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월말평가 D-2.
따뜻한 봄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6월 말.
쨍쨍한 햇살이 꽤 무덥다.
파릇파릇한 잎을 펼친 교정의 나무 그늘 아래.
누워서 허공에 책을 펼치고 보던 나는, 식곤증 탓인지 살짝 졸렸다.
“어이쿠.”
“우아, 깜짝아!”
감기려던 눈이 번쩍 뜨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얼굴 위로 떨어질 뻔했던 책을 고모부가 잡고 있었다.
“조심해야지.”
고모부가 나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고모부 무릎이 편해서 졸려요….”
“그럼 책 보지 말고 낮잠을 자. 수업 시작하면 깨워줄 테니.”
“으으응. 안 돼요. 내일모레 시험 본단 말이에요.”
나는 폴딱 일어나 뺨을 짝짝 쳐 잠을 깨운 다음 다시 책을 펼쳤다.
마법식이 필요 없는 나지만, 그럼에도 종류별로 최대한 많이 외워두어야 했다.
지나치게 어려운 마법을 쓰면 정체를 의심받을 수 있으니까.
혹시나 하는 상황이 오면 “다 아는 마법식이라 쓴 거예요!” 하고 변명하기 위함이었다.
“근데 고모부는 오빠들 안 보구 싶으세요? 제도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여기 오셨잖아요. 집에도 못 가고 관사에서 계속 지내시구….”
나 하나 보겠다고 한 달 남짓 권술부 교육관 노릇을 하고 있는 고모부에게 조금 미안했다.
여기 온 목적을 톡톡히 달성하려는지, 매일매일 이렇게 점심 먹고 나를 보러 오는 것도….
“아닌데. 난 외출 되니까 집에 자주 다녀왔다. 그리고 임시 근무 얼마 남지도 않았는걸. 쌍둥이는 곧 볼 수 있으니 괜찮아. 네가 걱정이지.”
“저요?”
“혼자서 잘할 수 있나.”
“저도 이틀 후에 시험 보구 나갈 건데요?”
내 말에 고모부가 멍하니 눈을 껌뻑였다.
“월말평가 한 번에 졸업하겠다고?”
“네!”
“하하하!”
고모부가 내 뺨을 꼬집었다.
“자신감이 넘치는군. 쌍둥이도 석 달 걸렸는데.”
“저는 한 번에 할 수 있어요!”
“대단한걸.”
고모부의 웃는 표정을 보니, 나를 기특해는 하지만….
월말평가 한 번에 졸업하겠다는 패기는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저 진짜 할 수 있어요?!”
“그래, 그래.”
“치이. 고모부는 얼마 만에 졸업하셨는데요?”
“음, 언제적 양성소지…. 하지만 기억은 난다. 나는 한 달.”
“모예요? 고모부도 한 달 걸렸으면서!”
“맞아. 한 달 만에 졸업할 수도 있지. 네 명이 한 조니까. 너 인기 많으니까 남자친구들이 대신 다 잡아 준다고 한 거 아니냐?”
“그거는…!”
정말로 다 잡아 준다고 했던 체시어의 말이 떠올라 찔렸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아하하, 그래. 아니, 그런데. 정말 대신 잡아 주고 그래. 나 때는….”
회상에 잠기는 듯 고모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양성소에서 유행하던 고백법이 그거였거든. 마음에 드는 애한테 가서 ‘넌 손 하나 까딱하지 마. 내가 다 잡아 줄게.’라고 했어.”
“으항항! 웃기다. 정말요?”
“어. 네 고모도 그렇게 꼬셨는데.”
“네에?”
나는 놀랐다.
“고모를 양성소에서 만나셨어요?”
“몰랐어?”
연애 결혼이었어?!
고위 귀족은 열에 아홉이 가문끼리의 정략혼.
로맨스라곤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원작 세계관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더 말해 주세요, 고모부!”
“음, 나 입소했을 때 오르디아는 2년 유급 중이었어.”
“우엥? 고모가 왜요?”
참고로 고모의 계급도 도스다.
마법 전공 방어 계열.
“평가를 매번 6급 친구들이랑만 보더라고. 그 친구들은 졸업이 어려우니 자기가 도와줘야 한다면서.”
“와아.”
과연 뼛속까지 루빈슈타인.
의심의 여지 없는 주인공 누나였다….
“오르디아는 공격 계열도 아닌 데다가 자기 점수를 친구들한테 나눠주니까 졸업이 늦어졌지.”
“그랬구나.”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이해가 안 됐는데, 뭐. 생각해 보면 내가 그런 성격에 반한 거라.”
고모를 떠올리는지 고모부가 픽 웃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울고 있더라고. 아빠 보고 싶다고.”
“어어, 어뜨케….”
“친구들을 도와주고는 싶은데 졸업은 늦어지지, 아빠는 보고 싶지.”
“고모 불쌍해요.”
“그래서 내가 딱 가서 말했다. 야, 나랑 같이 시험 보자.”
고모부는 비장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네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게 해 줄게.”
“헙.”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머, 멋지다.”
365일 24시간 피 튀기는 이곳에서 실로 완벽한 고백이 아닐 수 없었다….
“고, 고모부 최고…. 완전….”
“장난 아니지?”
고모부가 우쭐해했다.
“네! 그래서 고모가 뭐라구 하셨어요?”
“울면서 째려보더라고. 그리고.”
“그리구?”
“이씨, 누나라고 불러라?”
“…….”
“―라고 했어.”
“네에? 아하하!”
나는 귀여운 둘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며 웃어버렸다.
“그리고 같이 시험 보러 가서, 내가 A급 마수를 잡아 줬다.”
“우엥. A급이요? A급도 있어요? C급이 제일 높은 거랬는데?”
