가 모든 계열 마법을 쓸 줄 아니 큰 걱정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대한 생명력을 아껴 써야 하니까, 남은 조원 한 명은 힐러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나는 열심히 훈련 중인 둘에게 손을 흔들었다.
“얘들아아! 너희 방어나 치유 계열 아는 애들 좀 없어?”
“아아, 그러고 보니 우리 실드 하나 없이 해야 하네?”
“…….”
젬과 체시어가 땀을 닦으며 내 곁으로 왔다.
“그건 걱정하지 마. 나 방어 마법식도 몇 개 외워놨거든. 내가 실드 쳐 줄게!”
“헉! 정말? 역시 리리스 넌 대단해!”
젬이 흥분하며 웃었다.
“그래도 한 명은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체시어가 걱정했다.
“응, 있으면 좋긴 하지만 없어도 정말 괜찮아. 내가 너 안 다치게 꼭꼭 지켜 줄게.”
“…….”
배시시 웃으며 말하자, 나를 빤히 보던 체시어가 이내 고개를 틀며 “그래.” 하고 중얼거렸다.
“뭐야, 뭐야! 둘이 뭐야!”
젬이 광대를 씰룩거리며 우리를 놀렸다.
그때였다.
“얘, 얘들아!”
“앗, 롬?”
체시어의 룸메이트, 롬.
품 안 가득 간식거리를 안고 온 그는, 우리가 앉아있던 파고라 위에 그것을 와르르 쏟아놓았다.
“아니, 롬…. 안 갖다줘두 된다니까 그러네.”
“헤헤. 너, 너희 맨날 고생하잖아. 배, 배고프니까 먹고 해.”
롬은 우리가 저녁마다 교정에 나와 연습하는 걸 알고 이렇게 꼭 간식을 챙겨다 줬다.
“그, 그럼 너무 무, 무리하지 마, 말고 저, 적당히 하고 다들 자러 가!”
“잠깐, 롬!”
나는 롬을 붙잡았다.
“으, 응?”
“너 월말평가 같이 볼 친구들 정했어?”
“어어?”
롬은 맹한 눈을 몇 번 깜빡거리다가 이내 손사래 쳤다.
“아, 아니야! 나, 나는 됐어! 괘, 괜찮아!”
“에이, 모야. 나 아직 말도 안 꺼냈는데?”
“가, 같이 시, 시험 보자고 하, 하려는 거 아냐?”
“응, 맞아. 너 아직 조 안 정했으면 우리랑 같이 하자.”
“아니야! 지, 지금 리, 리리스 네가 희, 흰색 명찰 조원 하, 한 명 구하고 있대서 다, 다들 하고 싶어 해. 나, 나보다 잘하는 애들 마, 많으니까 걔들이랑 해.”
“꼭 잘할 필요 없어. 너 졸업 안 할 거야? 같이 하자.”
“아, 아니야. 사, 사실 나, 나는 별로 졸업 아, 안 하고 싶어.”
“으응?”
뜻밖의 대답에 우리 셋은 당황해서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여, 여기 바, 밥도 주고 가, 간식도 주고 재, 재워 주잖아. 우, 우리 집 가, 가난하거든. 그, 그나마 내, 내가 여, 여기 있어서 우, 우리 엄마 펴, 편할걸.”
“아?”
“나, 나 먹인다고 우, 우리 엄마는 구, 굶고 그랬어. 차, 차라리 나 여, 여기 계속 이, 있는 게 더 나아.”
“아니야, 롬!”
“아니야.”
나와 체시어가 동시에 말했다.
우리는 서로 쳐다봤다.
“으, 으응?”
롬이 고개를 갸웃하자, 나 대신 체시어가 말했다.
“졸업해야 해. 능력자 배지 받고 여길 나가면 달라지니까.”
“으, 응?”
“사람들이 널 무시하지도 않을 거고, 일도 구할 수 있어. 너랑 어머니 둘 다 굶지 않아도 돼.”
“맞아!”
내가 끼어들었다.
“롬, 너 엄마 보고 싶잖아.”
“어, 으응. 마, 맞아….”
“능력자 배지 받구 당당하게 가서 엄마랑 지내자! 네가 이제 엄마 맛있는 거 먹여 드려야지!”
“저, 저, 정말? 그, 그럴 수 이, 있어?”
“응, 당연하지!”
“그럴 수 있어.”
나와 체시어가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젬이 우리 어깨에 팔을 걸치며 불쑥 튀어나왔다.
“이 나라는 능력자이기만 하면 아주 편하게 살잖아!”
“그, 그러, 그런가….”
롬은 한참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 알았어. 그, 그런데 나 저, 전혀 도움이 아, 안 될 텐데 괘, 괜찮을까…. 너, 너희랑 다, 달리 서, 성적도 아, 안 좋고.”
“괜찮아, 괜찮아!”
나는 롬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어주며 물었다.
“그런데 롬, 너 전공 뭐야?”
“나, 나?”
롬이 민망한 듯 뺨을 긁적였다.
“제, 제일 쓰, 쓸모없는 거, 건데. 마, 마법 치, 치유 계열….”
“뭐어?!”
이런 우연이! 나는 입을 막고 체시어와 젬을 돌아봤다.
둘 다 웃고 있었다.
‘넝쿨째 굴러들어온 힐러!’
어쩐지 느낌이 좋았다. 어벤X스 뺨치겠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