“아아, 필드에 A급 두 마리 있어. A급은 잡기만 해도 졸업이야. 천 점 주거든.”
“우, 우와! 진짜요?”
“물론 잡으라고 있는 건 아니지. 아무나 못 잡아. 어려워.”
“고모부는 잡으셨잖아요?”
“그렇지. 잡아서, 오르디아한테 그놈 핵을 딱 주면서 고백했다.”
고모부는 또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누나, 여기서 나가면 나랑 사귈래?”
“으하, 으하하항!”
“하하하!”
마수의 핵으로 고백이라니.
과연, 살벌한 세계관에서 피어나는 로맨스다웠다.
* * *
월말평가 D-0.
대망의 날이 밝았다.
“얍! 날씨 좋고!”
“어, 어떡해. 나 떠, 떨려….”
“…….”
월말평가 필드는 양성소 건물 뒤에 있는 발키리 산맥.
우리 조는 필드 입구에 모여 시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리리스. 너 뭘 그렇게 바리바리 챙겨 온 거야?”
등에는 빵빵해진 곰돌이 가방, 손에는 보따리 하나를 질질 끌다시피 온 나를 보며 젬이 물었다.
“끄응. 다 필요한 거야….”
“어휴. 내가 들어 줄게.”
젬이 내 손에 들린 큼직한 천 보따리를 가져갔다. 가볍게 불쑥 들렸다.
“엥. 뭐야? 가볍네.”
“와. 역시 괴력….”
“아하핫!”
필드 입구에는 아이들이 많기도 많았다.
꼭 수련회 온 느낌이라, 나는 조금 들떴다.
“앗! 선생님이 부른당! 나 가따 오께!”
조장, 리리스 루빈슈타인!
나는 입구에서 연구원들이 주는 마도구 팔찌를 왼쪽 손목에 찼다. 이건, 일종의 점수판이었다.
다시 돌아와 보니, 각자의 무기를 점검 중인 체시어와 젬.
나는 목검을 쓱쓱 휘두르고 있는 체시어를 봤다.
‘지금 줄까?’
어쩐지 부끄러웠다.
“체시어!”
“어.”
“근데 목검 가지구 마수 어케 잡아? 베고 찢고 그래야 하는데.”
“…? 그냥은 못 잡지. 마나 묻혀서 잡는 거야.”
“마나 막 쓰면 안 되지.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아껴 써야지.”
“…….”
쓸데없는 말을 길게 하는 나를 느꼈는지 체시어가 물끄러미 쳐다봤다.
“저, 저기 봐. 제라드 쟤도 좋은 거 갖구 있네?”
무심코 가리킨 곳에 제라드가 있었다.
검술부 애들은 보통 다 목검을 들고 가는데, 입소 때 진검 챙겨오는 금수저들도 더러 있었다.
‘그나저나 제라드 쟤는 기어코 욕심쟁이 조합 짰네.’
제라드는 양옆에 2급 빨간 명찰을 둘이나 끼고 있었다.
나는 다시 목검을 살피는 체시어를 보다가, 젬이 들고 있던 내 보따리에서 뭔가 꺼냈다.
천으로 둘둘 말린 막대기 같은 것. 이건….
‘나의 선물!’
입소 때 몰래 준비해 왔던 선물이다.
“뭐야.”
“열어 봐.”
건네자, 의아해하던 체시어가 천을 휙휙 풀어 열었다.
“…….”
“어, 어? 요, 요, 용사 루, 루이 마, 마검이다….”
구경하던 롬이 알아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다! 용사 루이의 마검!
용사 루이가 누구인가.
메가 히트작 동화 <라라 공주의 모험>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이다.
체시어는 관심 없겠지만, 보통 남자애들은 앞다투어 갖고 싶어 하는 인기 장난감이란 말씀.
“이거….”
“꽤 딴딴하구 좋지? 목검보다 더 깡깡할걸?”
장난감이라도 목검보다 쓸 만할 거다. 검신의 경도를 높여 놨기 때문이다.
‘황제 놈이 내 마법봉 업그레이드해 줬던 걸 따라 해 봤지.’
반응이 궁금해서 부끄러워하며 서 있는데, 체시어는 말이 없었다.
“마, 마음에 안 들어?”
“아니. 마음에 들어.”
체시어는 그 자리에서 목검을 휙 던지고 마검을 휘둘렀다.
손에 착착 감기는 게 딱이었다.
“고마워.”
“으히히. 응….”
“야, 체시어. 너 그게 다야?”
젬이 끼어들었다.
“뭐?”
“마음에 들어. 고마워.”
젬이 무뚝뚝한 체시어의 말투를 따라 하더니 구시렁거렸다.
“그게 다냐고! 리리스가 기껏 무거운 거 들고 와서 선물까지 해 줬는데!”
“아냐, 아냐! 젬, 체시어는 원래 저래. 난 고마워로 충분해.”
“어우, 진짜 재미없는 놈이라니까. 너 그러면 여자애들한테 인기 없다!”
“…….”
체시어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엇, 이제 들어간다! 우리도 빨리 가자!”
“…리리스.”
필드로 들어가려는데, 체시어가 나를 불렀다.
“응?”
나와 젬, 롬이 왜인지 머뭇대는 체시어를 돌아봤다.
“…….”
“왜?”
“…넌 손 하나 까딱하지 마.”
“……?”
“내가, 다 잡아 줄게.”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잠깐. 이거 고모부가 말한 ‘양성소 고백법’ 아니야?
“오올~!”
젬이 멍하니 선 내 어깨를 툭 치며 놀렸다. 옆에서 롬도 막 웃었다.
“어어, 으응.”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손만 꼼지락대고 있는데, 체시어가 나를 쓱 지나쳐 가며 말했다.
“네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게 해 줄게.”
…와?